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언·그리고 못 다한 이야기

사랑은 3단계로 익어간다

by 까망잉크 2019. 2. 16.

[아무튼, 주말] 젊어선 연정, 결혼해선 애정, 늙어선 인간애… 사랑은 3단계로 익어간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 입력 2019.02.16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아침에 전화가 왔다. 오래 연락이 없던 후배 교수였다. "새해도 넘겼고 설을 맞이하는데 세배 대신 전화로 인사드립니다"라는 것이다.

    "정초에 TV '아침마당'에서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 같이 시청하던 아내가 '당신도 김 교수님같이 백세를 맞이할 때까지 건강해야 할 텐데…'라고 하데요. 그런 것은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더니 아내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김 교수 사모님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바가지를 긁지 않기로 유명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활동하신답니다'라고 설명했지요. 이전 같으면 뭐라고 말싸움을 걸어 올 텐데 그날 아침에는 '나도 앞으로는 그 사모님같이 조심할 테니까 오래 건강만 하세요' 하면서 격려해 주었습니다. 뜻밖이었습니다."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이철원

     

    후배 교수는 "얼마나 오래갈지는 몰라도 80이 넘으니까 아내도 철이 드는가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같으면 젠더 감수성 없다고 욕먹을 소리지만, 옛날 사람인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생각했다. '부부간에 철이 드는 데도 80은 넘어야 하는가?'

    내가 50대 중반쯤 일이다. 동년배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하고 있었다. 한 교수가 "오늘 저녁 값은 큰 부담이 안 되니까 각자 내기보다는 누구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새 양복을 해 입은 사람을 찾기로 했는데 고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얼굴색이 좋고 기름기가 많은 사람으로 표적이 바뀌었다. 두세 사람 후보가 나왔다가 내 왼편에 앉았던 S 교수가 걸렸다. 의과대학 교수여서 월급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

    S 교수는 "내 얼굴이 그렇게 좋아졌나?" 하고는 "그러고 보니까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무슨 이유인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한 달 동안 학회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었는데, 그동안 마누라 바가지 긁는 소리를 안 들었으니까 그렇구나!" 모두가 웃었다. 사실 그 나이의 아내들은 생리적으로 바가지를 긁게 되어 있다. 말은 안 하지만 남편들의 잠재적인 소원이기도 했을 것이다.

    다른 친구가 말을 이었다. "S 교수는 엄처시하에서 고생은 하지만 공처가가 아닌 것은 인정해. 공처가는 밖에 나와서는 큰소리를 치곤 하는데, S 교수는 그런 실수는 안 하거든." 일종의 위로였다. 또 다른 교수는 "그건 몰라. 경처가(驚妻家)도 언제나 말은 안 한다"라고 했다. 내가 "경처가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와이프의 무서운 얼굴만 보고도 깜짝 놀라면서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인데, 여자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와이프나 가족들에게 크 게 잘못했을 때 걸리는 공처증이라는 얘기다.

    그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다들 재미있게 웃으면서도 '내 와이프는 어떤가' 짚어보는 듯했다. 그래서 모든 남자는 나이 들수록 따뜻하고 안아주는 모성애를 가진 여성을 기리는 것 같다. 젊었을 때는 연정을 즐기고, 가정을 가진 후에는 애정을 쌓아 가다가, 더 늙게 되면 인간애로 승화되는 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