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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 저런 아야기

[스크랩] ‘못 살겠다 갈아보자’에서 ‘...슬로건 한국선거사

by 까망잉크 2016. 10. 10.

 

 

‘못 살겠다 갈아보자’에서 ‘...슬로건 한국선거사

글 | 배진영 기자

⊙ 노태우의 ‘보통사람’은 《조선일보》 ‘선우휘칼럼’에서 아이디어
⊙ ‘대통령病 환자’ 소리 듣던 DJ, ‘준비된 대통령’으로 역전
⊙ “정치 사형수, 군사독재에 사형을 선고한다!”(1985년 2·12 총선, 이철)
⊙ YS, 10·26 1년 전 “민주투쟁을 중단할 수 없다”
⊙ “‘쇠몽둥이에 솜을 감은’ 슬로건이 정말 아프다”(조동원)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민주당이 내걸었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성공한 슬로건이다.
  제20대 총선(總選)이 임박했다. 정당과 후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담은 슬로건들을 쏟아내고 있다. SNS가 발달한 요즘 선거 슬로건의 생명력도 길지 않은 느낌이다.
 
  ‘슬로건(slogan·어떤 단체의 주의, 주장 따위를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이라는 말은 스코틀랜드어의 ‘슬로곤(slogorn)’에서 나왔다. ‘슬로곤’이라는 말 속에는 ‘군대’라는 의미와 ‘함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영(對英)항쟁을 다룬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보듯, 전투가 시작될 때 적(敵)의 기를 죽이기 위해 질러대는 함성이 ‘슬로곤’인 것이다.
 
  선거도 전쟁터다. 이 전쟁터에서 슬로건은 자기편을 결집시키고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한 ‘전투구호’다. 더 나아가 슬로건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창(槍)이다. 상대방은 그 창을 막아내야 한다. 그에게 슬로건은 방패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68년. 그동안 18번의 대통령 선거와 19번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그 치열한 전쟁터에 등장해 ‘시대정신’을 보여주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슬로건들을 살펴본다.
 
 
  전설이 된 ‘못 살겠다 갈아보자’
 
1960년 제4대 대선 당시 자유당 정-부통령 후보 선거 포스터.
  선거라는 전쟁터 중에서 가장 크고 치열한 전장(戰場)은 대통령 선거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 본격적으로 슬로건이 등장한 것은 1956년 제3대 대선(大選) 때부터이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1948년의 초대(初代) 대통령 선거, 첫 직선제(直選制) 대선이기는 했지만 야당이 정비되기 전인 1952년 제2대 대선에서는 별다른 선거 슬로건이 필요 없었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된 제3대 대선은 달랐다. 1955년 9월 호헌동지회를 중심으로 한 보수야권 세력이 민주당을 결성, 신익희(申翼熙) 전 국회의장을 후보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여당인 자유당 후보는 현직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었다. 제3대 대선은 헌정사상(憲政史上) 처음으로 여야(與野)가 맞붙은 대선이었다.
 
  이 선거에서 아직까지도 회자(膾炙)되는 유명한 슬로건이 나왔다. 민주당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그것이다. ‘밑져봐야 본전이다. 갈아나 보자’라는 구호도 내걸었다. 제3당인 진보당 조봉암 후보는 ‘갈지 못하면 살 수 없다’고 외쳤다.
 
  야당의 ‘갈아보자’ 공세에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로 맞섰다. 아무래도 군색했다. 신익희 후보가 선거 유세 도중 급서(急逝)하는 바람에 정권교체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슬로건은 우리나라 선거 역사상 가장 걸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강천석(姜天錫)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은 2005년 10월 15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건국 이후 치러진 수백 번의 선거에서 만들어진 수천 가지 선거구호 가운데 여태 국민들 기억 속에 살아남은 유일한 선거구호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다”라고 했다. 왜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이렇게 생명력을 가진 것일까?
 
 
  ‘못 살겠다 갈아보자’ 짝퉁도 나와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창(槍)처럼 누군가를 찔러서 아프게 하는 슬로건은 자기편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반대편이 아닌) 다른 국민들의 마음도 아프게 할 수 있다. 그런 슬로건은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그리 좋지 않다. ‘쇠몽둥이에 솜을 감은’ 슬로건이 정말 아프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가 그렇다. 거기에다 시대정신과 국민들의 열망을 담았다.”
 
  이동호(李東湖) 캠페인전략연구원장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 속에는 포지티브 캠페인과 네거티브 캠페인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선거 과정은 포지티브 캠페인과 네거티브 캠페인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공포감 불러일으키기’와 ‘희망 심어주기’라는 과정을 통해 유권자들이 반대편으로 가는 것을 막고 또 내게 투표해야 할 이유를 제공하여 끌어들여야 한다. 선거전문가들은 가장 성공적인 슬로건은 ‘예수천국 불신(不信)지옥’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희망과 함께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도 같은 구조다. ‘자유당 정권이 계속되는 한 국민은 계속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라면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으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면 새로운 미래가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명품(名品)이 있으면 짝퉁이 나오는 법. 이후 ‘다 죽겠다 갈아 치자’(제6대 대선, 송요찬 자유민주당 후보),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살길 찾자’(제7대 대선, 오재영 통한당 후보) 같은 슬로건들이 등장했다. 1971년 제8대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金大中) 신민당 후보도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뒷부분에서 아무래도 ‘못 살겠다 갈아보자’의 아류(亞流) 냄새가 난다.
 
