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목멱산)의 얽힌 사화
< 서울역사문화포럼에서 12월 모임에 남산 봉수대 답사 >
전일에는 청계천 북쪽을 북촌(北村), 그 남쪽은 남촌(南村)으로 불리어 왔다. 북촌은 권세 있는 양반들이 모여 사는 데에 비해 남촌은 관직에 오르지 못한 불우한 양반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남촌 중에서 남산 계곡에 사는 이들을 ‘남산골 샌님’, 또는 ‘남산골 딸깍발이’로 칭했다. 동네 개구쟁이들도 남산 계곡의 길거리에서 놀다가도 갓쓰고 나막신 신고 지나가는 선비를 보면,
“남산골 딸깍발이’이란 무슨 뜻일까?”
“그야 잘 모르지만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가난은 하지만 오기만 남은 선비를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애.”
“나도 들었는데 남산골 샌님이 원(員) 하나 내지는 못해도 뗄 권리는 있다고 하더라.”
고 아는 체를 하였다. 조선시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인 남산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서울의 녹지 공간으로서는 이보다 큰 것은 없었다. 당시만 해도 서울 남쪽 수비의 요새로 만들기 위해 능선에는 성을 쌓아 놓아 현재도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해발 2백 65미터의 남산은 현재 중구 남산동․예장동․필동․회현동․장충동과 용산구 도동․후암동․이태원동․한남동 등이 둘러싸고 있으니 옛날에는 서울의 남산(南山)이었지만 오늘날은 중앙산(中央山)에 틀림없다.
그런데 남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조선 초 한양에 천도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이 산을 인경산(引慶山)이라고 불렀다. 인경산이란 밝은 산, 즉 광명의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또 옛 문헌에는 남산을 열경산(列慶山)이라 하고 산 모습이 마치 안장을 벗어 놓은 채 달리는 말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경복궁 뒤 뾰족하고 날카롭게 우뚝 솟은 북악산에 비해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남산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 남산은 조선 시대 때는 오랫동안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리어 왔다. 목멱산은 우리말로 마뫼산으로서 산 위에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기 때문에 불려진 것이다. 조선 초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도읍한 다음 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북악산과 남산에 산신(山神)을 모셔 놓았다. 그러므로 남산의 산신을 제사하는 목멱신사를 지었으므로 산 이름도 목멱산이 된 것이다.
이 목멱신사는 남산 정상의 동쪽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흔히 국사당(國師堂)이라고 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말 고종 때까지 매년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내다가 폐지하니, 이 사당은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 때(1925년) 일본인에 의해 이 사당이 헐리자 우리 민족은 현판과 사당 일부를 인왕산 서쪽 기슭 선바위(襌岩) 아래 옮겨지어 국사당의 명맥을 잇고 있다.
예로부터 남산은 시민의 행락지(行樂地)로서 모든 사람들의 아낌을 받아 왔다. 조선 시대에는 자연보호 운동의 일환으로 도성을 쌓은 4산에 금표(禁標)를 세워 입산을 금지하고 나무를 베거나 흙과 돌을 파 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묘(墓)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조선 말 순조 때(1832년)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장제급(張濟汲)이 자기 어머니 시신을 몰래 남산에 묻고 묘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조정에 알려지자 왕은 크게 노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자는 고관으로서 어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이냐. 그를 잡아다 엄중 문책하고 금위대장은 감독 소홀로 즉각 파직시키라.”
하였다. 이에 금위영에서는 장제급을 문초하고 묘를 즉각 파내도록 하였다.
또한 형조(刑曹)에서는 명당이라고 가르쳐 준 지사(地師) 백윤진(白潤鎭)을 잡아 문초하였다. 문초한 결과 처음에는 한강 근처에서 산을 보던 백윤진이,
“남산이 명당(明堂)이긴 하나 일반 사람이 묻힐 곳이 못됩니다.”
