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 김찬삼] '세계로 향해 열린 창', 김찬삼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선구자 김찬삼 별세…
2003년 7월 2일, 신문 등 언론에서는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선구자 김찬삼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부음(訃音)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나타냈는데, 특히 40~50대의 중년 남자들은 세상을 달리한 한 인물과 관련된 여러 추억들을 떠올리며 아련한 회상(回想)에 잠기곤 했다.
1960~1970년대 젊은이의 우상, 김찬삼
김찬삼(金燦三, 1926~2003)은 평생 동안 지구 32바퀴의 거리를 여행한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개척자였다. 1960~197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지금의 기성세대에게, 그는 유명 연예인 못지않게 높은 인기를 끌던 우상이었으며,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기도 했다.
당시 김찬삼이 쓴 여행기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고등학생이 있는 집안에는 으레 <세계의 나그네>와 같은 그의 여행기 한두 권 정도는 책장에 꽂혀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집안 친척이나 아버지 친구 중에 책 외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사람들 눈길이 자주 닿는 대청마루 한쪽에 10권짜리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 한 질(帙)이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당시 중고생들은 방학이 되면 김찬삼의 여행기를 찾아 친척집 등을 분주하게 쏘다니기도 했다. 이처럼 1960~1970년대의 청소년들은 흥미진진한 세계 일주여행을 꿈꾸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김찬삼의 여행기와 관련된 사연 한두 개씩은 만들며 성장하였던 것이다.
“탐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10권짜리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을 읽은 뒤부터였지요. 어린 시절, 저는 그 책들이 다 닳도록 읽으면서 탐험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히말라야 8,000m급 거봉 14좌(座) 완등 등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산악인 박영석(朴英碩)이 생전에 남긴 말이었다. 1963년생인 그는 김찬삼의 여행기로부터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김찬삼의 여행기는 1960~197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지금의 기성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촌부(村夫)와 같은 소박한 인상과 검게 그을린 피부. 구수한 입담과 환하게 소리 없이 웃는 미소. ‘C.S KIM KOREA’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키슬링 배낭과 투박한 모양의 낡은 오토바이. 그리고 환등기 옆에 서서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열성적으로 강연하던 김찬삼의 모습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여행가 김찬삼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의 개인적인 삶은 어떤 것이었으며, 무슨 이유에서 목숨을 건 험난한 여행에 나섰던 것이었을까. 김찬삼은 세계여행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자 하였으며, 당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기 위해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그리고 김찬삼의 40년에 걸친 세계여행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부친 손에 이끌려 여섯살 때부터 등산 시작해
김찬삼은 1926년 6월 5일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에서 태어났다. 신천은 이웃한 재령군(載寧郡)과 더불어 황해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이다. 비옥한 농토가 넓게 펼쳐져 있고, 관개수리 사업이 잘 되어있어 일찍부터 기업적인 벼농사가 발달하였는데, 널리 알려진 유명한 벌판으로는 ‘어우리벌’, ‘장재이벌’ 등이 있다.
김찬삼의 아버지는 대법관을 지낸 법조인 김세완(金世玩, 1894~1973)이었다. 그는 1925년 판검사 특별고시에 합격하면서 법조계 생활을 시작했고, 1959년에 대법원 대법관에 이르렀다. 이후 국민대 학장과 성곡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는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선정한 <친일 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사법부문에 포함되기도 했다.
김찬삼의 아버지 김세완은 등산을 무척 좋아했다. 이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특히 경무대 신년하례식 사건은 오늘날에도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
1955년 새해, 대법관들이 이승만대통령에게 신년하례(新年賀禮)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함께 모여 경무대로 가기로 하였는데, 유독 대법관 김세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연락해 보니 일요일에는 언제나 등산을 가곤 했지만, 신년하례 때문에 오늘은 새벽 4시경에 등산복 차림으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대법관들은 할 수 없이 경무대로 향했다. 경무대 비서실에 도착해 하례식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급하게 북쪽 경비초소의 비상전화 벨이 울렸다. 등산복 차림의 노인 하나가 대통령에게 인사드리기로 했다면서 막무가내로 북문을 통과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세완은 일찍 북한산 등반을 마치고 경무대를 향해 내려오는 길이었다.
