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82] "연말 조선은행선 뽀나스 지폐뭉치가 눈발가치…"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 2011.11.29 23:09
"뽀-나스를 탓다는데 이게 웬 솀이냐?… 빗쟁이들은 월급쟁이 집에 구녕만 잇는 곳이면 크거나 적거나 그 구녕을 노리고 지킨다…."
1928년 조선일보 수필 잡문 '세모고(歲暮苦)'는 모처럼 탄 연말 보너스를 빚쟁이들에게 뜯기는 80여년 전 샐러리맨들 처지를 전한다.(1928년 12월 18일자) 근대와 함께 등장한 월급쟁이들 애환은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사회면엔 '십만인의 합창 뽀-나스 만세!/ 쌜라리맨의 활력소'(1937년 12월 16일자) 같은 상여금 기사가 실렸다. 월급쟁이들은 "목을 길게 하여 가지고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의 격으로" 보너스 지급일을 기다렸다.(1929년 12월 16일자)
1928년 조선일보 수필 잡문 '세모고(歲暮苦)'는 모처럼 탄 연말 보너스를 빚쟁이들에게 뜯기는 80여년 전 샐러리맨들 처지를 전한다.(1928년 12월 18일자) 근대와 함께 등장한 월급쟁이들 애환은 요즘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년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사회면엔 '십만인의 합창 뽀-나스 만세!/ 쌜라리맨의 활력소'(1937년 12월 16일자) 같은 상여금 기사가 실렸다. 월급쟁이들은 "목을 길게 하여 가지고 일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의 격으로" 보너스 지급일을 기다렸다.(1929년 12월 16일자)
- 연말 보너스 받은 걸 알고 돈 받을 사람들이 몰려와 집 주변에 진을 치자 외출도 못하고 곤혹스러워하는 월급쟁이 가족의 모습을 그린 조선일보 만평. (1932년 12월 24일자)
보너스 현금을 먼저 만지는 건 유흥가였다. 1933년 연말 평양에선 "오후 칠시만 되면 어느 료리점이나 만원"이었고 "손님방에 몰리는 기생 수가 매일 밤마다 이백칠십 명이 초과하는 대성황이라 하여 가무를 파는 패들이 벙긋벙긋 웃고 잇다"고 했다.(1933년 12월 26일자) 1934년 보너스가 지급된 12월 15일 밤부터 16일 새벽까지 서울 유곽(遊廓)의 수입이 "평시의 평균 이천칠백원대를 폭죽적으로 깨트리고 일약 륙천원으로 분등"해 화제 기사로 보도됐다.(1934년 12월 17일자)
카페와 술집들은 '보너스 고객' 잡기에 혈안이 됐다. "손님 쟁탈전이 맹렬히 전개되어 천하의 할냥(한량)은 월급쟁이라는 듯이 사무실에 여급이 전화를 거러서 손님을 꼬여낸다든지, 혹은 턱 업시 비싼 술을 제안 업시 따루어" 회사원들 호주머니를 털었다.(1938년 12월 19일자) 경쟁이 과열되자 경찰까지 나섰다. 종로서는 연말 "네온가의 숙청(肅淸)을 위하야 평복 계원으로 하야금 엄중감시"하며 퇴폐 행위를 단속했다.(1938년 12월 19일자)
보너스 받은 가장에 대한 가족 성화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 상여금 타면 이건 꼭 사 주어야 해요"라며 조르는 다섯 식구 때문에 죽상이 된 남자를 묘사한 만평은 "월급쟁이의 세모(歲暮)는 무인절도(無人絶島)로 도망가야 할 때"라고 한탄했다.(1928년 1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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