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2] 불친절한 택시
원거리 운행 거부하다 적발, 본지에 '반성문'
'불친절한 택시/원거리 승객은 거절'75년 전인 1936년 5월 27일자 조선일보 사회면 기사 제목이다. 1912년 경성시내에 첫선을 보였던 초창기의 '탁시(택시)'는 요즘과 달리 상류층을 위한 최고급 교통수단이었지만 승객들을 짜증 나게 한 문제들은 오늘날과 똑같았다. 당시 신문에 가장 자주 보이는 승객 불만은 '운행 거부'였다.
- ▲ 1920년대 후반 경성시내의 어느 요정 앞에서 대기 중인 택시.
초기엔 택시를 전화로 불러 이용했는데 좀 멀거나 길이 나쁜 곳을 가자고 요청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를 보내지 않는 회사가 많았다. 특히 30년대 중반 택시 미터제가 전면 도입된 이후엔 운행거부가 심해졌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미터제 이전에는 한 번 타는 데 무조건 1원(쌀값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만원)씩 받는 1원택시가 보편적이었는데 미터제에 따라 거리 비례로 받게 되자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돌아올 때 빈 차로 올 가능성이 많은 외딴곳을 다녀오느라 기름과 시간을 쏟느니 짧게 짧게 미터 운행을 하는 게 이득이란 걸 운전사들이 빨리도 알아차린 것이다. 첫머리에서 언급한 '불친절한 택시…' 기사에서 한 택시 업자는 "먼 곳을 갔다 오는 시간에 가까운 시내 안에서 여러 번 내왕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털어놓으며 "우리들도 먹고살아야 하겠으니 부득이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됐다.
이에 조선일보는 택시 횡포 고발 기사들을 자주 실었다. 1936년 11월 29일자 조간 2면톱으로 다룬 경성 택시 비판 기사에는 '버릇 고치도록 힘쓰겠소'라는 자동차협회 책임자의 언급과, '참으로 죄송합니다'는 제목을 붙인 해당 택시회사 책임자의 '반성문'까지 곁들였다.
1937년 5월 6일엔 시내 아현정 고려병원에서 신촌 방면으로 가자는 전화 요청을 택시 회사가 거절하자 분노한 승객이 경찰에 택시회사를 고발하기도 했다. 경찰 당국자는 거듭되는 운행 거부에 대해 "영리 그것만 억지로 충실히 하자는(…) 악질적 위법행위"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지만 일부 택시들은 한술 더 떴다."딴 돈을 두둑이 쥐여주기 전에는 차 한 대 얻어 탈 수 없는"(1939년 3월 12일자) 일까지 있었다. 경찰은 '시범 케이스'로 부당 요금을 추가로 받은 택시회사에 '영업정지 5일'의 벌을 내며 "발견하는 족족 용서 없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횡포는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지난 7일 서울시가 콜택시들의 장거리 운행 거부를 막으려고 시외 운행 때 몇천원씩의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고 발표한 것을 보면, 택시 역사와 함께 태어난 '운행 거부' 병폐는 현재 진행형이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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