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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스크랩] 최영(崔瑩)

by 까망잉크 2018. 11. 26.

 

 

최영(崔瑩, 1316~1388) 


奮威光國鬢星星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을 바치니

學語街童盡識名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一片壯心應不死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千秋永與太山橫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라

 

 

변계량이 최영을 추모한 시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

 

 

고려 말의 장수이자 최후의 명장. 고려 최후의 충신으로 문()으로는 정몽주가 있다면 무()로는 최영이 있었다.

 

이성계와 함께 고려 말기에 이름을 떨쳤던 명장이었으며, 또한 왜적의 침략과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인하여 무너져가는 고려 왕조의 대들보이자 수호신, 그리고 한국사 속 대표적인 충신이기도 하였다. 시호는 무민공(武愍公). 그 행적과 활약상은 로마 제국의 스틸리코와 비견될 만 하다.

 

맹활약과 청백리의 면모 때문에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란 위치에 있었음에도 조선시대에 와서도 "명장은 명장이었다"고 평가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고려 말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백성들 사이에서는 마치 삼국지의 관우처럼 장군신으로 숭배되었다. 지금도 최영이 맹활약을 펼친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해안 지역에 가면 최영을 모신 사당이 많이 남아 있다.

 

2. 일생

 

 

2.1. 공민왕 집권

 

 

젊은 시절부터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당시 쳐들어오던 왜구를 종종 격파했고 공민왕 즉위 후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공민왕 재위 초반의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원나라에서 당시 일어난 반란 세력인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자 공민왕의 지시를 받고 인당, 유탁, 염제신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 재상 탈탈의 막하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돌아왔다. 이후 서북면병마사 인당과 함께 서북지역으로 출진,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여 옛 영토를 수복했다.

 

홍건적이 쳐들어왔을 때 분전했으나 개경이 함락되고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가는 사태가 발생했을 때, 개경 수복전에서 활약했다. 또한 그 외에도 자주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하여 왜구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최유에게 2만의 군대를 주고 고려에 파견했을 때에도 이를 격파했다. 이렇듯 고려 말 대전란의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파하여 지위도 높아졌으나 신돈이 권세를 쥐었을 때 모함을 받아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 복직되어 공민왕이 시해될 무렵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원나라 목동)들의 반란을 평정하고 있었는데 야사에는 최영이 갈대씨를 연에 묶어 날려보내 심은 후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그 갈대가 무성히 자라자 이를 이용해 화공법을 써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는 목호의 난은 1374828일 제주에 도착해 922일 평정을 완료하고 제주도를 떠났을 정도로 단기전이었으니 야사는 야사일 뿐.

 

 

2.2. 우왕 집권

 

 

공민왕 사후 우왕이 즉위해서는 고려군의 대들보같은 존재로 활약했는데 1376년 왜구가 충청도 일대에서 기승을 부리자 노구를 이끌고 출전을 자원, 홍산(부여)에서 직접 선봉에 서서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를 홍산대첩이라 하여 이성계의 황산대첩, 박위의 대마도 정벌, 최무선의 진포대첩, 정지의 관음포 전투 등과 함께 이 시대의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이 때 최영은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선두에서 노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했는데 왜구의 화살을 입술에 맞았다. 최영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그 화살을 뽑아서 자기를 쏜 왜구를 쏴 죽였다. 이 용맹한 모습은 고려군의 사기를 진작시킬 뿐 아니라 당시 왜구들의 두려움을 사 "고려에서 두려워할 것은 머리가 허옇게 샌 최 만호 뿐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왜구만이 아니라 타국에도 명성이 떨쳐져 최영이 죽으면 최영 개인이 죽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의 위신 자체도 직결된다고 하였고 국가가 위태로워질수도 있다고 말하며 이때문에 전장에 함부로 나서는 것도 자제해야 할 정도라고 하니이쯤 되면 진정한 고려의 최종보스이자 수호신.

 

이후 조정에서 요직을 겸직하게 되고 우왕의 난행을 간언하기도 했다. 이 중엔 충혜왕과 충숙왕의 사례를 비교해서 심각성을 강조하는 간언도 있다.

 

우왕이 장성하자 그를 도와 이성계와 함께 당시의 실권자이자 대표적 친원파로 권문세족의 대부였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재상직에 올랐으며 우왕이 최영에게 "따님을 제게 주세요!"라고 말해서 우왕과 최영의 딸은 결혼했다. 이 딸이 우왕의 2비인 영비 최씨다. 최영 본인은 본처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혼인은 이루어졌다. 우왕으로써는 최영을 든든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난행을 간했던 이를 자신의 정치적인 후견인으로 삼고 걸림돌을 제거한 측면에서 보면 청년기의 우왕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성향만 제외한다면 정치적인 안목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이렇게 임금의 장인이 되어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참혹한 말로를 불러올 전조였으니

 

 

2.3. 요동 정벌

 

 

이 무렵 중국에서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고려와 명나라는 외교적 분쟁을 겪고 있었는데, 명나라 사신이 와서 "철령 이북은 명나라 땅이다"라고 북변을 명에 귀속시키려고 엄포를 놓자 이에 반발하여 우왕에게 대대적인 요동정벌을 진언, 결국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원정을 총지휘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요동 정벌'이다.

