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25 목숨을 건진 ‘거짓말’(주)하동신문
회군공신 상장군 박순(朴淳)이 죽음의 길을 자청했다가 용흥강 귀신이 돼버린 뒤, 다시 함흥으로 보낼 차사를 논의하는 중신들 모임에서, 태종의 심복 총신 조영무(趙英茂)가 지나가는 말로 넌지시
“태상왕 전하의 옛 친구 성석린(成石璘) 대감 정도면…”
하고, 옆에 앉은 귀밑 머리가 희끗 희끗한 60대 중반의 성석린을 힐끗 쳐다보고 얼버무리니, 찬성사 성석린이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차마 “실없는 소리 말라!” 는 태도로 꽁무니를 뺄 분위가 아니었다.
가타 부타 말은 하질 못하고 헛기침만 하다가 집에 돌아온 성석린은, 이왕이면 ‘좋다구나’하고 기다렸다는 듯 나서는게 체면상 신하된 도리라는 생각에서, 이튿날 차사로 함흥에 가서 태상왕을 설득하겠다고 태종에게 자신 만만하게 고하니, 태종은 성석린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허락을 하였다.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 고려 조정에서도 문하시랑 찬성사에 올라 권력의 핵심에 들었던 성석린은, 태상왕 이성계보다 나이 세살 아래였으나, 문무를 겸전하여 왜구 토벌에 함께 공을 세우기도했던 절친한 동지였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힘을 보탰던 개국공신이 아니던가. 조영무가 사람을 볼 줄안다는 생각을 머리에 담고, 무명옷 차림에 백마를 탄 과객인양 길을 나선 성석린은, 며칠 뒤 석양 무렵 함흥 태상왕 전각 근처에 다달아 말을 매 놓고 불을 지펴 밥짓는 시늉을 하며 연기를 피웠다.
태상왕은 그전에 없던 광경을 바라 보고 내시를 보내 사정을 살피게했다. 성석린은 달려 온 내시에게
“찬성사 성석린인데, 지나는 길에 날이 저물어 여기서 유숙하려한다”
고 말하며 능청스럽게 연극을 꾸몄다. 내시는 그대로 태상왕에게 아뢰니, 옛 친구 성석린이 근처에 왔다는 말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태상왕은, 즉각 그를 안으로 불러 드렸다.
“벼슬을 그만 둔 백두(白頭)의 몸으로 천하를 주유(周遊)하던 길에 전하를 뵙게 되오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라고 꾸며 대는 성석린의 말에 넘어 배긴 태상왕은, 진심으로 보고 싶던 친구를 만나 반갑기 그지없다는 표정으로 눈매가 밝아졌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더니, 성석린이 넌지시 인륜(人倫)에서 벌어지는 변고(變故)를 다스리는 방도와 인간의 도리에 대한 소견을 은근히 피력하니, 세상 만사를 겪으며 이미 달인(達人)의 경지에 이른 태상왕은, 곧 눈치를 채고 얼굴색을 달리하여 목청을 높혔다.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로구나!”
험하게 일그러진 태상왕 표정을 살핀 성석린은 그만 혼비백산, 엉겹결에 둘러댔다.
“아니옵니다! 신(臣)이 만약 그리하여 왔다면, 신의 자손은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기발한 임기응변에 태상왕은 성석린의 말을 믿지 않을 수없었다.
그리하여 성석린의 인륜에 관한 이야기에 마음이 약간 풀어진 태상왕이, 태종에 대한 원한을 제법 누그려뜨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뒤에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환궁하면서, 태종을 죽이려 활을 쏘고, 가까이 오면 머리를 바수어 버릴 철퇴를 소매 속에 감춘 것으로 봐 아닌 것 같았다.
성석린은 태종이 보낸 차사가 아니라는 『거짓말』로 목숨을 건져 환궁, 태종 앞에 엎드려 사실을 고하고 “죽여 주옵소서!”하며, 죄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태종은 나라의 원훈이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다행이라는 생각에서,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성석린의 측은하게 여기며 두손을 마주 잡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뒤에 태종15년(1415) 성석린은 만조백관의 우두머리 영의정까지 오르고 궤장을 받았다. 검소한 생활을 즐긴 성석린은 세종5년(1423) 정월 86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석린의 두 아들 성지도(成至道)·발도(發道)가 눈이 멀었고, 성지도의 아들 성귀수(成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태중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태어나니, 3대를 이은 장님 가문이 된 셈이었고, 성석린의 차남 성발도는 슬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하늘의 섭리였던가, 이 이야기는, <왕조실록>에는 없고 <열려실기술>에 실려 전하는데, 성석린의 슬하에 장님이 태어나자 소설 처럼 이야기로 꾸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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