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행료 받으려 열차 막고, 화약 속 촛불 켜고 잠들어
이리역 화약열차 폭발사고 현장. 열차가 섰던 자리엔 깊이 10m, 직경 30m의 웅덩이가 패였고 주변 건물은 쑥대밭이 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7년 11월 11일자 한국일보 1면. 이리역 폭발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 전북 이리역 4번 입환선에서 인천을 출발해 광주로 가기 위해 대기 중이던 열차 1량이 폭발했다.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900상자(22톤), 초산암모니아 200개(5톤), 초육폭약 100상자(2톤), 도화선 50개(1톤) 등 합계 1,250상자 30톤에 달하는 화약류가 실려 있었다. 이 폭발로 이리역 구내는 깊이 10m, 직경 30m에 달하는 큰 웅덩이가 패였고, 반경 2㎞ 건물까지 파괴됐다.
당시 전라북도가 집계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59명,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으로 총 1,402명에 달한다. 이재민 수만도 1,674세대 7,873명이나 됐다.
대규모 피해를 가져온 이리역 폭발사고 원인은 황당하다.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화약운송 열차가 이리역에 도착한 것은 사고 전날인 10일 밤 10시 31분이었다. 원래 화약류 등 위험물은 역을 곧바로 통과시켜야 하는데 역무원들이 일종의 뇌물인 급행료 지급 문제로 시비가 붙어 다음날 밤까지 열차를 붙들어뒀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화약열차 호송원이었던 신무일은 홧김에 술을 마신 뒤 열차 화물칸에 들어가 촛불을 켜놓고 잠들었다. 불이 붙은 걸 알고 깨어난 신씨는 진화가 여의치 않자 달아났고 불은 화약상자에 옮겨붙어 연쇄 폭발했다.
피해지역 인근 부대 군인들과 시민들이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1977년 11월 12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12일 오후 폐허가 된 이리시 곳곳에 이재민을 위한 취사장이 마련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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