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역사) 이야기

조선 16대 왕 인조

by 까망잉크 2014. 8. 21.

 조선 16대 왕 인조

조선 제16대 왕(1623~49 재위).

개요
=====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을 실시하는 가운데
정묘호란·병자호란을 겪었다. 재위기간 동안 5군영(五軍營)의 기초가 마련되고
양전(量田)·대동법 등이 시행되었으며 각 학파·정파 간의 국가 질서 재건을 위한 이념적 모색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름은 종(倧). 자는 화백(和伯), 호는 송창(松窓).

반정과 즉위
==============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어머니는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妃)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며
계비(繼妃)는 영돈녕부사 조창원(趙昌遠)의 딸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이어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1623년 서인 김유(金瑬)·이귀(李貴)·이괄(李适)·최명길(崔鳴吉) 등이 일으킨 정변에 힙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박해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반인륜적인
행위와 후금(後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로 반정은 이러한 광해군의 폭정을 중단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위인 것으로 합리화되었다.
따라서 광해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士林)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鄭曄)·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김상헌(金尙憲)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李元翼)·정경세(鄭經世)·이수광(李睟光) 등이 그들이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奇自獻)·유몽인(柳夢寅) 등의 역모가 있었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黃玹)·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가 있었다. 특히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 이괄의 난).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이
내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친명배금정책과 호란
====================
인조정권은 광해군 때의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는 현실주의적 외교정책을 반인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했다.
이무렵 선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종이 왕위를 계승하는 등 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은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
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침략했다

(→ 정묘호란).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의 대표가 회맹(會盟),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1636년 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君臣)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인조정권은 이를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조정에서는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斥和派)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主和派)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三田渡)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된 국가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 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김자점(金自點)을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과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 김집(金集)·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 등의
산당(山黨), 김육(金堉) 등의 한당(漢黨)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김자점은 외척으로서 친청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姜嬪)의 옥사, 봉림대군의 세자책봉과 왕위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국방정책과 경제정책
=======================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먼저 1623년 호위청(扈衛廳)을 신설하여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御營軍)을 창설했으며 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京畿軍)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摠戎軍)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號牌廳)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供物)의 전세화(田稅化)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
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4년에는 삼남(三南)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田結)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稅源)을 확대했다.

이와 함께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田稅法)을 폐지하고 전세의 법적인
감하(減下)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永定法)과 군역의 세납화(稅納化)를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北關)의 회령(會寧) 및 경원개시(慶源開市)
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中江開市)가 행해졌다. 개시에는 상고(商賈)의 수,
개시기간, 유왕일수(留往日數), 매매총수(買賣總數)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孽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지정 번호; 사적 203호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지정일; 1970년 5월 26일

•시대; 조선 효종 원년(1649), 인조 15년(1637), 영조 7년(1731) 이장

•분류; 능원

 

•내용; 장릉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와 부인 인렬 왕후(仁烈王后; 1594~1635) 한씨의 무덤이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 원종으로 추존), 어머니는 인헌 왕후(仁獻王后), 비는 인렬 왕후, 계비는 장렬 왕후(莊烈王后)이다. 1623(인조 원년)에 김유(金瑬)․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이괄(李适) 등 서인의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인 이괄의 난(1624년)을 맞았다. 광해군 때의 중립 정책을 지양하고 반금 친명 정책을 썼으므로 인조 5년에 정묘호란(1627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1636년)의 시련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功西)․청서(淸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이이(李珥)․이원익(李元翼)이 주장한 대동법(1623년)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 지대인 압록강(鴨綠江)의 중강진 등지에 여진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였다. 1628년(인조 6) 네덜란드의 얀 벨트브레(Jan Weltevree; 朴淵)의 표착으로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정두원(鄭斗源)과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통하여 서양의 문물과 접하게 되었다. 1634년(인조 12) 양전(量田; 토지 조사)을 실시하여 토지 제도를 바꿨으며, 연등 9분(年等九分)의 법을 정비하여 세제를 합리화하였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서 볼모로 돌아온 소현 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으며, 봉림 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 세자빈 강씨를 사사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런 난국 속에서도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 등을 새로 만들었다. 한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책이 간행되었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김육(金堉)․김집(金集) 등의 대학자․대정치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재위 27년 만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돌아가셨다.

 

 인렬 왕후는 본관이 청주이며, 영돈녕부사(敦寧府領事) 서원 부원군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1594년(선조 27)에 태어났다. 1610년(광해군 2) 당시의 능양군(綾陽君)과 결혼하여 청성현 부인으로 봉해졌으며,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소현 세자와 후일의 효종인 봉림 대군․인평 대군(麟坪大君)․용성 대군(龍城大君)을 낳았다.

 

장릉은 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정한 파주부(坡州府) 북쪽 20리 거리인 북운천리에 있던 인렬 왕후의 능 오른쪽에 묻혔으나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1731년(영조 7)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 형태이다. 능의 구역에는 처음에 만든 석물과 이장할 때 새로 만든 석물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17, 18세기 석물을 함께 볼 수 있는 왕릉이다. 전통적인 12지신상이나 구름무늬가 아닌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병풍석이 무덤을 두르고 있다.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돌로 된 등인 장명등에도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 있는데 이는 17세기 석물 문양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이다. 현재 이곳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제18대 왕 현종  (0) 2014.09.02
조선 제17대 왕 효종  (0) 2014.08.26
조선 15대 왕 광해군|  (0) 2014.08.17
조선 14대 왕 선조|  (0) 2014.08.14
조선 13대 왕 명종  (0) 2014.08.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