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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44)황금

by 까망잉크 2018. 10. 21.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44)황금

입력 : 2018-09-21 0
 

노 첨지네 소작농 딸과 성실한 머슴 혼인 후 부지런히 일해 살림 늘려

어느 날 한양에서 내려온 친구가 금광 미끼로 꼬드겨 데려가는데…
 


열다섯살 딸 아지와 그의 어미 막실댁은 허구한 날 싸우다 지쳐 동헌에 왔다. 사또가 귀를 기울였다. 얘기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노 첨지네 소작농 딸과 성실한 머슴 덕보가 닭한마리 묶어놓고 맞절을 한 후 가시버시가 됐다. 스물한살 덕보는 주색잡기에 한눈팔지 않고 5년 치 새경을 고스란히 모아 막실에 야트막한 야산을 샀다. 새색시와 새신랑은 산자락에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화전 개간은 나무뿌리 캐는 게 가장 힘든 일인데, 그 산은 다행히도 메마른 땅이 아니어서 나무뿌리가 깊지 않았다.

새색시 막실댁과 새신랑 덕보는 달밤에도 삽질과 괭이질을 했다. 한평·두평 밭이 늘어나는 재미에 어떤 날은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일해도 힘든 줄을 몰랐다. “우리 땅! 이건 우리 땅이야! 우리는 소작농이 아니야!” 덕보는 뒷산 메아리가 돌아오도록 고함친 뒤 새색시 막실댁을 뼈가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겨울이면 대처에 나가 통시를 치워서 돈을 받고 똥은 화전에 뿌리니 일석이조였다. 막실댁은 바느질 솜씨가 좋아 땅이 어는 겨울이면 포목점에서 바느질감을 한보따리씩 싸들고 왔다.

이듬해 둘은 딸을 낳았다. 내 땅이란 뜻으로 동네 훈장님이 ‘아지(我地)’라 이름 지었다. 첫딸을 낳으면 부자가 된다던가. 살림이 불같이 일어났다. 손가락이 뭉개지도록 일궈낸 땅에서 3년째에 콩을 9섬, 그 이듬해에는 21섬 수확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마다 덕보네는 한마지기·두마지기 논을 샀다.

막실댁은 가을무 뽑듯이 아지 밑으로 달 같은 아들 둘을 낳았다. 남향받이에 아홉칸짜리 반듯한 집도 지었다. 십수년이 흘러 덕보와 막실댁은 2남1녀를 두고, 논밭이 36마지기인 알부자가 됐다. 하지만 그들은 부지런함의 끈을 놓지 않았다.

침을 삼키며 덕보와 막실댁이 살아온 얘기를 듣던 사또가 사동에게 감주 세그릇을 가져오라 해서 얘기가 멈췄다. “막실댁이 누구냐?” “사또 나리, 제가 막실댁입니다. 얘는 맏딸 아지고요.” 사또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어?”

막실댁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얘기를 이어갔다. “작년 초겨울에 한양에서 백마를 탄 훤칠한 남자가 내려왔습니다.” 그 남자는 덕보의 어릴 적 친구였다. 챙 넓은 갓에 비단옷을 입고, 손은 깨끗했으며 허연 얼굴엔 너털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최 진사라는 그가 덕보를 데리고 읍내 기생집으로 갔다. 생전 처음 가보는 기생집에서 덕보는 술을 마시고 외박까지 했다. 막걸리에 짠지 한조각 집어 먹다가 갈비 안주에 청주를 마시고, 얼굴이 새까맣고 손가락은 나무뿌리처럼 거친 마누라 막실댁만 안다가 피부가 뽀얗고 야들야들한 기생과 이불 속에 들어가니 덕보 눈이 뒤집혔다.

덕보 친구 최 진사가 품속에서 주먹만 한, 번쩍이는 돌을 꺼내 보였다. 노다지라는 것이었다. 함경도 무산에서 금광을 한다는 최 진사는 덕보를 꼬드겼다. 막실댁이 울면서 말려도 소용없었다. 어느 날 덕보는 최 진사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한달 뒤에 돌아온다던 덕보는 두달·석달이 돼도 코빼기도 안 보였다. 청천벽력으로 천석꾼 부자 노 첨지가 찾아와 차용증을 들이밀었다. 덕보가 최 진사를 따라가면서 노 첨지에게 장리로 3천냥을 빌려갔던 것이다. 떠난 지 한해가 다 돼가는데 덕보는 일자 소식도 없고 노 첨지의 독촉은 점점 심해졌다. 논밭을 넘기든가, 우선 5백냥에 열다섯살 맏딸 아지를 첩실로 달라고 했다.

아지는 엄마아빠가 어떻게 모은 땅인데 그걸 노 첨지에게 주느냐며 자기가 첩실로 가겠다고 우겼다. 막실댁은 논밭을 다 주더라도 아지를 노 첨지 첩실로 줄 수 없다고 했다.

모녀가 수없이 싸우다 사또를 찾은 것이다. “사또 나리께서 현명한 판단을 해주십사 하고…. 으흑흑.”

사또가 이방을 불러 귓속말을 하더니 노 첨지를 불러오라 했다. 이방이 노 첨지에게 엄포를 잔뜩 놓았다. “사또께서 노 첨지의 비행을 책으로 엮어놓았습니다. 심지어 30년 전 마름하며 소작농 마누라를 겁탈한 것까지!” 사시나무 떨듯이 동헌으로 들어온 노 첨지가 사또 옆의 막실댁을 보더니, 품속에서 덕보가 쓴 차용증을 꺼내 사또에게 바쳤다. 사또는 말없이 차용증을 태워버리고는 막실댁에게 말했다. “막실댁은 밭 10마지기를 노 첨지에게 주시오.”

천석꾼 부자 노 첨지에게 3천냥은 새 발의 피다. 밭 10마지기면 그중에 대충 5백냥을 건진 것이다. 막실댁과 아지는 사또 앞에 엎드려 감격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추석날 밤, 막실댁은 마루 끝 기둥에 기대 앉아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봤다. 논밭 10마지기만 노 첨지에게 주고 나머지 26마지기를 지켰고 딸 아지도 지켰지만 덕보는 아직도 소식이 없었다. 그때 남루한 차림에 삐쩍 마른 거지 하나가 들어왔다. 덕보였다. 막실댁은 버선발로 내려가 덕보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마당 끝에 서서 막실댁과 자식들을 끌어안고 달빛에 물든 황금 들판을 바라보던 덕보. “황금은 내 눈앞에 있는데….”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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