하였으나 장제급이 고집을 부려 남산에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장제급은 조부의 공이 있어 사형을 겨우 면하고 외딴섬에 귀양보냈다. 백윤진 역시 외딴섬에 귀양보내 자기 대에 한해 노비가 되는 중벌을 받았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으로 시작되는 애국가 2절에도 나오는 남산은 우리 나라 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눈에 비치고, 발길이 끊이지 않는 산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9세기 말경 서울에 왔던 미국인 선교사 ‘길모어’가 본 서울 모습을 소개하면,
“한국 사람은 산을 무척 좋아한다. 이 때문에 남산은 사람들이 쉬는 놀이터가 된다. 봄․여름․가을에 맑은 날이면 으레 몇 명씩 산을 거닐고 나무 아래에 눕고 성 위에 앉아서 남쪽 강을 바라보고 경치를 즐긴다. 어떤 때는 악기를 가지고 가는데, 이 악기는 피리다.…… 서울 근방의 모든 산에는 사람이 많이 다닌 길이 있고, 어느 때나 어른이나 어린이들이 혼자서 또는 몇 씩 떼를 지어서 산보도 하고 바위에 앉기도 하여 매우 행복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대단히 이상스러운 것은 한국 사람들은 높은데 오르면 반드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산에 올라가서 노래하지 않는 한국 사람은 본 일이 없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예로부터 남산은 서울 시민들의 아낌을 받아 목멱상화(木覓賞花), 즉 남산의 꽃구경을 서울의 10가지 구경거리 중의 하나로 손꼽았다. 실제로 도성을 둘러싼 4산 중에서 다른 3산은 모두 돌산이고 경사가 급한 데 비해 남산은 비교적 산에 오르는 길이 완만하고 주위가 수목으로 둘러싸여 4계절 풍경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풍류를 즐긴 옛 사람들은 ‘남산팔영(南山八詠)’을 지어 전해 오고 있다. 옛 사람들은 남산에 올라 그림같이 벌려 있는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①북악산 아래 궁궐들이 안개구름 속에 벌려 있는 것이 보기 좋고(雲橫北闕)
②남쪽으로 돌아서서 멀리 바라보면 넘쳐흐르는 한강 물이 볼만하며(水漲南江)
③가까이는 봄이 다 지나도 아직 피어 있는 바위 밑의 꽃과(岩底幽花)
④여기저기 산마루에 서 있는 낙락장송의 의젓한 모습도 보암직스럽고(嶺上長松)
⑤춘삼월 이곳저곳 동네 언덕에서 잔디를 밟는 답청놀이도 볼만하고(三春踏靑)
⑥9월 9일 중양절에 높은 언덕을 찾아 술잔을 기울이어 거나해진 선비들 모습이 그럴 듯하고(九日登高)
⑦사월 초파일 관등놀이로 산언덕이 불빛으로 환하게 꾸며지는 것도 볼만하며(陟巘觀燈)
⑧계곡 사이의 맑은 물을 따라 갓끈을 빨아 말리는 선비들의 모습이 또한 그림 같다(沿溪濯纓)
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케이블카를 타고 남산타워에 올라 고층빌딩과 질주하는 자동차 행렬을 보면 남산팔영은 새로 지어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에 지은 <<경도잡지(京都雜誌)>>에 보면 단오절에는 한성의 청소년들이 남산 기슭 잔디에 운집하여 우리 고유의 체육인 씨름대회가 벌어진다고 하였다. 즉, 두 사람이 서로 기능과 각력(脚力)을 겨루는 씨름은 중국인들이 배워 가서 ‘고려기(高麗伎)’라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남산 북쪽 산기슭 주자동 막바지와 외남산(外南山)의 남단(南壇) 옆 녹사장(綠沙場) 및 북악산 아래 경복궁 신무문 밖 경치 좋은 곳이 씨름대회 장소로 유명하였다.
조선시대 오백년간 남산에는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조선 초부터 갑오개혁 때까지 남산은 전국의 다섯 갈래에서 들어오는 봉수가 집결하는 곳이기 때문에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었지.”
“봉건시대의 통신 방법으로는 꽤 발달한 제도 같은데 어떻게 신호를 했을까.”
“그거야 잘 알려져 있지 않나. 아무 이상이 없으면 매일 한 번씩 연기나 불을 피우고, 적이 보이면 두 번,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번, 국경을 침범하면 네 번, 아군과 접전하면 다섯 번씩 올리게 되어 있었지.”
“그런데 말야, 맑은 날은 밤에 불을 피우고 낮엔 연기를 올리면 알 수 있지만 만일 비와 눈이 오거나 안개가 잔뜩 끼어 있으면 어떻게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모르겠어.”
“그런 악천후(惡天候) 때는 각 봉수대마다 포성(砲聲)과 각성(角聲)으로 알리고 10리 정도 떨어진 다음 봉수대까지 사람이 달려가서 알리게 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변경지방에서 올린 봉수가 남산에 도달하려면 12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중종 때 몰래 시험해 보니 5~6일이 걸리기도 하여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서울 북쪽에서 보이는 남산의 무성한 수림은 거의 예장동 지역이다. 이 일대는 속칭 ‘왜장터’라고도 부르는데, 원래 이 곳은 조선시대 영문(營門) 군사들이 무예(武藝)를 훈련하는 곳이었으므로 예장동이라 칭해 왔다.
