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503 어떤 기다림 [정은귀의 詩와 視線] 어떤 기다림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입력2023.06.21. 오전 5:06 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햇볕 달구어진 너른 해변. 하얀 열기. 초록 강. 다리, 8월 내내 꼬박꼬박 졸고 있는 여름잠 자는 집에서 그을린 노란 야자나무들. 내가 붙잡았던 날들, 내가 잃어버린 날들, 딸들처럼, 웃자란 날들, 내가 안고 있는 팔들. ―데릭 월컷, ‘토바고에서의 한여름 어린 날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먼 나라의 수도를 찾는 놀이를 하곤 했다. 가보지 못한 나라를 상상하며 종이 위의 어떤 낯선 이름을 말하면 이름을 달싹이는 행위가 그 먼 나라를 가까운 경험으로 당기는 듯 괜히 신났다. 지금은 종이 지도 대신 구글 맵으로 세세한 거리 풍경까지 볼 수 .. 2023. 6. 23. [시로 여는 수요일] 부재에 대하여 [시로 여는 수요일] 부재에 대하여 입력2023.06.20. 오후 2:06 이재무 아픈 아내 멀리 요양 보내고 새벽 일찍 일어나 쌀 씻어 안치고 늦은 저녁에 사온 동태 꺼내 국 끓이다 나는 얼큰한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 위해 ‘얼’ 빼고 ‘큰’ 하게 끓인다 가정의 우환과 상관없는 왕성한 식욕 위해 나의 노고는 한동안 계속되리라 아내에게 전화가 오면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살가운 말을 하리라 갓 데쳐낸 근대같이 조금은 풀죽은 목소리로 글쎄, 한 번도 하지 못한 살가운 말이 쉽게 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말이 나온다지만 생각보다 혀는 보수적이다. 맛난 것 먹을 땐 잘도 늘어나지만, 어려운 말 할 땐 돌처럼 굳는다. 데친 근대 대신.. 2023. 6. 20. [최영미의 어떤 시] [124] 주먹 [최영미의 어떤 시] [124] 주먹 입력2023.06.12. 오전 3:03 주먹 나보다 부자인 친구에게 동정받아서 혹은 나보다 강한 친구에게 놀림당해서 울컥 화가 나 주먹을 휘둘렀을 때, 화나지 않는 또 하나의 마음이 죄인처럼 공손히 그 성난 마음 한편 구석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덥지 못함. 아아, 그 미덥지 못함. 하는 짓이 곤란한 주먹을 가지고, 너는 누구를 칠 것인가. 친구인가 너 자신인가, 그렇지 않으면 또 죄 없는 옆의 기둥인가. -이시카와 다쿠보쿠(1886~1912) (손순옥 옮김)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치함) 가난한 생활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시인이 귀엽다. 다쿠보쿠의 시에서 내가 높이 평.. 2023. 6. 13. 6월의 밤(June Night) [최영미의 어떤 시] [123] 6월의 밤(June Night) 입력2023.06.05. 오전 3:01 일러스트=이철원 6월의 밤(June Night) 오 대지여, 너는 오늘밤 너무 사랑스러워 비의 향기가 여기저기 떠돌고 멀리 바다의 깊은 목소리가 땅에게 말을 걸고 있는데 내 어떻게 잠들 수 있으리오? 오 대지여, 너는 내게 모든 것을 주었지, 널 사랑해, 사랑해--오 나는 무엇을 가졌나? 너의 선물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건- 내가 죽은 뒤 나의 육신밖에 없네. -사라 티즈데일(Sara Teasdale, 1884~1933) 가슴을 찌르는 마지막 행이 없다면 그렇고 그런 밋밋한 시가 되었을 텐데, 역시 사라 티즈데일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아말휘의 밤.. 2023. 6. 7.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시인의 詩 읽기]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가 입력2023.06.02. 오전 5:02 어느새 태풍이 시작되는 여름이다. 올여름 엄청난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를 듣고 장화를 사야겠다는 지난해의 결심이 떠올랐다. 매해 여름 비가 늘고 있다는 기분이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 창밖으로 바라보는 비는 어느 정도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문제다. 차분해지는가 싶다가도 불쑥 켕겼던 일이 떠오르고, 그런가 싶다가도 안 좋은 일과 함께 안 좋은 사람의 얼굴까지 밀려온다. 서경온 시인의 태풍경보는 태풍이 도착하고 있는 와중의 뒤숭숭한 밤 풍경을 그리고 있다. 가지들이 헝클어지고 소나기가 다그치는 모습에서 아직까지 붙들려 있는 한 존재를 떠올린다. 과연 별일이었을까. 우리는 끌려다닌다. 빚에 .. 2023. 6. 3. 5월이 가네 2023. 6. 2. 이전 1 2 3 4 ··· 8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