 

이 정벌의 성공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변의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때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것은 유명한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기에 불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여러 모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 고려가 간신히 여러 전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원정이 여러 가지로 무리한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 또한 바로 이 해(1388)에 명나라를 괴롭히던 요동의 군벌 나하추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명에 항복했고 북원도 명나라 장군 남옥이 이끄는 15만 병력에 박살나는 바람에 크게 쇠약해져 있었다. 이렇게 북방에 단순 규모로만 봐도 명의 병력이 고려군의 3배 이상에 달했기에 고려군이 아무리 정예라도 상당히 고전하지 않을까 하는 견해가 우세하다. 물론 5만이라는 건 실 병력 수다. 그런데 당시 동아시아에서 호왈이 일반적인 관습인 걸 감안하면 명군과 나하추의 15, 20만의 수치 또한 실병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이유 역시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최영은 원래 후배 무장인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사불가론으로 이성계와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로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한 출정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출정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만다.

 

 

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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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된 최영을 묘사한 그린 무신도. 왼쪽은 서울 국사당에 걸려 있다.

참조링크 글 맨 마지막 무신도 사진 참조.

 

부대를 이끌고 북진하던 이성계는 위화도 근처까지 진군하였으나 비가 쏟아져 길이 막히게 되자 함께 출전하였던 조민수와 함께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최영은 도성에 몇 없는 병사를 추려서 반격에 나선다.

 

백전노장 최영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민수의 부대를 패퇴시키는 등 최후의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되지 않는 병력으로 수만명의 군세를 상대할 수 없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머릿수에 밀려 중과부적으로 개경에 몰리게 되어 체포되고 만다. 이 때 최영을 잡은 이성계는 그에게 "제 본심은 아니었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잘 가시오. 잘 가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곧 믿었던 후배 무장 이성계에 의해 고봉현에 유배되었다가 곧 개경으로 압송되어 향년 73세의 나이에 처형되었으며 전권을 장악한지 반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처형되는 순간에도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은채 태연했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그는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야사에는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 토성을 쌓을 때처럼 흙을 두들겨 단단하게 만드는 판축 공법으로 무덤을 만들면 풀이 잘 안 난다고 한다. 고인이 뱀을 싫어하면 무덤에 뱀꼬이지 말라고 이런 식으로 무덤을 조성하기도 했다고. 최영의 묘는 지금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에 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난대다 풀이 심어져 있어 지금은 풀이 자라고 있다. 또한 최영의 묘 바로 뒤에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다.

 

재미있게도 최영 부자의 묘 주변은 조선 왕족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최영의 묘와 같은 산에 태종의 4남 성녕대군의 묘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의 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 내외의 묘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의 묘가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고 하며 개경의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아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무인으로써의 활약도 레전드급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의 행동만 봐도 단순한 명장이 아닌 고려의 수호신이자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그의 사후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왕위 찬탈을 향한 행보를 시작한다.

 

 

한국사 대표 충신중 하나.

살아서는 국가의 충신양장(忠臣良將), 죽어서는 백성의 수호신이 된 남자.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이 최영이 한 말으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사실 이것은 최영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물론 최영이 저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다는 점에서 유명해진 말인 것은 사실이다. 고려사에서도 청렴강직한 인물로 그를 평가하고 있지만 "편협하고 무식했다"는 악평도 남기고 있다. 전장에서의 활약을 서술함에 있어도 고려사나 실록은 단순무식한 무장으로 몰아가고 있는데, 막상 전투양상을 보면 작전수립이나 정보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대표적 전투인 홍산대첩 때의 과감한 돌격은 왜구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감행한 돌격이었다. 단순무식한 맹장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소리. 애시당초 돌격대장은 머리 나쁘면 오래 못한다. 금방 죽을테니까. 위의 폄하는 왕조 개창 이후 전 왕조의 버팀목이었던 최영을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군인이었던 이성계와 달리 순수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라 정치를 함에 있어선 거침이 없고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번개같이 진행된 이인임 축출건처럼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윤 제거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번 작정하면 이인임도 못말렸다. 요동 정벌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반대를 모두 무시한채 군사를 일으키고,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를 기어이 혼자 보내고 퇴각 불가 방침을 내렸다.

 

당연히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엄격했다. 웬만한 장수들은 군령을 어기면 목이 달아났고,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배 2000척을 만드는 과정에서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런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 하면서도 한편으론 국가의 수호신으로 존경해 마지 않았다. 실제로 휘하의 군인이 죄를 지으면 군법을 엄격하게 지켜 효수하거나 팔을 잘라 조리돌림 하기도 했으며, 최영의 조카사위가 살인죄를 지었을 때 그의 인척임을 감안해 죄를 경감해주려고 하자 법대로 하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이성계와 정적관계를 형성하며 대립하였고 조선에서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의 혈육으로 주장하면서 반역열전에 기술하는등 철저히 폄하된 우왕의 충신이기도 했기에 조선 왕조 때 평가 절하를 당할 법도 한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세종실록에 보면 최영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이 옹호한 기록이 있다. 왕씨가 아닌 우왕을 세워서 섬겼다면서 비판하는 신하에 대해서 세종대왕은 후에 태조가 왕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떡밥 깔아준게 아닐까 하는 어조의 반론을 한다. 물론 신하들은 "그땐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실 낌새도 없었는데요."라고 단칼에 잘라버리지만. 정몽주가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은 조선왕 조에서 높이 숭상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 왕들은 최영, 정몽주를 통해 고려말의 부패와 망국의 상황을 더욱 극화하여 역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한편, 신하들이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했듯이 조선에 충성하길 바랐다.

