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슨 저울로 두 번씩 달다 보니 어느새 50년"
임실=김신영 기자
입력 : 2009.11.25 03:34 | 수정 : 2009.11.25 03:58
오래된 가게 쌀·소금 파는 전북 임실 삼성상회
하얀 포대에 담긴 곡식 정부 양곡가 적힌 칠판
국번 두자리일 때 만든 낡은 전화번호 표지판…
값싼 수입 소금 안쓰고 신안 천일염 갖다 팔아
어머니·동생 세상 뜨고 아내와 둘이서 점포지켜"아, 그라믄. 지금도 저울은 꼭 두 번을 달어서 팔어. 요것 봐. 날람날람, 날람날람…. 저울이 이래 날람거리는 게 너무 좋아. 요것이 정확히 재고 있단 뜻인게롱."
쌀과 소금을 파는 삼성상회 김해용(69)씨는 서른댓 살 먹었을 때 샀다는 일본제 낡은 대저울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누런 놋 저울대엔 '사간'(四�o)'육간'(六�o)'팔간'(八�o) 같은 옛 단위(1�o=1㎏)가 선명하다. 김씨는 추 받침이 꺼멓게 녹슨 이 저울을 "30여년 전 국산 저울 두 개 값 주고 샀다"고 했다.
"요즘이야 저울이 잘 나오지마는 그때는 국산 저울이 잘 망가졌응게롱. 전주에 있는 저울 상회에 사정사정하여서 간신히 구한 것이여. 그래도 이 저울 덕분에 동네 사람들 다 내 단골이 된 거여. 대저울에 한 번, 저어기 눈금 저울에 한 번, 두 번 달아서 팔거든. 어허허허."
“이 자리에서 쌀 장사 시작해 이 자리에서 늙었어, 이렇게잉….” 전북 임실 미곡상 ‘삼성상회’ 김해용씨가 열네 살 때부터 쌀을 팔았던 자리엔 세월 같은 흰 포대가 켜켜이 쌓여 있다. 가게 한가운데 걸린 ‘삼성’(三成)이란 간판은 김씨가 스물다섯살 되던 해에 직접 써서 걸었던 ‘작품’이다./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됫박 장사에서 '삼성상회'까지
전북 임실 강진면 갈담리에 있는 삼성상회로 들어서자 하얀 포대에 담겨 겹겹이 쌓인 곡식이 빼곡하다. 끄트머리가 부서진 낡은 저울, 벽에 걸린 '정부양곡가격표시' 칠판, 페인트가 다 벗겨진 시멘트벽이 이 가게의 긴긴 세월을 드러낸다. 115㎡(35평) 남짓한 가게 한가운데는 카운터 역할을 하는 3.3㎡(1평) 남짓한 방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방의 여닫이 문을 열자 어른 허리 높이만한 금고 두 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게에서 김씨의 살림집으로 통하게 한 나지막한 문 위엔 '43-1032'라고, 국번이 두 자리일 때 만든 전화번호 표지판이 걸려 있다.
열네 살 때 어머니와 '갈담시장' 바닥에 방석 펴놓고 시작한 쌀 장사가 어느새 55년. 1954년 장사를 시작할 때 "쌀 사셔요!"라고 외치던 소년은 이마에 깊은 주름 여럿 파인 노(老)상인이 됐다. 김씨는 쌀가게를 키워온 이야기를 시작하자 말이 빨라졌다. "이 자리에서 나가꼬, 이 자리에서 커가꼬, 이 자리에서 이렇게 늙었어. 어머니랑 바닥에 방석 깔고 하다가잉, 스무 살 때 점포를 냈고 지금 칠십 살잉게, 아휴, 몇 년을 했능가."
김씨는 "전쟁 끝난 직후 어머니와 '말밋머리'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쌀 한 말을 떼 오면 도매상이 수수료로 쌀을 조금 더 얹어주는데, 그 쌀을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면서 살림을 꾸려갔다는 뜻이다. 그렇게 장사를 한 지 6년 만인 1960년에 김씨는 지금의 자리에 있던 초가집을 허물고 작은 가게를 지었다.
