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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비친['모던 조선'] [81] '물 푸다 금덩어리 줍는' 조선의 황금광 시대!

by 까망잉크 2011. 12. 5.

 조선일보에 비친['모던 조선'] [81] '물 푸다 금덩어리 줍는' 조선의 황금광 시대!

 

  •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 입력 : 2011.11.27 23:29

    "최근 조선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광산열이 매우 앙등하야, 삼천리 강산 전폭에 깔리어 잇는 무진장의 광맥과 금산은토(金山銀土)를 제각금 차지하야 그 이권을 어더 개최하겟다는 경쟁적 출원이 날로 늘어, 근일 총독부 식산국 광산과에는 글자 그대로 원서가 산적하야 완연히 황금광 시대를 연상케 하엿다." 조선일보 1931년 2월 12일자는 '황금광 시대'란 제목 아래 조선에 불어닥친 골드러시(Gold Rush)를 이렇게 전했다.

    1930년 한 해에만 광산 출원 건수가 모두 1400건. 평양에서 백여리 떨어진 성천 온천에선 "극도의 불경긔로 인한 전황으로 돈에 목마른 사람들은 길을 가면서도 황금덩어리라도 떨어졌을가 하여 땅에 구녕이 뚫어지도록 보고 다니는 이때, 밤알만큼씩 큰 황금덩어리가 냇가에 자갈이 굴러가듯 하는 신금광이 발견"되면서, "꿀통에 개아미 떼 모히듯 사람이 모혀" 들었고(1931년 3월 5일자), 함남 영흥군에서도 "괭이를 한아름 들고 논과 밧바닥을 파서… 전군 각지 어느 산섭이나 냇바닥을 안 파 본 곳이 업을" 지경이 전국으로 확대됐다.(1931년 5월 17일자)

    1935년 1월 7일, 열흘간의 연말연시 휴무를 마치고 문을 연 총독부 광산과에 몰린 금광 출원 인파.(1931년 1월 8일자)
    '신흥에 채금열 팽창 출원구 30, 채광 5구'(1931년 3월 11일자) '영변에 또 신광, 성적이 극히 양호하다고 호평'(1931년 4월 18일자) '안변의 황금광 시대, 일확천금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1931년 5월 7일자) '하천과 전야를 채굴만 하면 금, 금' '암석에 드문드문 황금덩어리!'….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금광 개발 기사가 지면을 장식하면서 "조선에서도 작금 양년에 금광들이 팽창하야, '촤푸린'이 던진 '황금광 시대'를 글자대로" 보여줬다.(1931년 8월 17일자)

    조선일보는 1931년 5월 27일자부터 '황금국을 차저서' 시리즈를 통해 교동 금광 등 대표적인 광산을 탐방했다. 이듬해엔 '조선은 팔도강산 어느 곳을 물론하고 광맥을 탐색하러 편답(遍踏/널리 돌아다님)하는 사람들의 거림자가 나타나지 안흔 곳이 업고' '외래 자벌(資閥)들이 다투어 광분하는 까닭은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조선의 황금타령'을 8차례 연재했다.(1932년 12월 6~16일자)

    광산 출원 건수는 1932년 3206건에서 1933년 5200건, 1935년엔 1만건을 돌파(1만500)했다. "총독부 광산과에서는 매일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면서 처리했음에도 3천건밖에 처리 못해, 아직 미처리한2만4천여건을 처분하자면 앞으로 8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됐고(1936년 1월 24일자), 거기에다 1936년 출원분 1만여건까지 다 처리하려면 11년이 넘게 야근을 해야 했다.

    '황금광'은 바다에도 나타났다. '해저에 잠겨있는 억만의 황금'을 찾겠다며 '재산가' 수백 수천이, 노일전쟁 때 '미화 2500만달러'를 싣고 항해하다 침몰했다는 배의 탐사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1932년 12월 28일자 등)

    이런 황금광 시대가 출현한 것은 금본위제 아래서 급속한 군국화 과정을 취한 일제가, 금 생산을 적극 독려하는 '산금(産金)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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