남산 산기슭 주자동의 평지가 끝난 곳에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이 곳은 영문 군졸들이 기예(技藝)를 연습하는 곳이므로 예장(藝場)이라 불러오는데 일반에서 왜장(倭場)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지적되어 있다.
왜장 터라고 불리게 된 것은 전일의 국토통일원 일대에 왜장 마수다(增田長盛)가 임진왜란 때 진을 쳤던 까닭이다. 약 1천 5백 명의 왜군이 1년간 주둔하면서 성을 쌓았던 것 같다. 왜군이 1593년 4월에 서울을 철수하자 폐허의 서울에 처음 들어온 유성룡(柳成龍)은,
“서울에 남은 백성이라고는 백의 하나도 못되며 그나마 기근과 피로로 귀신 모습이다. 날씨는 더운데 사람과 말의 시체가 곳곳에 쓰러져 악취로 코를 막고 지나야만 했다. 공사(公私)의 집이 모두 타 버렸는데 남대문에서 동쪽 일대, 즉 남산 밑에 왜적이 진을 쳤던 곳만 남았다.…”
고 <<징비록(懲毖錄)>>에 쓴 것을 보아도 왜군이 남산에 진을 쳤던 것은 틀림없다. 남산은 원래 도성을 쌓고 변방의 변고를 알 수 있는 봉수의 집결지로서 국방의 요충지였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음에도 왜군 침략의 진터가 되었음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개항 후 밀려오기 시작한 일본인은 차츰 남산 밑에 주택과 상가를 짓고 자리잡아 나갔다. 한편, 갑신정변(1884) 이후에는 서대문 밖의 공사관이 불타 버린 관계로 왜장 터에 일본공사관을 세웠고, 그 후에는 침략의 원흉 이토오(伊藤博文)가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이 곳에 통감부를 세웠다. 통감부 건물은 곧이어 총독부 건물로 변신했고, 부근에는 총독관저와 정무총감의 관저도 지어 한국을 식민통치하였다.
이 왜장 터는 조선 초 무학대사가 명당으로 정했다고 하는데, 세조 때 권신 한명회(韓明澮)가 살기도 했다. 조선 시대 도성 안의 경치 좋은 곳으로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 그리고 청학동(靑鶴洞)을 차례로 손꼽았다. 이중 청학동은 왜장 터 일대로서 남산 제 1호터널 입구 부근임에 틀림없다.
중종 때 좌의정까지 지냈던 용재(容齋) 이행(李荇)이 이 곳에 살았다.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이행의 집을 찾아와 시와 술을 즐겼다 한다. 호를 청학도인(靑鶴道人)이란 칭한 그는 그림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동구부터 집까지 길 좌우에 소나무, 전나무, 복숭아․버드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 그리고 늘 퇴청하면 관복을 벗고 허름한 평복에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나서곤 했다. 그 날도 퇴청하여 산책을 나섰는데 의정부(議政府)의 하급관리 녹사(錄事)가 급한 나랏일을 이 정승에게 알리려고 말을 몰아 청학동 입구에 다다랐다. 녹사가 동네 입구에 오니 웬 촌로(村老)가 지팡이에 나막신을 신고 어린애를 데리고 나오자 대뜸,
“이 정승 계시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이 정승은 천천히,
“으응 급보가 있을 줄 알고 내 여기까지 나왔노라.”
고 태연스럽게 응대하므로 녹사가 어리둥절하여 자세히 보니 이 정승인지라 그만 놀라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 청학동에는 이행과 막역한 박은(朴誾)이 살았다. 두 사람은 글재주가 서로 출중하여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언젠가 이행이 박은의 집에 가서 외출한 박은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박은이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크게 취해 이야기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이행은 할 수 없이 시를 지어 꽃가지에 잘 보이게 걸어 놓고 새벽에야 집에 돌아갔다. 이튿날 술이 깬 박은이 뜰에 나갔다가 국화꽃 가지 사이의 시를 발견했다. 박은은 곧 이행에게 사죄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는 것이다. 박은은 스물 여섯살 때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에 휘말려 귀양가서 사약을 받아 후에 사람들이 그 재주를 아깝게 여긴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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