옛날에 받은 양곡상 허가증들. 가게를 열던 첫해 흉년이 들었다. 쌀을 팔 사람도, 살 사람도 없으니 황망했다. 두 살 아래 동생이 가게 앞에 판매대를 놓고 밀가루로 만든 팥빵을 팔았다. 한 개에 5원짜리 팥빵은 흉년을 견디고 새 농사를 지어야 하는 배고픈 농사꾼들의 새참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초 시작된 섬진강 댐 공사는 세 모자(母子)가 번듯한 간판을 걸게 된 계기가 됐다. '섬진강 다목적 댐'은 지금은 유명 출사지가 된 운암댐의 정식 이름이다. 둑 길이 330m에 수문 24개가 있는 거대한 댐 공사를 위해 전국에서 인부들이 모여들었다. 세 모자가 이들을 대상으로 우동을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 말로 '대박'이 났다. 우동 장사로 큰돈을 번 세 식구는 음식 장사를 접고 쌀 가게를 시작했다.
"그땐 돈 있으면 무조건 쌀 장사였어. 한 말을 갖다 먹으믄, 농사일을 사흘 나흘 해줘야 할 정도로 쌀이 귀했거든. 그런데 임실에 큰 시장이 없었어. 청웅면 동계면 덕치면 운암면 산외면 다섯 개 면 사람들이 갈담에 와서 쌀을 사갔어. 쌀 장사랑 주장(막걸리 주조장)이 최고 부자였던 시절이었지."
어머니는 돈 주고받고, 김씨는 쌀 팔고, 동생은 조수 해가며 돈을 쓸어모으던 시절, 김씨는 지금도 가게 한가운데서 손님을 맞는 '삼성(三成)'이란 간판을 썼다.
"우리 서이(셋이) 이뤘으니께 '삼성'이지, 하하."
낡은 칠판에 적힌 정부양곡가격표. ■'아기 소금장수' 최고급 소금으로 승리하다
쌀 장사로 한창 재미를 보던 1965년 늦가을, 점포 앞에 나가서 거리를 둘러보다 지게 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가는 두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김장 준비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점포들은 소금 가게였다. 김장뿐이랴. 웬만한 집에서 된장 간장 고추장 담가 먹던 시절이었으니 소금이 쌀만큼 많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책보에다 돈을 똘똘 말아 허리에 감고 목포에 갔어. 버스 타고 광주에 가가꼬 다시 목포까지 갔지. 벌써 저녁이더라구. 소금 도매가게에 가서 봤더니 우리 동네 상인들이 벌써 소금을 딱 떼놨더라고. 소금을 보니께 별로 안 좋은 소금인 거야. 장사를 오래 헌 사람들이라 돈을 좀 더 냉굴라구(남기려고) 싼 소금을 샀나 보더라구. 그래서 내가 그랬지. 10원 더 줄 테니까 난 젤 좋은 걸루 달라구."
목포 상인들은 새파랗게 젊은 김씨가 비싼 소금을 달라고 하니 "엥, 애기가 소금 장수를 혀?"라며 껄껄 웃었단다. 소금 장사는 대성공이었다. 다른 가게 소금보다 뽀얗고 굵은 소금을 같은 값에 파니, 손님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간장 만들 소금이 부족해 소금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봄비로 소금 생산량이 줄어 중국에서 들여와야' 같은 기사가 종종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시절이었다.
'애기 장수'에게 좋은 소금을 주던 목포 도매상은 1980년대 초 문을 닫았다. 1960년대 초까지 국가 소유였던 염전이 60년대 중반 민영화되고 1970년대부터 수입소금이 늘어 소금 가격이 떨어져 많은 염전이 폐쇄된 탓이다. 요즘 김씨는 신안에서 소금을 떼다 판다. '최고급 소금' 원칙은 그대로다.
