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고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4.11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 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60.4.18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4.19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여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
4.19 국립묘지
4월 학생 기념탑에 한송이..........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다. 1963년 9월 20일 약 3,000평으로 건립되었다. 한가운데 4·19혁명의 기상을 상징하는 높이 7척의 탑주 일곱 개가 솟아 있고, 주위에는 수호신상 및 각도를 달리한 20개의 만장이 조화를 이루었다.
조각은 김경승(金景承), 탑문은 이은상(李殷相),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맡았다.1993년 10월부터 성역화 조성공사가 시작되면서 묘지크기는 약 40,000평으로 확장되었으며, 유영봉안소, 4·19탑, 상징문, 상징조형물로 조성되었다. 유영봉안소는 100평의 목조 한식 건물로 넓혀졌고, 4·19탑과 만장은 원형태로 묘역의 중심으로 옮겨놓았고, 4·19정신을 형상화한 3개의 조형물이 새로 만들어졌다.
진입로 앞에 세운 ‘민주의 뿌리’는 9개 기둥의 화강암 조형물로 민주주의 발원지임을 뜻하고, 중앙 양측에 마련된 청동재질의 ‘자유투사’는 독재정권에 항쟁하는 모습을 담았으며, 화강암 재질의 ‘정의의 불꽃’은 높이 9m의 불꽃형상으로 4·19의 정신을 뜻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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