 
  ‘트집 마라. 건설이다’
 
1963년 제5대 대선 당시 박정희 공화당 후보의 신문광고. 농경시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1960년 제4대 대선에 출마하면서 조병옥(趙炳玉)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죽나 사나 결판내자’라는 결연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3·15 부정선거를 감지해서였을까? 민주당은 ‘협잡선거 물리치자’는 슬로건도 내놓았다. 자유당의 슬로건은 ‘나라 위한 80 평생 합심해서 또 모시자’였다.
 
  하지만 ‘죽나 사나 결판내자’던 조병옥 후보는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신병(身病) 치료차 도미(渡美)했다가 2월15일 세상을 떠났다. 덕분에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도 치르지 않고 4번째 당선이 확정됐다. 이제 관건은 부통령 선거였다. 자유당 후보는 이기붕(李起鵬), 민주당 후보는 장면(張勉)이었다. 민주당은 ‘슬픔을 거두고 다시 싸움터’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자유당은 ‘트집마라. 건설이다’로 맞섰다. ‘트집마라. 건설이다’는 이후 안정과 경제건설을 강조하는 여당 선거 구호의 원형(原型)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번에는 속지말고 바로뽑자 부통령’이라는 구호에서는 4년 전 부통령 선거에서 패했던 자유당의 초조함이 느껴진다. 결국 자유당 정권은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갖은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에 시민·학생들이 들고일어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19혁명으로 하야(下野)했다. 국회는 제4대 대선을 무효(無效)로 선언하고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했다.
 
1967년 제6대 대선 당시 윤보선 신민당 후보의 포스터.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이 가져온 貧益貧 현상을 공격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민정(民政) 이양을 앞두고 헌법을 개정, 대통령 직선제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공화당 박정희(朴正熙) 후보는 공식 대선 포스터에는 따로 슬로건을 적지 않고, 기호와 이름, 소속정당 이름만 넣었다. 하지만 신문광고나 유인물 등에서는 ‘혁명과업의 완수, 조국근대화’라는 구호를 앞세우면서 ‘유권자 여러분, 이순신을 택할 것인가? 원균을 택할 것인가? 흥부를 택할 것인가? 놀부를 택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공화당은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새 일꾼에 한 표 주어 황소같이 부려보자’ ‘가난을 물리치자. 농민의 아들 성실한 일꾼’이라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황소는 공화당의 상징이었다. ‘농민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는 빈농(貧農)의 아들인 박정희 후보와 구한말(舊韓末)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후예인 윤보선 민정당(民政黨) 후보를 대비(對比)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화당의 이런 슬로건은 아직 농경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에 찌든 196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는 ‘군정(軍政)으로 병든 나라 민정(民政)으로 바로잡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도사퇴한 국민의당 허정(許政·전 과도내각 수반) 후보도 ‘총칼로 망친 살림 내 한 표로 바로잡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모두 박정희 후보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과 5·16 군정의 실정(失政)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
 
1971년 제7대 대선 후보들의 포스터를 지켜보는 국민들. 당시 선거벽보는 유권자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사진=조선일보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는 1967년 5월 3일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대결했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선거포스터에서 ‘우리들과 그리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좀 더 잘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땀흘려 일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명랑한 생활과 보다 편리한 살림을 위해 공화당은 황소처럼 힘차게 일하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공화당의 선거 플래카드 등에는 ‘황소 힘이 제일이다! 틀림없다 공화당’ ‘중단되면 후퇴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 등의 구호도 등장했다.
 
  통합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다시 출마한 윤보선 후보는 ‘빈익빈(貧益貧)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뿌리 뽑자’고 외쳤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경제발전 정책의 과실(果實)이 골고루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야당이 단골로 내세우는 ‘양극화(兩極化) 프레임’의 뿌리를 여기서 본다.
 
  신민당은 ‘박정해서 못 살겠다, 윤택하게 살아보자’는 슬로건도 내걸었다. ‘박정’이라는 말과 박정희, ‘윤택하게’와 윤보선을 접목(接木)시킨 것이었다. 신민당이 내건 또 다른 구호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보자’는 공화당의 상징이 황소인 점을 겨냥한 것이었다.
 
  혁신계 정당인 대중당의 서민호 후보는 ‘보수로 망친 정치 혁신으로 살려보자’고 주장했다.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한 전진한(錢鎭漢·초대 사회부 장관) 후보는 ‘독립 위해 싸운 정당 통일에로 전진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전진한다’는 말은 후보자의 이름자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전진한 후보는 선거 때마다 “전진한다, 전진한다, 전진한!”을 외쳤다고 한다.
 