결국 그날 김세완은 남루한 등산복 차림으로 경무대 신년하례식에 참석하였다. 이처럼 김세완은 등산을 좋아해서 일요일마다 서울 인근의 산을 찾았는데, 훗날 자신이 등산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스무 살 때에 법원 서기로 취직해 보니 여기저기서 유혹이 많았다. 어느 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문득 이렇게 화류계에 드나들며 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등산을 하기 시작하였고 건강에 자신이 생기자 판사 시험을 공부해서 결국 합격했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김세완은 주위 사람들에게 등산을 적극 권유했으며 주말마다 집안 아이들과 함께 등산을 가곤 했다. 여섯살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시작하게 된 등산이, 훗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여행가 김찬삼을 탄생케 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김세완은 1973년 새벽 산책에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평소 등산을 좋아한 탓에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1903~1982)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현재 김세완의 묘비에는 노산이 지은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이은상은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으로, 1960~1970년대 산악계의 정신적인 지주와 같은 인물이었다.
유족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김찬삼과 김세완 두 사람은 1972년 10월 초순에 함께 설악산 등반을 했다고 한다. 당시 김찬삼은 46세였으며 김세완은 78세의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백담사를 거쳐 봉정암, 대청봉, 희운각, 양폭폭포, 비선대로 이어지는 코스를 따라 걸었는데, 이것이 평생 같이 해온 두 사람의 마지막 산행이었다고 한다.
김찬삼은 어려서부터 등산과 여행 등을 좋아했다. 중학교 때 인천에서 살 때에는 자주 부둣가에 나가 외국 선박을 보면서 마도로스가 되어 오대양을 누비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또한 김찬삼은 수영 실력이 몹시 뛰어났다. 9세 때에 아버지를 따라 한강을 헤엄쳐 건널 정도였으며, 1946년 황해도 신천에서 월남할 때에는 형에게 선물로 받은 <마르코 폴로 여행기>를 놓고 온 것이 떠올라 다시 예성강을 헤엄쳐 건너려 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등산과 여행을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건 험난한 세계여행의 길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김찬삼이 세계여행을 꿈꾸고 실천하기까지에는,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형과 관련된 아픈 사연이 있다.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또 아프리카를 넘으리라’
김찬삼이 15세 때인 1941년의 일이었다. 다섯 살 위의 형 찬이(燦二)가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하던 중, 충청도의 어느 고개에서 사고를 만나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형은 재령군에 있는 사립 중학교인 명신중학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김찬삼은 형을 몹시 존경하고 따랐던 터라 그 충격이 여간 크지 않았다.
얼마 후, 김찬삼이 형의 유품을 정리할 때였다. 일기장을 조사하던 중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했다.
“오늘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달리지만, 나의 꿈이 실현되는 십 년이나 십오 년 후에는 남미의 안데스 고원을 헤매고 또 아프리카를 넘으리라.”
김찬삼은 형이 일기장 마지막 날에 남긴 그 기록을 쉽게 잊을 수 없었다. 그 후 김찬삼은 형의 꿈을 대신 이루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세계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마르코 폴로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왔다면, 언젠가 나는 동방에서 서방으로 갈 것이다” 라고 스스로 다짐하기도 했다.
형이 세상을 떠난 뒤, 김찬삼은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으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자주 읽었던 것이다. 중학생 시절인 1939년에 형으로부터 선물로 받았던 책이었다. 김찬삼은 이때부터 등산과 수영 등을 더더욱 열심히 하였다.
김찬삼은 1946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였으며, 어릴 때부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지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1950년에 지리학과 3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원래 졸업식이 7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50년 5월에 졸업한 것으로 기록된 자료들이 많다).
김찬삼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동안 지리 교사를 하였다. 1950년부터 3년여 동안 숙명여고에서 지리를 가르쳤으며, 1953년부터 1958년까지 5년여 동안 인천고등학교에서 지리교사를 지냈다. 이때 그는 전국을 답사하는 등 풍부한 여행경험을 쌓았다.
