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54) "다리도 번쩍번쩍, 엉덩이도 흔들흔들" 30년대 땐스 열풍
1933년 새해 기분이 채 가시지 않은 1월 21일, 경성 명치정(明治町·명동)의 '비밀 딴스홀'에 경찰의 '일격(一擊)'이 가해졌다. "약동하는 청년남녀의 렵긔적 오락취미를 리용하야 허가업는 비밀 '딴스홀'을 경영하여 돈버리를 하여 보려던" 업주가 검거된 것이다.
댄스홀 회원 40여명 중에는 "지명의 (이름이 알려진) 부인, 미망인, 카페 여급, 기생들까지도 석기여 있서서 밤낫으로 백 퍼센트의 '에로 신'을 연출하고" 있었다.(조선일보 1933년 1월 22일자) 사건 이후 경찰은 비밀 댄스홀에 대한 일제 단속에 나서 '경성무용연구소'등 10여곳을 적발했다.(1933년 1월 28일자)
80년 전 남녀들을 사로잡은 '사교 딴스'는 1920년대 중반, 발레 등 서양 무용과 비슷한 시기에 상륙했다. '셔양 각국 고등사회에서 류행하는 사교단스'의 경성 공연을 알린 1923년 6월 2일자 기사에서 '사교 댄스'란 말이 처음 보인다.
서구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엄청났던 시절이기에, 신식 서양춤은 큰 열풍을 불렀다. 1923년 여름엔 경성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수해 동포 위로 공연에서도 사교댄스가 선보였다. 젊은 남녀의 사교댄스 공연에 "일반 관중은 환희에 넘치여 박장소리가 장내를 진동"했다.(1923년 8월 12일자)
하지만 일제가 비상시국 등의 이유를 내세워 댄스홀을 허가해 주지 않자 사교댄스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카페에서는 공공연하게 딴스가 대유행"을 했지만 "신령님 갓다는 경찰들은 아즉은 눈을 감는 듯"하다는 기사도 실렸다.(1931년 6월 26일자)
1935년 경성시 죽첨정(竹添町·서대문구 충정로)의 비밀 댄스홀은"문간에 파수하는 웨이터까지 두어 가지고 낫 모르는 손님이든지 혹 경관이 오는 때는 군호를 하야 즉시 땐스를 중지"시키다가 경찰에 걸렸다.(1935년 10월 30일자) 현대 유흥업소 불법 변태영업의 수법은 70여년 전에 이미 확립됐던 것이다.
댄스 열풍은 1933년엔 절정을 이뤘다. 일부 연예계·화류계 관계자들은 경찰에 '댄스홀 허가 탄원서'를 냈다. 1937년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라는 제목으로 잡지 '삼천리'(1937년 1월호)에 실려 유명해진 '탄원'에는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와 영화배우 오도실,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등 8명이 참여했다. 이보다 앞서 1929년에도 한 일본인이 경성에 '쏘시얼 구락부'라는 사교댄스홀을 만들겠다고 경찰에 청원했으나 반응은 미지근할 뿐이었다.(1929년 3월 11일자)
사교 댄스가 금기시되다보니 여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서양식 율동을 가르쳤다가 학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왜 양춤을 가르치느냐"고 항의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율동'이 "다리도 번쩍번쩍 치켜들고 궁둥이도 흔들흔들 내두르고"하여 '딴스'에 가까왔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을 알린 기사는 '율동'은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서양 댄스에 대해서는 "남녀가 혼동해서(뒤섞여서) 하는 점에 제일 큰 폐단"이 있다고 당시 보수층의 거부감을 대변했다.(1936년 10월 24일자 )
댄스홀 회원 40여명 중에는 "지명의 (이름이 알려진) 부인, 미망인, 카페 여급, 기생들까지도 석기여 있서서 밤낫으로 백 퍼센트의 '에로 신'을 연출하고" 있었다.(조선일보 1933년 1월 22일자) 사건 이후 경찰은 비밀 댄스홀에 대한 일제 단속에 나서 '경성무용연구소'등 10여곳을 적발했다.(1933년 1월 28일자)
80년 전 남녀들을 사로잡은 '사교 딴스'는 1920년대 중반, 발레 등 서양 무용과 비슷한 시기에 상륙했다. '셔양 각국 고등사회에서 류행하는 사교단스'의 경성 공연을 알린 1923년 6월 2일자 기사에서 '사교 댄스'란 말이 처음 보인다.
서구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엄청났던 시절이기에, 신식 서양춤은 큰 열풍을 불렀다. 1923년 여름엔 경성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수해 동포 위로 공연에서도 사교댄스가 선보였다. 젊은 남녀의 사교댄스 공연에 "일반 관중은 환희에 넘치여 박장소리가 장내를 진동"했다.(1923년 8월 12일자)
- ▲ 조선일보 1933년 2월 18일자 세태풍자란‘이꼴저꼴’에 실린 삽화. 춤에 빠진 남녀는 낡은 집안을 수리하는 것도 미룬 채 비싼 축음기 틀어놓고 사교댄스 삼매경을 헤맨다.
하지만 일제가 비상시국 등의 이유를 내세워 댄스홀을 허가해 주지 않자 사교댄스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카페에서는 공공연하게 딴스가 대유행"을 했지만 "신령님 갓다는 경찰들은 아즉은 눈을 감는 듯"하다는 기사도 실렸다.(1931년 6월 26일자)
1935년 경성시 죽첨정(竹添町·서대문구 충정로)의 비밀 댄스홀은"문간에 파수하는 웨이터까지 두어 가지고 낫 모르는 손님이든지 혹 경관이 오는 때는 군호를 하야 즉시 땐스를 중지"시키다가 경찰에 걸렸다.(1935년 10월 30일자) 현대 유흥업소 불법 변태영업의 수법은 70여년 전에 이미 확립됐던 것이다.
댄스 열풍은 1933년엔 절정을 이뤘다. 일부 연예계·화류계 관계자들은 경찰에 '댄스홀 허가 탄원서'를 냈다. 1937년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라는 제목으로 잡지 '삼천리'(1937년 1월호)에 실려 유명해진 '탄원'에는 대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와 영화배우 오도실, 종로권번 기생 박금도 등 8명이 참여했다. 이보다 앞서 1929년에도 한 일본인이 경성에 '쏘시얼 구락부'라는 사교댄스홀을 만들겠다고 경찰에 청원했으나 반응은 미지근할 뿐이었다.(1929년 3월 11일자)
사교 댄스가 금기시되다보니 여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서양식 율동을 가르쳤다가 학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왜 양춤을 가르치느냐"고 항의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이'율동'이 "다리도 번쩍번쩍 치켜들고 궁둥이도 흔들흔들 내두르고"하여 '딴스'에 가까왔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을 알린 기사는 '율동'은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서양 댄스에 대해서는 "남녀가 혼동해서(뒤섞여서) 하는 점에 제일 큰 폐단"이 있다고 당시 보수층의 거부감을 대변했다.(1936년 10월 24일자 )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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