 
  ‘대중시대의 막을 열자’
 
  후보의 이름과 슬로건을 연결시키는 기법은 1971년 3월 23일 실시한 제7대 대선에서도 등장했다. 김대중(DJ) 신민당 후보가 ‘대중시대의 막을 열자’는 슬로건을 내건 것이다.
 
  김대중 후보의 이름을 딴 ‘대중반정(大中反正)’이라는 슬로건을 담은 신문광고도 내보냈다. 당시 김대중 후보의 선전기획위원(공보비서)이었던 김경재(金景梓) 자유총연맹 총재의 말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인조반정(仁祖反正)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대중반정’이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유진산(柳珍山) 당시 신민당 당수가 ‘너무 강하다’며 반대했다. DJ가 ‘그러면 내 개인 이름으로 내보내겠다’고 해서 광고가 나갔다.”
 
  신민당은 앞에서 말한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살겠다 갈아치자’는 메인 슬로건과 함께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는 슬로건도 내놓아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厭症)을 자극했다.
 
  이에 맞선 박정희 후보측 대응은 밋밋하다. ‘보다 밝고 안정된 내일을 약속합니다’ ‘공화당과 함께 풍요한 결실과 행복한 생활을’ ‘동란 없는 70년대, 가난 없는 70년대, 영광의 70년대’ ‘일하는 게 제일이다, 박 대통령 다시 뽑자’….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김대중 후보를 94만6000여 표 차이로 이겼다. 그리고 1년 7개월 후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다시 대선 슬로건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군정종식’
 
1987년 제13대 대선은 15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 대선이었다. 사진=조선일보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국민들은 15년 만에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됐다. 그해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정당(民正黨) 노태우(盧泰愚)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金泳三)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金鍾泌) 후보가 대결했다.
 
  김영삼 후보는 ‘군정종식, 친근한 대통령 정직한 정부’를 주된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군정종식(軍政終熄)’이라는 말은 민주화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열망을 오롯이 담은 것이었다. 김대중 후보는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을 메인 슬로건으로 삼았다. 자신이 만든 당의 이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 쉬운 단어들과 결합시킨 것이었다.
 
  당시 평민당 선거대책본부 대변인이었던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는 “당시 나는 DJ에게 ‘군정종식’이라는 구호를 써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젊은 참모들이 ‘너무 구닥다리 냄새가 난다’며 반대했다”면서 “갑론을박(甲論乙駁)하는 사이에 YS가 ‘군정종식’ 구호를 가져가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당시 DJ가 0.99% 차이로 YS에게 2위 자리를 빼앗겼는데, 선거가 끝난 후 ‘군정종식 구호만 가져왔어도 DJ가 2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종필 후보의 슬로건 중에는 ‘아이러브 JP’라는 게 있었다. 영어 표현으로 된 최초의 대선 슬로건이라고 한다. ‘민중후보’를 자처하고 나선 무소속 백기완(白基玩) 후보는 ‘가자! 백기완과 함께 민중의 시대로’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보통사람 노태우’
 
  김영삼·김대중 후보 등의 ‘군정종식’ 공세에 대해 노태우 후보는 ‘이제는 안정입니다’로 맞섰다. 6월 민주항쟁 당시의 시위와 그 이후 분출되어 나온 노사(勞使)분규 등 사회혼란에 질린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하지만 이때 노태우 후보와 관련해 국민들이 기억하는 구호는 ‘보통사람’이었다. 노태우 후보는 유세 내내 ‘보통사람 노태우’를 강조했고, 대통령 취임사에서도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노태우 캠프 기획팀에서 활동했던 김학준(金學俊) 전 인천대 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회의를 하는데, 남재희(南載熙) 의원이 미(美)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 얘기를 하면서 ‘애버리지 피플(average people)’인가 하는 말을 했다. 《조선일보》 ‘선우휘(鮮于煇) 칼럼’에 ‘위대한 보통사람 MK택시 사장’(1985년 1월6일자), ‘보통 사람들의 보통 이야기’(1981년 4월24일자)라는 글을 본 기억이 났다. ‘영어로 할 게 뭐 있느냐? ‘선우휘 칼럼’을 보니 ‘보통 사람’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걸로 하자’고 했다. 모두 좋다고 했다. 노태우 후보의 연설에 사용했더니, 반응이 무척 좋았다. 아무도 그렇게까지 효과가 있을 줄은 몰랐다. 나중에 이한빈(李漢彬) 전 부총리는 우리가 자신의 칼럼집 《보통 사람들의 시대》에서 그 표현을 가져갔다고 주장했는데, 그렇지는 않다.”
 
  당시 한가람기획 대표로 노태우캠프 외곽에서 활동했던 전병민(田炳旼)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은 “‘보통사람’의 개념을 두고 논란이 되자 우리에게 그 개념을 정리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중산층 같은 경제적 개념으로 정의할 수는 없어서 ‘남에게 부끄러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떳떳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정의했다. 우리가 작성한 노태우 후보의 유세연설문에도 ‘보통사람’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고 말했다.
 
