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사진)가 탄핵과 관련해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그 모습을 반드시 드러낼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정해진 결론을 위한 요식행위”라고 표현했다. 탄핵과 재판 모두 부당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씨는 수감 동안 지지자와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 출간한 책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에서 이같이 밝혔다. 책은 30일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씨는 탄핵 과정과 재판의 부당성을 여러 번 언급하며 “거짓은 잠시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세상을 속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그 모습을 반드시 드러낼 것”이라고 적었다.
재판 과정을 두고는 “수많은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일주일에 4번씩 감행하는 살인적인 재판 일정을 참아낸 것은 사법부가 진실을 가려줄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 때문이었다”며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것을 보고 정해진 결론을 위한 요식행위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어 “진실은 훗날 역사의 법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당시 자신을 수사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향한 직접적인 발언은 없었다. 한 지지자가 ‘증오의 대상 윤석열이 조국을 치는 이유가 뭔지 혼란스럽다’고 보낸 편지에 대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판한 내용은 담겼다. 박씨는 “조국 장관 청문회 이야기는 많은 국민들이 소식을 보내주셔서 잘 알고 있다”며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고 했다. 이어 “거짓말이 일부를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며 “남을 속이려 들면 들수록 더 깊은 거짓말의 수렁에 빠지는 평범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랏일을 맡을 수는 없다”고 했다.
세월호 7시간’ 논란에는 “그날은 몸이 좋지 않아 관저에서 보고를 받았다. 해괴한 루머와 악의적인 모함이 있었지만 진실을 믿었기에 침묵했다”며 “시간이 흐르면 어떤 것이 진실인지 밝혀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앞에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의 쾌유를 기원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후보 본인과 가족을 둘러싼 의혹이 지배하는 대통령선거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박근혜 사면’이라는 새 폭풍은 의혹 해명으로 바쁜 유력 대선후보들의 고민거리를 늘렸다. 표면적으로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보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살얼음판 건너듯 상황에 대응하는 모양새다.
실제로 사면 정국 이후 발표된 양 후보 여론조사 지지율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윤 후보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하락하며, 이 후보가 앞서가는 상황이다. 이러한 변화가 모두 ‘박근혜 사면’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사면과 지지율 역전 현상은 거의 동시에 발생했다. 완벽한 ‘인과관계’는 아니더라도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발생한 셈이다. 게다가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가 갖는 정치적 상징성도 있다. 향후 박씨가 어떤 말을 하든, 아무런 말을 하지 않든 그 자체가 정치적 언어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다. 양 후보의 격돌이 점차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박씨 사면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주목된다.
■박근혜 사면을 둘러싼 딜레마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4일 ‘2022년 신년 특별사면’ 대상에 박근혜씨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박씨는 12월 31일 0시부터 공식적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구속수감된 2017년 3월 31일부터 계산하면 약 4년 9개월 만이다. 기습적으로 발표된 박씨 사면에 대선후보들은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해 대응에 나서고 있다. 특히 박씨 사면이 결정된 24일, 이 후보에게 지지율이 오차범위 밖으로 뒤진 여론조사 성적표를 받은 윤 후보는 상황을 가볍게 넘기기 어렵게 됐다.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앞에 박근혜씨의 쾌유를 기원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실제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사면’을 묻는 질문에 찬성 여론이 높게 집계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서던포스트가 CBS 의뢰로 지난해 24~25일 전국 18세 이상 101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박씨 사면에 대해 ‘잘한 결정’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59.8%로, ‘잘못된 결정’ 34.9%에 비해 24.9%포인트 많았다. 또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TBS 의뢰로 같은 기간 전국 18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박씨 사면에 찬성이 57.7%, 반대가 31.7%로 집계됐다. 두 여론조사는 모두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박씨 사면에 대한 우호적 여론이 높게 집계됨과 동시에 윤 후보 지지율은 하락하는 모양새다. 이러한 현상이 지지율 역전까지 만드는 이른바 ‘데드 크로스’ 상황이 발생하자 윤 후보 측은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지난해 12월 28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윤 후보는 “(박 전 대통령 관련 수사가) 공직자로서 제 직분에 의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정서적으로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인간적으로 갖고 있다”며 “지금은 우리 박 전 대통령의 조속한 건강 회복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윤 후보는 다음날인 29일부터 이틀간 대구·경북(TK) 지역을 방문해 민심 달래기 행보를 이어갔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가 지난해 7월 20일 지병 치료차 입원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박 전 대통령 사면 찬성이 높은 것은 동정여론이 형성된 것이 기여한 바가 크다”며 “이번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처럼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다만 배종찬 인사이트 케이 소장은 “윤 후보와 박 전 대통령 관계가 복잡미묘하다는 것이 문제”라며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은 관계가 명쾌하지 않고, 복잡한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박 전 대통령 문제를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윤 후보의 복잡미묘한 상황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철호 리얼미터 수석전문위원 역시 “박 전 대통령 사면으로 언론을 통해 탄핵, 최순실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 윤 후보 입장에서는 악재”라며 “윤 후보의 ‘심정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딜레마 상황은 윤 후보뿐만 아니라 박씨 지지자를 포함한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도 발견된다. 