미국에서 1년 동안 세계여행 준비해
1958년 9월 18일, 김찬삼은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갔다. 세계여행을 하려면 미국에 있으면서 준비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대학원 지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비행장의 운전사와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계여행을 위한 여행경비를 모았다. 그리고 외국의 신문사 등 유력기관에 서신을 보내 각종 최신 정보를 얻기도 했다.
세계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찬삼이 가장 힘들었던 문제는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형의 사망으로 김찬삼은 집안의 3대 독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찬삼은 자신의 간곡한 뜻을 담아 서울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올렸다. 형과의 약속 등을 거론하면서 세계여행에 나서는 자신에게 허락해 주실 것을 정식으로 부탁드렸다. 얼마 후 아버지로부터 ‘세계여행을 허락한다’는 편지가 왔고, 결국 세계여행에 나서게 되었다(당시 아버지로부터 허락을 받았던 편지가 지금도 김찬삼의 유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상향’ 알래스카를 첫 행선지로 삼아
1959년 8월 7일, 김찬삼은 시애틀에서 알래스카로 가는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마침내 제1차 세계일주 여행의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김찬삼의 첫 행선지는 북미의 알래스카였다. ‘이상향’(理想鄕)이라 표현할 만큼, 김찬삼이 어렸을 때부터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제1차 세계일주 여행은 시애틀을 출발해서 북미(알래스카와 미국 본토)와, 중미(멕시코,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파나마 등), 남미(콜럼비아, 페루,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 아프리카(우간다, 수단, 이집트 등), 중동(요르단, 시리아, 터키 등), 유럽(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아시아(인도, 홍콩 등) 등지를 여행하는 것으로 진행되었으며, 일본을 거쳐 1961년 6월 22일에 우리나라에 도착하였다. 혼자의 몸으로 3년 가까이 59개국을 방문하면서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도는 먼 거리를 여행했던 것이다.
김찬삼이 시애틀에서 알래스카로 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다면 1년 11월이 소요된 것이었으며, 미국으로 건너간 1958년 9월부터 계산한다면 2년 10개월이나 걸린 셈이었다. 제1차 세계일주 여행을 마쳤을 때, 그의 나이 35세였다.
김찬삼의 제1차 세계일주 여행은, 우리나라 해외여행사에 길이 기록될 기념비적인 쾌거였다. 김찬삼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짧은 기간 동안에 이처럼 많은 나라를 여행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금방 사람들로부터 큰 관심과 찬사를 이끌어냈다.
1962년 1월 10일, 김찬삼은 마침내 자신의 첫 번째 여행기 <세계일주 무전여행기>(世界一周 無錢旅行記)를 출간하였다. 출판사는 인문서적을 주로 출간하던 어문각(語文閣)이었으며, 모두 360여 쪽에 정가는 1,200환이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이 <세계일주 무전여행기>에는 100컷이 넘는 많은 양의 사진과 각종 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책의 맨 앞부분에 실린 사진이다. 이 사진은 100여 컷 사진 중에서 유일한 컬러사진이기도 했다.
그 컬러 사진은 김찬삼이 페루의 안데스 고원에서 여인, 말과 함께 찍은 촬영한 것이었다. 안데스 고원은 일찍 세상을 떠난 형이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 아니었던가. 결국 김찬삼은 자신의 첫 번째 여행기를 형의 영전에 바치는 뜻에서, 안데스 고원에서 촬영한 사진을 맨 앞에 수록했던 것이다. 그 사진이 수록된 자신의 저서를 받아든 김찬삼의 감회는 무엇이라 형언하기 힘들었으리라.
여행기 <세계일주 무전여행기>는 곧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발간 15일 만에 3판을 발행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더니 그해 10월 15일까지 모두 8판을 발행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이후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장안 제일의 화제’로 떠올랐으며,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사회 저명인사로 발돋움하였다.
