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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스크랩] 지금으로부터 44년 전...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by 까망잉크 2012. 9. 28.

 

 

 



 

1·21 사태
1968년 1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장한 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던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사건개요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군 정찰국장 김정태로 부터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세검정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였으며,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귀가하던 많은 시민들이 살상당하였다.

 

군 ·경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

김신조를 발견하여 생포하고 이들에 대한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해서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되어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그날 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총경 최규식(崔圭植)이 무장공비의 총탄에 맞아 순직하였다.

사건영향
1·21 사태 = 1968년 1월 21일 밤, 북한 특수부대 ‘124부대’ 소속 31명이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휴전선을 넘어 서울 시내까지 침투했다.

국군 복장을 한 이들은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경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뒤 도주했다.

이후 경기 북부 일대에서 1월 말까지 교전이 계속돼 31명 중 28명이 사살되고 김신조씨는 생포됐다.


시도는 이처럼 미수에 그쳤으나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이후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 및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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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그대가 머문자리
글쓴이 : 토끼풀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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