 

덧붙여 말로만 지휘하는게 아니라 직접 최전선에 뛰어드는 지라 상처도 많이 입었다.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투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말만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강직하고 두려움 없는 무장이었다. 홍산 대첩때도 그렇고 그전에 홍건적과 싸울때도 창으로 여러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싸워 그 전투를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고 명성과 높은 평가는 자국에 한정된게 아니라 타국에도 적용되어 최영이 죽으면 무장하나 죽는게 아니라 고려 전체에 직결된다고 한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영 열전에서 최영의 명성과 용맹이 근방에도 알려져서 최영이 지금 죽으면 개인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언급했다. , 살아있는 것만으로 억제력 역할도 하고 있었는듯 하다.

 

 

 

매관매직이 성행할 무렵 어떤 사람이 벼슬자리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몰라서 묻나? 상공(商工)을 배우면 간단하네!"라고 독설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다. 최영 본인은 권문세족의 대표였던 이인임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이인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애당초 최영의 가문인 동주(철원) 최씨가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정치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이인임의 편에 서서 활동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히 공민왕 사후에 혼란했던 정치판에서의 모습을 보면 왕의 충신이라기보다는 이인임과의 정치적 파트너로써의 모습이 강하다.

 

예를 들어 이인임이 정치적인 문제를 이유로 우왕의 유모 장씨를 살해하려 하자, 이를 알게된 우왕이 "장씨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며 살려달라며 매달렸으나 거절, 이에 우왕이 "그대는 누구의 신하인가!"라는 일갈을 듣기도 했다. 우왕은 이후에 정줄을 놓게 되고 반면에 권력을 쥐게된 이인임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또한 훗날 이인임을 귀향 보낸 것도 왕에 대한 충심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크다고 볼수가 있다. 사형을 받아도 될 그에게 사사로운 정으로써 귀향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는 부분.

 

그러나 정치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하기에는 위에 나온 사례를 봐도 그렇고 사적인 욕심이 없었던 건 사실인 듯 하다. 개별적으로 손님이 집에 오면 종일 밥을 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무래도 그의 집에 온 게 귀족들이라든지 높으신 분들인데 배고프다고 투덜거릴 수도 없으니 그냥 굶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채소와 간략한 반찬을 대령한 밥을 내줬는데 배가 고픈 손들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맛이 좋다고 하면 최영은 웃으면서 "이것도 병법이 아니겠소?" 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4. 일화

 

 

내려오는 전래 이야기로 말을 타고 장군의 묘 근처를 지나가면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지나가던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왕릉 등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서 가야한다. 그런데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숙종의 가마가 심한 비바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숙종이 "네놈이 똑똑했으면 왜 고려가 망했겠냐? 바보짓하지말고 꺼져!"라고 일갈하자 비바람이 잠잠해졌다는 말이 있다.수십 년 후 영조때에도 같은 일이 있어 영조가 소리치길, "고려도 500년이나 해먹었으면 됐지, 무엇이 부족해서 깽판이냐? 가버렷!!"이라고 일갈해 되려 최영 귀신이 데꿀멍했다고 한다. 숙종과 영조 부자 간이 모두 한 성깔 하는 것으로 유명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야사. 더군다나 그 둘 때는 왕권도 꽤나 강했다.

 

반면 조선조 말 고종때에는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고종이 가마를 타고 지나가자 비바람이 불었고, 원래 허약했던 고종은 근처의 연못으로 빠져버렸다. 이때 이항의라는 선부관(호위무사)이 달려들어 고종을 구해냈는데, 하필이면 잡은곳이 상투였다.

 

 

왜구정벌을 위한 항해 도중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와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에 한동안 정박한 일이 있다. 추자 올레길 코스 상에 최영장군 사당이 있고, 요즘도 매년 성대하게 제사를 올려 최영 장군의 은덕에 감사하는 한편 지역의 발전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그런데 추자도의 경우 신격화 된 이유가 다른 지역과 달리 왜구의 노략질을 막아주어서가 아닌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이전까지 준 원시생활을 하던 추자도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 최영 장군이 그물을 엮어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고 원시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실제로 추자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 최영장군 사당이며, 이 사당은 추자 주민들에게 중요한(혹은 신성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여기서 허튼 짓 하다간 송장 치울지도 모른다.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지만 그런것들과는 상관없다.20142월 정도전(드라마)에서 이 사당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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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글쓴이 : 기라성2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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