  노태우 후보는 광고 전문가인 김염제(金稔堤) 박사를 영입, 이미지 메이킹 작업도 했다. 전문광고인이 대선 캠프에 합류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노 후보가 여자 어린이를 안고 있는 포스터 등이 이 팀의 작품이었다. 이러면서 노태우 후보는 군(軍)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상당히 희석시킬 수 있었다.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은 노태우 후보의 ‘보통사람’을 ‘역대 대선 슬로건 가운데 최고’로 꼽는다. 그의 말이다.
 
  “‘보통사람’이라는 구호는 군부 통치의 중심에 있던 사람의 이미지를 친근하게 바꾸었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주장하던 ‘권위주의 대(對) 민주주의’ ‘군정종식’이라는 프레임을 일거에 뒤집었다.”
 
 
  ‘변화와 개혁’이 ‘신한국창조’로
 
1997년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의 선전물들. ‘준비된 대통령’임을 강조했다. 사진=조선일보
  1992년 12월 18일 실시한 제14대 대선에선 오랜 정치적 맞수였던 김영삼 후보(민주자유당)와 김대중 후보(민주당), 그리고 통일국민당 정주영(鄭周永) 후보가 맞붙었다.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는 ‘신한국 창조’를 내걸었다. 당시 홍보위원장이었던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당시 YS가 전달하려던 핵심 메시지는 ‘변화와 ‘개혁’이었고, 그 결과로 우리가 이루려는 나라는 지금의 대한민국과는 다르다는 의미를 담아 ‘신한국 창조’라는 슬로건을 내걸게 되었다”고 말했다. 전병민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은 “‘변화와 개혁’, 특히 ‘개혁’에 대해 청와대와 민자당 내 민정계 일각에서 저항이 있었다. 그 결과 실무진에서 슬로건을 만들면서 ‘변화’는 담되 ‘개혁’은 희석시킨 ‘신한국창조’라는 슬로건을 만들게 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대중 후보의 주된 슬로건은 ‘이번에는 바꿉시다’였다.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는 현대그룹 회장 출신답게 ‘경제대통령 통일대통령’을 앞세웠다. 1980년대 후반부터 ‘포스트(post) 3김(金)’ 정치인으로 주목받아 온 박찬종(朴燦鍾) 신정치개혁당 후보의 슬로건은 ‘젊어서 좋다! 깨끗해서 좋다!’였다. 민자당에서 탈당한 이종찬(李鍾贊) 새한국당 후보는 ‘변화하는 세계, 새한국의 선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완주하지 못했다.
 
  1997년 12월 18일 치른 제 15대 대선은 헌정사상 최초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 선거였다. 신한국당의 이회창(李會昌)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 국민신당의 이인제(李仁濟) 후보, 국민승리21의 권영길(權永吉) 후보 등이 나섰다.
 
  이회창 후보는 ‘깨끗한 정치 튼튼한 경제’를 내세웠다. ‘대쪽’이라는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와, IMF사태를 향해 추락하고 있던 경제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신한국당을 뛰쳐나와 국민신당을 만들어 출마한 이인제(李仁濟) 후보의 구호는 ‘젊은 한국 강한 나라’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깜짝 놀랄 젊은 후보’를 언급한 이래 차기 주자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답게 당시 49세였던 젊은 나이를 앞세운 것이다.
 
 
  경험과 경륜 vs. 참신함
 
  이에 비해 김대중 후보는 당시 71세였다. 1992년 대선 패배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그가 다시 4번째 대선에 도전하는 데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이회창·이인제 후보의 슬로건은 다분히 그런 김대중 후보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이에 맞서 김대중 후보가 내건 슬로건은 ‘든든해요 김대중, 경제를 살립시다’였다. 이와 함께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많은 이들이 대선 포스터에 들어있던 ‘든든해요 김대중,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구호보다는 ‘준비된 대통령’을 더 기억하고 있다.
 
  ‘준비된 대통령’은 누구의 아이디어였을까? 당시 김대중 캠프의 여론조사 등을 담당했던 이영작(李英作·LSK글로벌파마서비스 대표이사) 박사, 새정치국민회의 홍보위원장이었던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 등이 저작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영작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선거 슬로건은 상대방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강점(mirror opposite strength)을 담고 있어야 한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DJ의 강점인 경륜과 경험이라는 말은 참신, 도덕성이라는 말과 대비되는 걸로 나왔다. 경륜과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상대방의 약점이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DJ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참신과 도덕성을 내세우는 상대 후보에게 결집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DJ가 평소 ‘나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40년 동안 준비해 왔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준비된 지도자’라는 점을 내세우면, 상대적으로 정치경력이 일천한 상대 후보는 ‘대통령으로서 준비 안 된 후보’라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DJ에게는 ‘대통령병(病) 환자’라는 비난이 따라다녔는데,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긍정적인 면으로 바꾸는 효과도 있었다.
 
  1997년 5월 23일 DJ도 참석한 선거전략회의에 〈준비된 후보 대(對) 준비 안 된 후보〉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당시만 해도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구호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선거과정에서 유권자의 호응을 받아 점차 가장 중요한 선거구호가 됐다.”
 
