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205)은장도<상>
입력 : 2017-11-22 00:00
수정 : 2018-03-02 17:36
스물두살 청상과부 호실댁
친정 다녀오다 천둥에 놀라 외딴 상엿집으로 들어가는데…
친정아버지 생신에 갔다가 이틀 만에 시댁으로 돌아가는 청상과부 호실댁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삼년 전, 시집갈 때도 이 고개를 넘어갔지.’ 까치 고갯마루에서 바위에 걸터앉아 호실댁이 상념에 젖었다. 가마를 타고 시집가던 날, 하늘은 구름한 점 없이 맑았고, 온 산은 진달래로 빨갛게 덮였고, 나비 한쌍이 너울너울 춤을 추며 가마를 따라왔었다. 풍산 류씨 류 대감댁 며느리가 된 새색시. 호실댁은 온 세상이 제 것처럼 보였건만, 호사다마. 보름 만에 새신랑이 말에서 떨어져 뇌진탕으로 즉사해 청상과부가 됐다.
삼년상을 치르고 소복을 벗고 첫 나들이로 친정아버지 생신에 갔지만 아무도 호실댁의 장래를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은 하늘조차 호실댁 마음처럼 먹구름이 끼었다.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지자 호실댁이 발딱 일어나 장옷을 덮어쓰고 종종걸음으로 고개를 내려오는데,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먹구름은 하늘을 덮어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폭우가 쏟아지며 토끼길이 흙탕물로 넘쳤다.
장옷도 저고리도 치마도 물을 먹어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우르르 쾅 번개까지 치자 호실댁은 털컥 겁이 났다. 몸종 삼월이와 함께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삼월이는 이번 친정 나들이에도 함께했으나, 제 어미가 아파 떼어놓고 혼자 오는 길이다.
산허리 하나만 돌면 시집 풍산이지만 천둥에 놀라 호실댁은 외딴 상엿집으로 들어갔다. 맑은 날도 상엿집은 으스스한 곳이나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상엿집 안은 더더욱 어두웠다. 호실댁은 장옷을 벗고 사방을 훑어본 후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 물을 짰다. 바로 그때, 누군가 뒤에서 호실댁을 껴안는 게 아닌가!
“사람 살려~.” 고함은 빗소리와 천둥소리에 잠겨 모깃소리가 됐다. 거친 남정네의 숨소리가 호실댁의 목덜미를 감쌌다. 막대기가 호실댁 엉덩이 속치마를 찢을 듯이 눌렀다. 손으로 아무리 더듬어도 은장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호실댁은 발버둥을 치고 남정네는 싸움소처럼 달려들었다. 어둠에 차츰 익숙해지자 겁탈하려는 사람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 뭉클! 아랫도리 속으로 뭣인가 뱃속을 꽉 채울 듯이 들어왔다.
바둥거리던 호실댁의 사지가 축 늘어졌다가 꿈틀거리더니 남정네가 아~ 긴 숨을 토할 때 호실댁은 자신도 모르게 두손의 손톱으로 남정네의 등짝을 파고 있었다. 남정네가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상엿집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난리 치던 하늘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서산에는 노을이 지고 마지막 햇살마저 상엿집 지붕에 한가닥 걸렸다. 멍하니 누워 있던 호실댁이 일어나 옷매무시를 고치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밖으로 나왔다.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에헴, 에헴.” 호실댁이 뒷걸음질 치다 털썩 주저앉았다. “이 사람, 류 대감 자부 아닌가?” 매부리코 영감이 놀란 척하며 입가에 의미 있는 웃음을 슬쩍 흘렸다. “문틈으로 큰 구경 했구먼, 에헴에헴.” 호실댁은 온몸에 경련이 일고 봉사가 된 양 눈앞이 캄캄해졌다.
매부리코 영감은 거간꾼이다. 집·논밭 사고팔 때, 소 거래 때뿐 아니라 신랑·각시 중매도 하며 구전을 뜯어먹고 사는 꾀돌이 늙은이다. “호실댁은 작년 단옷날, 사또로부터 효부상도 받았지 아마?” 호실댁이 사색이 돼 떨고 있는데 “걱정하지 말게, 내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닐세.” 매부리코의 수작은 뻔했다. 앞으로 호실댁을 바싹바싹 말려서 두고두고 돈을 우려낼 참이다.
호실댁이 은장도를 빼들고 자신의 가슴을 겨눠 내리꽂는데 “호실댁이 죽으면 안되지!” 매부리코 영감이 은장도를 든 호실댁 손목을 잡았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쪼그라든 늙은이가 기운이 솟는 스물두살 여인네를 쉽게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자살하려는 호실댁과 돈덩어리를 살리려는 매부리코 영감이 엉겨붙어 용을 쓰다가 미끄덩 손이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매부리코 영감 목울대에 은장도가 꽂혔다.
매부리코 영감 목에서 붉은 피가 용솟음치더니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졌다. 호실댁도 기절했다. 얼마나 지났나. 오싹한 한기에 호실댁이 눈을 떴더니 자신은 상엿집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상엿집을 나오자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꼬꾸라졌던 매부리코 영감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꾼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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