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41] "백정들 술시중은 못들겠다" 전주 기생 수십명, 조합 탈퇴
- ▲ 일제하의 대표적 권번(券番·기생조합)인서울의 한성권번 소속 기생들. 권번은 기생들에게 춤과 노래도 가르치고 요정 영업도 지휘했다.
1927년 새해 벽두 전주권번(全州券番·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특별한 집단행동을 벌였다. 육류 도축 판매에 종사하는 형평사(衡平社) 사원들이 연회를 가지려고 기생들을 불렀으나 전원 응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기생들 30여명은 회의까지 한 끝에 이 결정을 했다.(조선일보 1927년 1월 14일자)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지만 조선 시대에 최하층민 백정(白丁)이었던 형평사원들에게 술을 따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권력자들이나 기생을 부를 수 있었던 왕조시대가 가고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名妓)를 다 데리고 놀 수 있게"(월간 '동광')됐지만 기생들에게도 마지막 선이 있었던 셈이다. '백정'들은 1895년 갑오개혁 때 신분해방이 됐고 1923년 신분의 완전한 해방을 촉구하며 형평사까지 만들었지만 일반인들 마음속에는 이들을 천시하는 시선이 남아 있던 때였다.
기생들로부터 민감한 부분을 집단 공격당한 형평사원들도 집단행동으로 맞섰다. 1927년 1월 19일자 조선일보는 기생들의 '술시중 거부'에 분기한 형평사원들의 결의 내용을 1면에 다뤘다. 기사에 따르면 형평사원들은 "권번 측에서 본 사원에게 모욕을 가함은 40만 대중(전국 형평사원들)을 무시함인즉, 적극적으로 항쟁할 것"이라고 결의했다. 이들은 또 "고루한 인습적 사상으로 시대를 이해치 못하는 행동을 취하는 때는 기생 자체의 이면(裡面)을 해부함과 동시에 인류로서 감행치 못할 인육상(人肉商)임에 박멸을 기할 것"이라고도 밝혔다. "몸 파는 일을 하는 너희 기생들 실상을 까발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봄철이 되자 문제가 또 불거졌다. 전주 형평사원들이 야유회에 기생들을 불렀으나 상당수가 불응한 것이다.(1927년 4월 29일자 '당신에게는 안 불려가오/전주 기생 권번의 실태') 그런데 이번엔 기생들 내부에서 의견이 맞섰다. 일부 기생들이 "백정이면 어떠냐"며 응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1920년대의 만성적 경제난으로 "요리점은 파리 날리기가 일이요 기생들의 사업은 산보 다니기"(1924년 9월 12일자)였기에 손님을 가려가며 받을 형편이 아니기도 했다. '형평사원 술시중 갈등'은 결국 기생단체의 와해를 불렀다. 1927년 5월, 형평사원들 시중들겠다는 6명만이 권번에 남고 나머지 수십 명의 기생들이 무더기로 권번을 뛰쳐나갔다.(1927년 5월 6일자)
당시 기사는 "일반에서는 이 문제의 진전 여하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더라"라며 낮은 신분이었던 형평사원과 기생의 충돌에 쏠린 사회의 관심을 전했다. 조선일보는 또 "기생들이 종래로 형평사원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은 적이 종종 있어…일반사회에서도 비난이 적지 않던 바"라며 신분 해방에 역행하는 기생들에 대한 비판 여론을 전했다.(1927년 1월 14일자)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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