"해가 제일 긴 하지(夏至) 때 나오는 신안 천일염이 젤 좋다구 하잖아? 그때 가서 일 년 팔 소금을 사서 쟁여 놓구 파는 거지."
35년전 국산 두 개 값을 주고 샀다는 일본제 저울은 김씨의‘보물 1호’다. ■"우리는 움직일 때까지 장사를 해야 혀"
스물다섯 되던 1965년에 장가든 김씨는 아들 셋 딸 셋을 뒀다. 7년 전, 지금 서른일곱인 막내딸까지 전부 결혼시킨 김씨는 부인과 둘이서 점포 겸 집을 매일 지킨다. '삼성(三成)'의 주역 중 어머니는 15년 전, 동생은 지난해 세상을 뜨고 이제 김씨 혼자 남았다.
사라진 건 가족만이 아니다. 장날이면 다섯 개 면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해가 넘어가야 간신히 한산해지던 갈담 5일장(끝자리가 2·7일인 날에 선다)은 이제 '옛 모습을 간직한 독특한 볼거리' 취급을 받는다. 꾸역꾸역 몰려와 지게에 쌀을 싣고 가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 쇼핑몰이나 마트를 애용한다. 무엇보다 '쌀이 너무 많이 생산돼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라는 뉴스를 보면 쌀 한 됫박 사겠다고 허리 곱아가며 농사짓던 옛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젖는다. 대장간이던 삼성상회 건너편 가게는 택배 회사로 바뀌었다. 김씨는 고향 생각을 잊지 못하고 연락해오는 이들에게 쌀과 잡곡과 소금을 쉽게 보내줄 수 있어서 좋다며 껄껄 웃었다.
"난 몸 움직일 때까지 장사할 겨. 쉬는 놈들 얘기 들어보니께 장사에서 딱 손을 떼버리구 놀러다니기 시작하면은 '내일 뭘 하고 논댜'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구 하지 않어, 어허허허."
임실=김신영 기자
입력 : 2009.11.25 03:34 | 수정 : 2009.11.25 03:58
오래된 가게 쌀·소금 파는 전북 임실 삼성상회
하얀 포대에 담긴 곡식 정부 양곡가 적힌 칠판
국번 두자리일 때 만든 낡은 전화번호 표지판…
값싼 수입 소금 안쓰고 신안 천일염 갖다 팔아
어머니·동생 세상 뜨고 아내와 둘이서 점포지켜"아, 그라믄. 지금도 저울은 꼭 두 번을 달어서 팔어. 요것 봐. 날람날람, 날람날람…. 저울이 이래 날람거리는 게 너무 좋아. 요것이 정확히 재고 있단 뜻인게롱."
쌀과 소금을 파는 삼성상회 김해용(69)씨는 서른댓 살 먹었을 때 샀다는 일본제 낡은 대저울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누런 놋 저울대엔 '사간'(四�o)'육간'(六�o)'팔간'(八�o) 같은 옛 단위(1�o=1㎏)가 선명하다. 김씨는 추 받침이 꺼멓게 녹슨 이 저울을 "30여년 전 국산 저울 두 개 값 주고 샀다"고 했다.
"요즘이야 저울이 잘 나오지마는 그때는 국산 저울이 잘 망가졌응게롱. 전주에 있는 저울 상회에 사정사정하여서 간신히 구한 것이여. 그래도 이 저울 덕분에 동네 사람들 다 내 단골이 된 거여. 대저울에 한 번, 저어기 눈금 저울에 한 번, 두 번 달아서 팔거든. 어허허허."