 
  김경재, “‘준비된 대통령’, 목사 기도에서 나왔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국민후보’임을 강조했다.
  이영작 박사는 “1992년 제14대 대선 때에는 ‘유능한 대통령’ ‘경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주장했지만, 민주당에서 반대했다”고 말했다.
 
  “당내에서는 ‘DJ가 「유능한 대통령」이면, YS는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말이 되는데, 그렇게까지 YS를 몰아붙일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랬다가 내심 YS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보복을 받게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솔직히 1992년에도, 1997년에도 DJ가 이긴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홍보위원장이었던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는 ‘준비된 대통령’은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한다.
 
  “DJ의 오랜 지지자였던 한 시골 교회 목사님을 만났다. 그가 DJ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위해 준비하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당에 돌아와서 표현을 조금 바꾼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제안했다.
 
  캠프의 젊은 참모들 중에는 ‘무엇이 준비됐다는 말인지가 분명치 않다. 패배가 준비됐다는 말이냐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김대중 후보가 지금까지 세 번 낙선한 것은 앞으로 더 크게 쓰이기 위해 준비되려고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역설, 이 구호가 채택되도록 했다.”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나라다운 나라’를 내걸었다. 2002년 12월 5일자 《조선일보》는 대선 후보들의 구호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이 구호를 언급하면서 “한나라당은 현 정권이 망친 국가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약속을 담을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슬로건은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후보 노무현’이었다. 당시 민주당 경선진행위원장이었던 김경재 총재는 ‘국민후보’라는 아이디어는 자신이 냈다면서 “가장 평범한 사람이면서도 국민이 뽑았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말했다.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은 “노무현 후보의 경우, ‘노무현의 눈물’ 동영상에서 보듯 슬로건보다는 캐릭터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구호는 ‘평등한 세상, 줏대 있는 나라!’였다. ‘줏대 있는 나라’라는 구절은 효순·미선 교통사고 시위 때문에 반미(反美) 데모로 시끄러웠던 당시 분위기의 반영으로 보인다. 사회당의 김영규 후보는 ‘돈 세상을 뒤엎어라!’라고 핏대를 올렸다.
 
 
  문재인, ‘사람이 먼저다’
 
선관위 직원들이 2007년 제17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선거포스터를 게시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2008년 제17대 대선에서 이명박(李明博) 한나라당 후보는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을 내세웠다. 당시 이명박 캠프 홍보팀의 좌장(座長) 역할을 했던 유우익(柳佑益) 전 통일부 장관의 말이다.
 
  “회의에서 이명박 후보의 실물경제에 대한 경륜을 강조하면서 ‘경제대통령’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는 일찍부터 나왔다. 거기에 후보가 표방하는 실용주의 국정철학을 반영,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라는 구호가 나왔다.”
 
  이명박 후보는 ‘국민성공시대’도 내걸었다. 캠프 이름도 ‘국민성공캠프’였다. 풀빵 장수 소년이 대기업 CEO를 거쳐 대통령 자리에 도전하게 된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투영한 것이다. 정동영(鄭東泳)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이에 맞서 ‘가족이 행복한 나라’를 내걸었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는 ‘믿을 수 있는 경제대통령’을 내세웠다.
 
2012년 제18대 대선 후보들의 포스터. 박근혜 후보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문재인 후보는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웠다.
  2012년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朴槿惠) 새누리당 후보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전면에 내걸었다. 당시 홍보책임자였던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의 말이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상대로 나온 문재인(文在寅) 민주통합당 후보는 초선(初選)의원이었고,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안철수(安哲秀) 교수는 아예 정치경험이 없었다. 반면에 박근혜 후보는 그때 이미 국회의원 생활을 15년째 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하려면 적어도 여의도 정치를 10년 이상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슬로건이 ‘준비된 대통령’이었는데, 그건 이미 1997년에 DJ가 사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박근혜 후보는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였다. 이제 ‘우리 사회도 남녀(男女)구분 없이 능력이 있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걸 부각시킬 수 있었다. ‘준비된 대통령’과 ‘여성대통령’을 붙이니, 자연스럽게 ‘준비된 여성대통령’이 나왔다.”
 
  박근혜 후보는 ‘국민행복시대’ ‘박근혜가 바꾸네’ 같은 구호도 내놓았다.
 
  문재인 후보가 내건 슬로건은 ‘사람이 먼저다’였다. 대선 본선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손학규(孫鶴圭) 후보가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내놓았던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는 지금도 곧잘 회자되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함께 살자 대한민국, 상상하라 코리아연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야권連帶가 總選 슬로건 약화시켜’
 
  대선 다음가는 전쟁터는 국회의원 총선거(總選擧)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해서 선거운동을 벌이고, 국민들은 한 명의 후보를 선택하는 대선과는 달리 총선은 전국 각지의 253개 선거구에서 진행된다. 후보자도 근래 선거들을 보면 1000명이 넘는다. 전국적으로 통일적인 슬로건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과거에는 정당마다 통일 슬로건을 내려보내기도 했다. 1960년 7월 29일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많은 민주당 의원들은 공통적으로 ‘독재와 싸운 사람 마음 놓고 찍어주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총선의 경우, 공화당은 후보들의 포스터에 ‘박 대통령 일하도록 밀어주자 공화당(또는 후보이름)’ ‘나는 나라와 내 고장의 발전을 위해 성심껏 땀흘려 일하겠습니다’라는 구호를 올렸다. 야당인 신민당은 ‘통합(단일) 야당 밀어주어 일당독재 막아내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식의 통일구호는 점차 사라지고, 지역사정에 부합하면서 후보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는 슬로건들이 많아졌다.
 
