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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86]

by 까망잉크 2011. 12. 18.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86] "인형의 집을 나선 朝鮮의 노라들"… 이혼 소송 급증

  •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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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1.12.13 23:20

    1929년 12월, 충북 어느 동네의 많은 학부형들이 "새해부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말자"는 이상한 집단 결의를 했다. 뜻밖에도 교육 거부의 이유는 젊은 부부들의 이혼(離婚) 급증 때문이었다. 그 마을에서 "청년이라는 청년은 모조리 결혼만 하며는 일제히 리혼을 하는 것이 일대 류행이 되어" 이혼이 10여건에 이르자, 보수적인 어른들이 "신(新)교육이 '일본으로부터 들어온 류행병'인 이혼을 아이들에게 전염시킨 결과"라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1929년 12월 15일자)

    당시 사회면에 '중대문제'로 보도된 신교육 거부 사건은 근대 초기에 급증한 이혼의 충격파를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에는 여자가 소박맞아 쫓겨나는 일은 있어도 이혼이란 개념은 정립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이혼이 제도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고, 1922년 조선 민사령(民事令)의 2차 개정으로 일본 민법에 따라 이혼할 수 있게 하자, 이혼이 더 늘었다.(1925년 5월 15일자) "폐쇄시대에는… (여자는) 남자 측에셔 설영 압박을 할지라도 이혼이라 하는 말은 입으로 감히 말을 못하야 보든 것이, 별안간 '녀자 개방'이니 '남녀동등'이니 하는 신 쇼식이 여자 측에 귀부리를 시치고 지나간 이후에" 똑똑한 여자들은 구습타파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초기 이혼 소송은 대부분 여자가 제기한 것이었고, 남자가 제기한 경우는 '백분지 이,삼'에 불과했다.(1921년 5월 13일자)

    여성이 청구한 이혼 소송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도하며 ‘인형의 집을 나선/조선의 노라들’이란 제목을 붙인 조선일보 기사. (1934년 4월 20일자)

    1920년대 이혼 재판은 "전염병 모양으로 나날이 늘어" 갔다. "평양 디방법원에서… 매 월요일만 되면 맛치 편싸홈이나 하는 모양으로 수 삼십 명의 절믄 남녀가 법뎡안에 모히여 각각 불만족한 점을 가지고 승강을 하며 닷투고 싸호기를 마지 안이하는" 진풍경이 빚어졌다.(1923년 2월 26일자) 1929년엔 2000만 인구 중 1만4000명이 이혼했다. 한 해 32만여 쌍이 이혼하는 오늘에 비하면 극히 적은 숫자지만, 당시엔 '칼날로 낡은 인연을 끊는 눈물의 비극'이라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1929년 1월 11일자) 평양지방법원에 제기된 이혼소송 중 태반이 여성이 제기한 것임을 보도한 기사는 입센의 소설을 빗대 "인형의 집을 나선/조선의 노라들"이라고 제목을 달았다.(1934년 4월 20일자)

    여성들이 제기한 이혼 사유는 배우자 부정이나 학대만이 아니었다. 배고파 못 살겠다며(1925년 12월 23일자), 혹은 매일 저녁 술집에서 사는 22세 남편이 싫어졌다며 헤어지자고 했다.(1926년 6월 20일자) 성 불구 남편과 몇 년씩 살아오던 아내들이 뒤늦게 이혼을 요구하는 일도 이어졌다.(1921년 2월 11일자, 1921년 2월 21일자, 1926년 5월 29일자)

    초기엔 '인간의 최대 죄악은 이혼'(1925년 11월 27일자)이라는 식의 표현들이 많았지만, 인식은 바뀌었다. 1932년 조선일보는 1면 시평(時評)란을 통해 부부 한쪽만의 의사로는 이혼 못하게 한 당시 법률을 비판하며 "현재 이혼법을 좀더 진보적으로 개정할 것"을 당국에 주문하기에 이르렀다.(1932년 4월 20일자)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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