“이 자리에서 쌀 장사 시작해 이 자리에서 늙었어, 이렇게잉….” 전북 임실 미곡상 ‘삼성상회’ 김해용씨가 열네 살 때부터 쌀을 팔았던 자리엔 세월 같은 흰 포대가 켜켜이 쌓여 있다. 가게 한가운데 걸린 ‘삼성’(三成)이란 간판은 김씨가 스물다섯살 되던 해에 직접 써서 걸었던 ‘작품’이다./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됫박 장사에서 '삼성상회'까지
전북 임실 강진면 갈담리에 있는 삼성상회로 들어서자 하얀 포대에 담겨 겹겹이 쌓인 곡식이 빼곡하다. 끄트머리가 부서진 낡은 저울, 벽에 걸린 '정부양곡가격표시' 칠판, 페인트가 다 벗겨진 시멘트벽이 이 가게의 긴긴 세월을 드러낸다. 115㎡(35평) 남짓한 가게 한가운데는 카운터 역할을 하는 3.3㎡(1평) 남짓한 방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방의 여닫이 문을 열자 어른 허리 높이만한 금고 두 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게에서 김씨의 살림집으로 통하게 한 나지막한 문 위엔 '43-1032'라고, 국번이 두 자리일 때 만든 전화번호 표지판이 걸려 있다.
열네 살 때 어머니와 '갈담시장' 바닥에 방석 펴놓고 시작한 쌀 장사가 어느새 55년. 1954년 장사를 시작할 때 "쌀 사셔요!"라고 외치던 소년은 이마에 깊은 주름 여럿 파인 노(老)상인이 됐다. 김씨는 쌀가게를 키워온 이야기를 시작하자 말이 빨라졌다. "이 자리에서 나가꼬, 이 자리에서 커가꼬, 이 자리에서 이렇게 늙었어. 어머니랑 바닥에 방석 깔고 하다가잉, 스무 살 때 점포를 냈고 지금 칠십 살잉게, 아휴, 몇 년을 했능가."
김씨는 "전쟁 끝난 직후 어머니와 '말밋머리'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쌀 한 말을 떼 오면 도매상이 수수료로 쌀을 조금 더 얹어주는데, 그 쌀을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면서 살림을 꾸려갔다는 뜻이다. 그렇게 장사를 한 지 6년 만인 1960년에 김씨는 지금의 자리에 있던 초가집을 허물고 작은 가게를 지었다.
옛날에 받은 양곡상 허가증들. 가게를 열던 첫해 흉년이 들었다. 쌀을 팔 사람도, 살 사람도 없으니 황망했다. 두 살 아래 동생이 가게 앞에 판매대를 놓고 밀가루로 만든 팥빵을 팔았다. 한 개에 5원짜리 팥빵은 흉년을 견디고 새 농사를 지어야 하는 배고픈 농사꾼들의 새참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초 시작된 섬진강 댐 공사는 세 모자(母子)가 번듯한 간판을 걸게 된 계기가 됐다. '섬진강 다목적 댐'은 지금은 유명 출사지가 된 운암댐의 정식 이름이다. 둑 길이 330m에 수문 24개가 있는 거대한 댐 공사를 위해 전국에서 인부들이 모여들었다. 세 모자가 이들을 대상으로 우동을 팔기 시작했는데, 지금 말로 '대박'이 났다. 우동 장사로 큰돈을 번 세 식구는 음식 장사를 접고 쌀 가게를 시작했다.
"그땐 돈 있으면 무조건 쌀 장사였어. 한 말을 갖다 먹으믄, 농사일을 사흘 나흘 해줘야 할 정도로 쌀이 귀했거든. 그런데 임실에 큰 시장이 없었어. 청웅면 동계면 덕치면 운암면 산외면 다섯 개 면 사람들이 갈담에 와서 쌀을 사갔어. 쌀 장사랑 주장(막걸리 주조장)이 최고 부자였던 시절이었지."
어머니는 돈 주고받고, 김씨는 쌀 팔고, 동생은 조수 해가며 돈을 쓸어모으던 시절, 김씨는 지금도 가게 한가운데서 손님을 맞는 '삼성(三成)'이란 간판을 썼다.
"우리 서이(셋이) 이뤘으니께 '삼성'이지, 하하."
