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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75]

by 까망잉크 2011. 11. 16.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75] "쓸데업시 車타는 악취미"… 기생 동반 '뜨라이브' 단속

  •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 입력 : 2011.11.07 03:08

    봄빛이 짙던 1928년 4월 어느 날 오후, 서울 탑골공원 앞을 운행하던 전차에 "동대문 편으로부터 질풍과 가티 달려온" 자동차 1대가 정면 충돌했다. 종로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사고는 다음 날 신문 사회면 톱으로 보도했다.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현장 사진까지 3단으로 곁들였다.

    사망자 없이 자동차 운전사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을 대서특필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두 남자가 기생 둘과 함께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발생한 사고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기사 첫 문장부터 "별로 볼 일도 없는 데 쓸데업시 자동차를 타고 시내·시외로 질주하고 십흔 악취미(惡趣味)로 인하야 또 한 가지 참사가 발생되엿다"며 남녀를 꾸짖었다.(1928년 4월 27일자)

    대낮 서울 시내 드라이브를 즐기던 자동차가 전차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사고를 보도한 사회면 톱 기사의 현장 사진. 자동차 승객은 남자 2명과 기생 2명이었다. (1928년 4월 27일자)

    경성의 자동차가 50대를 넘어선 게 1920년이고, 1928년쯤엔 시내 자동차가 800대도 안 됐지만, 소수의 여유 있는 계층들은 일찌감치 자동차를 교통수단만이 아니라 '놀이' 수단으로도 쓰기 시작했다. 커플 손님들을 드라이브시켜 본 운전사들의 익명 방담 형식을 취한 '그들의 봄타령 / 만화경(萬華鏡) 빽밀라'라는 기사는 요지경 같은 30년대 드라이브 풍속도와 당대의 거부감을 생생히 담아내고 있다. 기사에서 한 '청년운전사'는 "등 뒤에 안즌 아가씨네들의 향수와 기름 냄새가 무섭게 조발적(挑發的·도발적)으로 코를 찔으는 것" 때문에 핸들을 제대로 잡지 못해 쩔쩔맸다며 "빽밀라에 비치운 농염한 러브 씨인'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처하다고 토로했다. '무참한 자동차의 추락 사고가 절믄 남녀를 싯고 다니든 차에 한해서 더 만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도회 년놈들의 그 꼴은 더 안 보고 싶어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운전사도 있었다.(1934년 4월 20일자)

    1938년엔 기생 동반 드라이브를 경찰이 단속했다. 1937년 중일전쟁 후 일제가 선포한 이른바 '전시체제'하의 사치 향락 행위 금지 차원에서였다. 택시에 창기(娼妓)를 태우고 한강에서 인천까지 드라이브하던 29세 남자가 경찰 조사를 받았고(1938년 2월 2일자), 새벽 2시 50분쯤 카페 여종업원과 함께 택시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질주하던 30세 남자가 '풍속을 문난케 하는 혐의자'로 경찰에 체포됐다.(1938년 6월 10일자) 드라이브 명소였던 한강 철교는 "밤중이면 한 시간 평균 2백여대의 자동차가 유흥객과 기생을 싣고 래왕하든"것이 '경찰이 단속을 하자 차량수가 두셋'에 지나지 않았다.(1938년 8월 9일자)

    이처럼 드라이브가 눈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36년 평양에서는 50여명의 여성이 소형차 2대를 함께 구입해 돌아가며 몰아 보는 '드라이브 구락부'를 조직해 눈길을 끈다. 이를 알린 기사는 "관서지방 녀성의 씩씩한 장면을 보여 주는 소형자동차 드라이부 구락부가 녀성 중심으로 조직되엿다"며 "평양 시내에는 압흐로 드라이부 구락부 미인 회원들이 운전하는 상쾌한 자태가 넘나들 것이다"라고 꽤 긍정적으로 썼다.(1936년 11월 8일자) 향락적 드라이브와 달리 자동차 운전 자체를 스포츠처럼 즐겨보려는 모임이었던 듯하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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