  김형준(金亨俊) 명지대 교수는 “슬로건은 총선 때가 대선 때보다 임팩트가 약할 수밖에 없다”면서 “총선에서도 근래 들어서는 야권연대(連帶)가 관심사로 되면서 정책선거, 정당 중심 선거가 되지 못하는 바람에 슬로건의 의미가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선거정책 면에서도 다른 당의 좋은 정책이 있으면 따라가는 현상(me too)이 늘어나는 환경에서는 ‘내셔널 슬로건(national slogan)’이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YS, ‘내일은 있다. 그날까지 용기를!’
 
4·19 후 실시된 제5대 총선에 나선 민주당 후보들은 反독재 투쟁경력을 강조했다. 사진은 정일형 후보의 선거공보.
  국민들이 기억하는 주요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역대 총선 슬로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967년 제7대 총선은 3선 개헌으로 가는 길목에서 치러졌다. 김영삼 후보(부산 서구)는 ‘통합야당 밀어주어 일당독재 막아내자’는 당의 통일 슬로건만 내세웠다. 신민당의 거물 유진산 후보는 ‘국회는 야당을! 야당은 신민당!’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1971년 4월 제7대 대선 과정에서 대선 주자급으로 성장한 ‘40대 기수’들은 그해 5월 실시된 제8대 총선에서 ‘차기’를 다짐했다. 김영삼 후보는 ‘서구가 키운 일꾼 큰일하게 다시 뽑자’고 외쳤다. 그런 김 후보에게 ‘새 사람 새 정치로 밝은 국정 이룩하자’ ‘깨끗한 새일꾼 뽑아 서구 발전 이룩하자’며 도전장을 던진 공화당 후보가 있었다. 당시 32세의 젊은 변호사 박찬종이었다. 1971년 신민당 대선 경선에서 김대중·김영삼 후보와 겨루었던 이철승(李哲承) 후보는 ‘전주가 기른 민족지도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1971년 제8대 총선에서 야당 거물 김영삼 의원에게 도전한 박찬종 후보의 포스터.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의 최측근이었던 김상현(金相賢) 후보는 서울 서대문에서 3선에 도전하면서 ‘민주투사 다시 뽑아 썩은 정치 뿌리뽑자’고 기염을 토했다. 제7대 총선에서 신민당 전국구로 금배지를 달았다가 제8대 총선에서 처음 지역구(부산 동래을)에 도전한 이기택(李基澤) 후보는 ‘국회만은 신민당에!’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해 4월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견제를 호소한 것이다. 이런 견제론이 먹혀들어간 덕분인지, 신민당은 종전 45석에서 89석으로 약진했다.
 
  원내총무를 지낸 공화당의 중진 김용태(金龍泰) 후보는 선거 포스터에서 ‘한국의 중도 대전땅에 발전시킬 일꾼 왔다’고 호언했다. 여당 의원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지역발전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1973년 3월 27일 실시한 제9대 총선은 유신 이후 처음이다. 포스터에 슬로건 없이 후보 이름, 당명, 기호, 경력만 적은 후보들이 많았다. 유신선포 직후 보안사령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던 최형우(崔炯佑) 신민당 후보(울주-울산-동래)는 ‘이번에도 2번 찍어 최형우를 밀어주자’는 구호를 포스터에 올렸다.
 
1978년 제10대 총선에 출마한 김영삼 후보는 ‘민주투쟁을 중단할 수 없다’고 외쳤다.
  그래도 선거라는 기회를 이용해 저항의 목소리를 담으려 애쓴 후보도 있었다. 제9대 총선 때 부산 제2선거구에 출마한 김영삼 후보는 ‘내일은 있다. 그날까지 용기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유신 직후의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민주화의 희망을 잃지 말자는 메시지가 느껴진다.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총선 슬로건에서도 그는 ‘민주투쟁을 중단할 수 없다’며 결기를 보였다. 1977년 아버지 정일형 의원의 뒤를 이어 서울 종로-중구 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한 정대철(鄭大哲) 후보도 ‘자유민주주의는 포기할 수 없다’고 외쳤다.
 
  제10대 총선에서 신민당은 32.8%의 득표율을 보여, 31.7%를 득표한 공화당에 1.1%p 앞섰다. 야당의 득표율이 여당을 앞선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기세를 타고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선명야당’을 표방한 김영삼 의원이 총재로 복귀했다. 이어 YH사태, 김영삼 의원 제명, 부마사태 등이 이어지다가 10·26사태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제10대 총선은 유신의 종말을 앞당긴 선거가 됐다.
 