낡은 칠판에 적힌 정부양곡가격표. ■'아기 소금장수' 최고급 소금으로 승리하다
쌀 장사로 한창 재미를 보던 1965년 늦가을, 점포 앞에 나가서 거리를 둘러보다 지게 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가는 두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김장 준비하는 사람들이 찾아가는 점포들은 소금 가게였다. 김장뿐이랴. 웬만한 집에서 된장 간장 고추장 담가 먹던 시절이었으니 소금이 쌀만큼 많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책보에다 돈을 똘똘 말아 허리에 감고 목포에 갔어. 버스 타고 광주에 가가꼬 다시 목포까지 갔지. 벌써 저녁이더라구. 소금 도매가게에 가서 봤더니 우리 동네 상인들이 벌써 소금을 딱 떼놨더라고. 소금을 보니께 별로 안 좋은 소금인 거야. 장사를 오래 헌 사람들이라 돈을 좀 더 냉굴라구(남기려고) 싼 소금을 샀나 보더라구. 그래서 내가 그랬지. 10원 더 줄 테니까 난 젤 좋은 걸루 달라구."
목포 상인들은 새파랗게 젊은 김씨가 비싼 소금을 달라고 하니 "엥, 애기가 소금 장수를 혀?"라며 껄껄 웃었단다. 소금 장사는 대성공이었다. 다른 가게 소금보다 뽀얗고 굵은 소금을 같은 값에 파니, 손님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간장 만들 소금이 부족해 소금을 수입하기로 결정했다' '봄비로 소금 생산량이 줄어 중국에서 들여와야' 같은 기사가 종종 신문 지면을 장식하던 시절이었다.
'애기 장수'에게 좋은 소금을 주던 목포 도매상은 1980년대 초 문을 닫았다. 1960년대 초까지 국가 소유였던 염전이 60년대 중반 민영화되고 1970년대부터 수입소금이 늘어 소금 가격이 떨어져 많은 염전이 폐쇄된 탓이다. 요즘 김씨는 신안에서 소금을 떼다 판다. '최고급 소금' 원칙은 그대로다.
"해가 제일 긴 하지(夏至) 때 나오는 신안 천일염이 젤 좋다구 하잖아? 그때 가서 일 년 팔 소금을 사서 쟁여 놓구 파는 거지."
35년전 국산 두 개 값을 주고 샀다는 일본제 저울은 김씨의‘보물 1호’다. ■"우리는 움직일 때까지 장사를 해야 혀"
스물다섯 되던 1965년에 장가든 김씨는 아들 셋 딸 셋을 뒀다. 7년 전, 지금 서른일곱인 막내딸까지 전부 결혼시킨 김씨는 부인과 둘이서 점포 겸 집을 매일 지킨다. '삼성(三成)'의 주역 중 어머니는 15년 전, 동생은 지난해 세상을 뜨고 이제 김씨 혼자 남았다.
사라진 건 가족만이 아니다. 장날이면 다섯 개 면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해가 넘어가야 간신히 한산해지던 갈담 5일장(끝자리가 2·7일인 날에 선다)은 이제 '옛 모습을 간직한 독특한 볼거리' 취급을 받는다. 꾸역꾸역 몰려와 지게에 쌀을 싣고 가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젊은 사람들은 인터넷 쇼핑몰이나 마트를 애용한다. 무엇보다 '쌀이 너무 많이 생산돼서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라는 뉴스를 보면 쌀 한 됫박 사겠다고 허리 곱아가며 농사짓던 옛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젖는다. 대장간이던 삼성상회 건너편 가게는 택배 회사로 바뀌었다. 김씨는 고향 생각을 잊지 못하고 연락해오는 이들에게 쌀과 잡곡과 소금을 쉽게 보내줄 수 있어서 좋다며 껄껄 웃었다.
"난 몸 움직일 때까지 장사할 겨. 쉬는 놈들 얘기 들어보니께 장사에서 딱 손을 떼버리구 놀러다니기 시작하면은 '내일 뭘 하고 논댜'하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구 하지 않어, 어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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