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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86] '방법도 奇怪한…' 고춧가루 강도

by 까망잉크 2012. 12. 7.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86] '방법도 奇怪한…' 고춧가루 강도

  • 김명환 사료 연구실장 
  • 입력 : 2012.11.21 22:32

    고춧가루를 사람 눈에 뿌리고 금품을 빼앗은 강도 사건이 대낮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터지자 사회면 머릿기사로 대서특필됐다(1939년 2월 5일자).
    1927년 1월 5일, 조선일보 사회면에 일본의 기발한 범죄 수법이 크게 보도됐다. 한밤 오사카(大阪)의 골목길에서 괴청년 2명이 행인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귀금속을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었다. 최루탄 원료로 쓰일 만큼 맵고 따가운 고추의 캡사이신(capsaicin) 성분은 일시적으로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 신종 범죄가 이 땅에 '도입'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같은 해 9월 어느 대낮 경기도 양주군 절 앞에서 괴한이 61세 노승(老僧)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고는 돈 '40원 50전(약 90만원)'을 빼앗아 갔다(1927년 10월 1일자). 별난 수법에 놀랐는지 이를 알린 기사는 '방법도 긔괴(奇怪)한 강도'라는 제목을 크게 붙였다.

    이후로도 고춧가루를 뿌리는 강도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이런 사건을 가리키는 '고초(苦草)가루 강도'라는 신조어도 신문 제목에 등장했다(1932년 10월 14일자). '고춧가루탄(苦草粉彈)을 난투(亂投)'했다는 표현도 나왔다(1938년 3월 17일자).

    대개는 한밤 가정집에 침입해 잠자는 사람 얼굴에 고춧가루를 뿌려대는 일이 많았지만, 수법은 점점 대담해져 길을 가던 행인에게 고춧가루 세례를 퍼붓고 금품을 빼앗는 사건까지 터졌다(1938년 3월 17일자). 경기, 평남, 강원, 경북 등 지방에서 일어나던 고춧가루 강도가 1939년엔 마침내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대낮에 터지자 조선일보는 사회면 톱 기사로 보도했다. 피해자는 우체국에서 현금 100원(약 200만원)을 찾아 보자기에 싸 들고 시내 홍파정(紅把町·현 종로구 홍파동) 뒷골목을 가던 23세의 카페 여종업원. 이 기사도 "전술(戰術)이 고추까루를 뿌린 것이었다는데는 경찰에서도 놀래고 잇다"는 말을 빼 놓지 않았다(1939년 2월 5일자). 1920~1930년대는 권총 강도 사건이 두어 달에 한 번꼴로 터졌던 시기다. '그런 시절의 강도가 고작 고춧가루를 쓰다니'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고추 최루탄'의 위력은 의외로 컸다. 피해 여성은 "애고… 갑자기 눈이 화끈해지고 따가워서 그 자리에 주저안자 한참 정신을 일엇습니다. …눈을 병원에서 씨첫스나 아직도 화끈화끈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춧가루 강도는 광복 후에도 계속됐다.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는 이를 '식물성 강도'라 이름 붙였다(2001년 11월 13일자).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고춧가루 강도는 더 이상 보도되지 않는다. 최루가스총이 등장하면서 굳이 고춧가루를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출처: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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