 
  “민초여! 새벽이 온다”
 
1967년 제7대 총선에 출마한 김종필 후보의 포스터. 당의 공식 슬로건만을 담았다.
  1981년 3월 25일의 제11대 총선은 신군부 출범 직후의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여당인 민정당 후보들은 선거포스터에 ‘대통령이 일하게 민정당에 투표하자. 안정이 경제성장·안보의 바탕이다’라는 구호를 공통적으로 적어 넣었다. 인기방송인 출신으로 민정당 공천을 받아 출마한 봉두완(奉斗玩·서울 마포-용산) 후보는 이 공통 슬로건 위에 자신이 진행하던 방송프로그램의 이름을 따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를 덧붙였다.
 
  1985년 2월 12일 실시한 제12대 총선에서는 5년간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했다. 서울 종로-중구에서 출마한 이민우(李敏雨) 신한민주당(신민당) 총재는 ‘자생신당 밀어주어 민주회복 앞당기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5공 치하 관제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민한당)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슬로건이었다. 민한당을 탈당해 신민당에 합류한 박관용(朴寬用) 후보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 늦기 전에 바로잡자’ ‘민초여! 새벽이 온다. 진짜 민심 보여주자’는 슬로건으로 기세를 올렸다. 신민당 대변인 박실(朴實) 후보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만든 ‘박해받은 실력자 박실 대변인’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서울 동작에 출마했다.
 
1985년 제12대 총선 당시 서울 성북에서 출마한 이철 후보는 ‘돌아온 사형수’라는 구호로 정권에 도전했다.
  2·12총선이 배출한 스타 중 하나가 이철(李哲) 후보였다. 유신시절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그는 ‘정치 사형수, 이철 성북에 돌아오다’를 외치며 신민당 후보로 서울 성북에서 출마했다. 그는 ‘정치 사형수, 군사독재에 사형을 선고한다!’ ‘민주, 목숨 바칠 자 과연 누구인가’라며, 정권에 날을 세웠다.
 
  1988년 4월 26일의 제13대 총선은 직선제 개헌 이후 출범한 제6공화국의 첫 국회의원 선거였다. 전년 12월 대선에서 2위로 고배를 마셨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는 부산 서구에서 출마하면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은 ‘선명야당, 정책정당, 국민정당’이라는 통일구호를 내려보냈다. 충남 부여에서 출마한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한국의 희망, 부여의 자랑’이라는 슬로건으로 충청 민심을 건드렸다.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노무현 후보는 선거 유인물에서 ‘가자! 노무현과 함께 사람사는 세상으로’라고 외쳤다. 이 선거는 결국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만들어냈다.
 
 
  ‘핫바지라 몰아붙인 문민독재 끝장내자!’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충청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서산-태안에 출마한 변웅전 후보의 포스터.
  1992년 3월 24일 치른 제14대 총선은 3당 합당으로 출범한 거대 여당 민자당과 김대중-이기택 두 사람이 손을 잡아 만든 민주당의 대결이었다. 서울 도봉병(丙)에서 출마한 조순형(趙舜衡) 민주당 후보의 선거포스터에는 ‘민주당 밀어주어 일당독주 막아내자!’는 구호가 적혀있다. 거대여당에 대한 견제심리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민주당 공동대표의 오랜 가신(家臣) 출신으로 전남 목포에서 재선에 도전한 권노갑(權魯甲) 후보는 ‘목포의 꿈을 이루어가는 일꾼, 김대중 대표의 성실한 동반자!!’라며 DJ와의 오랜 인연을 강조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은 민자당에서 이름을 바꾼 신한국당이 외부 영입인사들을 대거 출전시킨 선거였다. 서울 종로에서 출마한 이명박 신한국당 후보는 ‘이젠 이명박입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당선됐다. 4년 전 서울 은평을에서 민중당 후보로 나서 낙선했다가 신한국당으로 출마한 이재오(李在五) 후보의 구호는 ‘민주화에 바친 30년 열정, 은평발전에 쏟겠습니다’였다. 자기 이름 앞에 ‘모래시계 검사!’라고 쓴 홍준표(洪準杓) 후보는 ‘깨끗한 그와 함께 새로운 송파를 건설합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도 신인들을 투입했다. ‘한국의 대처’를 자처하며 서울 광진을에 출마한 추미애(秋美愛) 후보의 슬로건은 ‘껄끄러운 「소신판사」의 깨끗한 정치’였다.
 
  제15대 총선은 신한국당에서 팽(烹)당한 김종필 총재가 충청권을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재기한 선거이기도 했다. 충남 서산-태안에서 출마한 방송인 출신 변웅전(邊雄田) 후보는 ‘핫바지라 몰아붙인 문민독재 끝장내자’면서 충청인의 소외감을 노골적으로 자극했다.
 