박씨 관련 수사를 주도한 윤 후보가 불편하지만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지지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TK가 윤 후보를 비판하면 정권교체가 안 될 상황인데 그들이 더욱 분노하는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라며 “정권교체를 목표로 윤 후보를 찍을 사람들이 박 전 대통령 문제로 지지를 철회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위기가 반전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박씨 사면 문제가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지만 심리적 영향력은 매우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배 소장은 “만약 박 전 대통령 사면 문제로 실제 데이터상에서 윤 후보가 불리한 것이 확인되면 오히려 지지층이 결집할 것”이라며 “정권교체를 바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더 많은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 문제는 언더독 효과(상대적으로 약세에 있는 후보가 유권자들의 동정을 받아 지지도가 올라가는 경향)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2월 27일 박근혜씨 사면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 묘한 시기에 묘한 한 수”
신중한 대응에 나선 윤 후보와 달리 이 후보는 상황을 지켜보며 관망하는 모양새다. 이 후보는 “(박씨 사면 결정 여부를) 미리 알지 못했다”며 “워낙 예민한 상황이고 저는 (사면에) 반대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에 후폭풍이나 갈등 요소를 대통령 혼자 짊어지겠다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당내 강경 세력을 향해 “실망스럽다는 분들이 있는데 거기에 (저도) 답을 못하고 있다. 핵심 지지층, 원칙주의에 가까운 분은 실망스러울 것”이라고 달랬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이 후보 입장에서는 아직 문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상황에서 사면에 관해 이래라저래라 할 상황이 아니다”며 “분명한 입장을 내지 않아도 크게 불리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29일 이 후보가 윤 후보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선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달아 발표됐다. 엠브레인퍼블릭이 문화일보 의뢰로 지난해 12월 26~27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는 37.4%, 윤 후보는 29.3%의 지지율을 얻은 것으로 집계됐다. 또 한길리서치가 아주경제 의뢰로 지난해 12월 25~27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이 후보는 42.4%를 얻어 윤 후보(34.9%)를 앞섰다(두 여론조사 모두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
대장동 의혹, 김건희씨 의혹 등의 큰 이슈가 여론의 향배를 결정하고 있지만 박씨 사면 발표 직후 지지율 역전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은 사안의 파급력을 지켜볼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배 위원은 “결과적으로 문 대통령이 굉장히 묘한 시기에 묘한 한 수를 던졌다”며 “박 전 대통령 사면 문제가 선거쟁점화되는 것을 원천 차단하고, 보수 진영 내부에 미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절묘한 한 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과 향후 발언에 따라 2차 파동도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라며 “태극기부대, 탄핵, 촛불 이런 단어들이 연쇄적으로 나오면 국민의힘은 이미 건넜다던 탄핵의 강 앞으로 다시 끌려올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가 지병 치료차 입원하기 위해 지난 7월 2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 측 유영하 변호사가 박씨가 수감 중 받은 편지가 8만통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 편지를 묶어서 책으로 내자는 아이디어를 박씨가 직접 냈다고 전했다. 박씨는 수감 시절 동안 자신의 지지자와 주고 받은 편지를 엮은 책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지난달 30일부터 판매됐다. 징역 2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박씨는 정부의 특별사면에 따라 지난달 31일 0시 석방됐다.
유 변호사는 지난 3일 MBN 인터뷰에서 ‘책이 품절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데 어떻게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대통령께서 수감 기간 동안 8만통 정도 편지를 받았다”며 “이 편지를 묶어서 내면 편지 보낸 분들 중 상당 수는 책을 구입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은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도 병실에서 뉴스를 보니 (책의 인기를) 아마 알고 계실 것”이라며 “저도 말씀 드린 적이 있다”고 했다.
유 변호사는 ‘옥중서신을 묶어 책으로 내자고 한 게 누구였느냐’는 질문에는 “대통령께서 말씀주셔서 제가 추진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답했다.
유 변호사는 박씨의 거처에 대해선 “지금 알아보고 있다”며 “(박씨가) 몇 군데 말씀하신 적이 있어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박씨가 직접 지역을 말했느냐’는 질문에 “대통령이 말하셨다”고 답했다. 유 변호사는 거처를 정하는 과정에서 가족들과 협의는 없었다고 전했다.
유 변호사는 박씨가 조만간 가족들을 만날 걸로 예측된다고 밝혔다. 향후 대국민 메시지를 낼 계획에 대해선 “최근 대통령을 뵀을 때 퇴원하는 날 국민들께 인사를 직접 하겠다고 분명히 또 말씀했다”며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이 아직 없었고, 내용을 제게 상의할 수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 어떤 내용이 담겼다고 말하기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대통령은 몸이 많이 쇠약해져서 치료에 전념해야 할 것 같다”며 “그 외 어떤 행보를 할지는 지금 단계에서 어떻게 말씀드릴 수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