 
  민노당,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제18대 총선 당시 親李세력에 의해 공천에서 탈락한 김무성 후보는 친박무소속연대의 이름으로 출마했다.
  2000년 제16대 총선과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기성정치인들이 많이 물러나고 운동권 출신 신세대가 등장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진 제17대 대선에서는 열린우리당 간판을 달고 386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당선됐다. 서울 마포을에서 출마한 정청래(鄭淸來) 후보는 ‘국민의 힘을 보여주십시오’라면서, 탄핵역풍(逆風)에 호소했다. 유시민(柳時敏) 열린우리당(고양 덕양갑) 후보는 ‘이젠, 국회를 바꿉시다’라고 외쳤다. 서대문갑에 출마한 한나라당 이성헌(李性憲) 후보는 ‘그래도 일꾼입니다’라면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젊은 세대에게 밀려나는 기성정치인들의 슬로건은 처연했다. 한때 대권 주자로까지 거론될 정도로 국민적 인기를 누렸던 박찬종 전 의원은 부산 서구에서 무소속으로 나서면서 ‘힘드시죠? 저도 힘듭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라고 애소(哀訴)했지만, 낙선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이강철(李康哲) 후보는 ‘강철이, 자네만 믿네!’라는 구수한 슬로건을 가지고 한나라당의 아성(牙城)인 대구 동구갑에서 출마했지만, 벽을 넘지 못했다.
 
  이 선거에서 10석을 차지하며 약진한 민노당은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반대로 제17대 대선 직후 실시한 2008년 제18대 총선은 한나라당의 롤백(rollback) 무대였다. 뉴라이트운동을 했던 한나라당 신지호(申志鎬) 후보(도봉갑)는 ‘사람이 바뀌어야 도봉이 우뚝 섭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진보진영’의 거물인 통합민주당 김근태(金槿泰) 후보를 침몰시켰다. 1996년 출마 당시 ‘투옥·고문의 어둠을 뚫고 뜨거운 가슴으로 여러분 앞에 다시 섰습니다’라고 외쳤던 김근태 후보는 이때쯤에는 ‘서민의 친구가 되겠습니다’라며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진보신당의 심상정 후보(덕양갑)는 ‘덕양과 대한민국의 확실한 선택’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진보세력의 목소리도 그리 높지 않은 게 느껴진다.
 
  친이계(親李系)가 주도한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 친박무소속연대로 출마한 김무성(金武星) 후보(부산 남구)는 ‘박근혜와 나라를 지키고 남구를 발전시키겠습니다’라고 다짐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있는 지금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작아지는 구호들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후보들은 ‘야권단일’ 후보임을 강조했다.
  대선을 앞두고 치른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도 슬로건의 의미에 걸맞은 ‘전투함성’ 소리는 그리 높지 않았다. 야당조차도 인물론과 지역공약을 앞세우는 게 대부분이다. 세종시에서 출마한 이해찬(李海讚) 후보는 ‘책임집니다. 세종시 완성! 정권교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전남 목포에서 출마한 박지원(朴智元) 후보(민주통합당)는 ‘6·15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임을 앞세우면서 ‘큰 인물! 큰 발전!’을 외쳤다. 통합진보당의 이상규 후보는 서울 관악을에서 나서면서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야권단일후보’임을 앞세웠다. 나중에 위헌정당으로 해산되는 정당의 후보지만, 포스터상으로는 ‘정권교체 위해 야권연대가 이겨야 합니다!’라고 하는 데 그쳤다. ‘야권연대’에 대해, 당명과 당 상징색을 확 바꾼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로 맞섰다.
 
  대선도, 총선도 2000년 이후에는 전보다 슬로건의 울림이 작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동호 캠페인전략연구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선거 슬로건이 작아지는 건, 군정종식・정권교체 등 큰 이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사회가 발전할수록 구호가 작아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선진국에서는 의료보험・연금・복지처럼 생활과 구체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들이 구호가 된다.”
 
  선거 슬로건에는 대한민국 68년의 ‘시대정신’이 녹아 있다. 신생 민주공화국이 걸음마를 하면서 민주주의가 뭔지 배워 가는 모습,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보이는가 하면,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 보려던 개발연대의 몸부림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좋은 슬로건을 내건 정치세력은 진짜로 그 시대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세력이었을까? ‘갈아보자’ ‘갈아치자’는 외침은 정말 선(善)이었을까? 그때 갈아봤으면, 이 나라의 운명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민주주의’, ‘변화’와 ‘개혁’을 외쳤던 이들은 정작 정권을 잡았을 때, 그들의 말을 얼마나 실천했는가? ‘준비되었다’고 주장하던 후보들은 정말 얼마나 준비되어 있었나? ‘일꾼’과 ‘머슴’을 자처하던 후보들은 을(乙)의 탈을 쓴 갑(甲)은 아니었나?
 
  문득 생각나는 말이 있다. “말을 아주 정교하게 남이 듣기 좋도록 하고, 얼굴빛도 곱게 하는 사람들 중에 (정말로) 어진 사람은 드물다(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善矣仁).”(《논어(論語)》 ‘학이(學而)편’)⊙

등록일 : 2016-03-26 오전 8:27:00  |  수정일 : 2016-03-2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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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1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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