김찬삼은 1963년 새해에 들어서서 제2차 세계 일주여행을 감행했다. 제2차 세계 일주여행은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일대를 주된 여행지로 하였으며, 1963년 1월부터 1964년 8월까지 모두 1년 7개월 동안이나 소요되었다.
슈바이처와 15일간 같이 지내다
이 세계 일주여행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김찬삼이 1963년 11월 아프리카를 횡단하던 중 가봉 공화국에 이르렀을 때 당시 91세의 슈바이처 박사를 방문했던 일이었다. 독일 출신인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 박사는 1913년 아프리카의 가봉 공화국 람바레네의 밀림에 병원을 설립했으며, 원주민에 대한 의료활동을 실시하여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때문에 슈바이처 박사는 1952년 40년 가까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와 의료봉사를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 후 핵실험 반대 등 세계 평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얼마 전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딸 레나 슈바이처 밀러 여사가 람바레네의 병원을 운영해 왔으나 2008년 2월 90세에 별세하고 말았다). 1963년 당시 김찬삼은 람바레네에서 15일 동안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생활했다고 한다.
<끝없는 여로>와 <세계의 나그네>
<끝없는 여로>는 김찬삼의 제2차 세계 일주여행의 기록을 담은 여행기이다. 1965년 5월에 출간된 이 책에는 슈바이처 박사와 만났던 당시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우리나라 여행객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한동안 같이 생활했다는 사실이 당시 한국의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북돋아주었던 것이다.
김찬삼의 제3차 세계 일주여행은 1969년 12월부터 1970년 12월까지 12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주로 동남아와 남태평양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1972년 4월에 이때의 여행기 <세계의 나그네>가 출간되었다.
김찬삼은 3번에 걸친 세계 일주여행을 마친 뒤, 그동안 가보지 못했거나 미진했던 지역을 다시 방문하는 테마 해외여행에 치중했다. 모두 17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이때 방문한 주요 지역으로는 아마존 강과 북극권, 갈라파고스 제도 등이 있다.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쉽게 가볼 수 없는 험준한 오지들인 것이다.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199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특히 1992년 3월부터 중국, 인도, 중앙아시아 지역을 여행했는데, 안타깝게 이때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불운을 당했다. 1992년 6월 인도 여행 중에 교통사고로 머리와 갈비뼈를 크게 다쳤으며, 9월에는 터키 앙카라성에서 성벽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그 후 병세가 점차 악화되어, 1994년부터 언어장애가 오고 알츠하이머가 발병하더니 2003년 7월 2일 77세의 나이로 그만 타계하고 말았다. 기이하게도, 김찬삼의 선친과 형 그리고 본인 자신도 ‘길에서 일어난 사고’가 원인이 되어 세상을 떠난 셈이었다.
당시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김찬삼은 평생 동안 3번의 세계 일주여행을 포함해서 모두 20번의 세계여행을 했다. 그동안 160여 개국을 여행했으며, 1,000개가 넘는 많은 도시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를 거리로 환산하면 지구를 32바퀴나 돈 것과 같으며 시간으로 치면 여행하는 데에만 꼬박 14년이나 걸린 것이라고 한다.
당시 김찬삼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김찬삼의 여행기는, 이어령(李御寧)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안병욱(安秉煜)의 <진리의 샘터에서>, 김형석(金亨錫)의 <오늘을 사는 지혜> 등과 더불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오랫동안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81년 11월 삼중당(三中堂)에서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 10권을 출간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여행문학의 기념비적인 저서라 할 수 있다. 당시는 대형 전집물이 크게 각광을 받고 있었다. 김찬삼은 1973년에 3권짜리 <김찬삼 세계여행>을 펴낸 적이 있었으나, 당시의 독서 풍토에 따라 자신의 여행기를 집대성해서 10권짜리 전집으로 출간하였던 것이다. <김찬삼의 세계여행>은, 1980년대 후반까지 <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등과 더불어 가장 많이 팔리던 전집의 하나였는데, 당시에 10만 질, 100만 권이 팔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왜 그토록 김찬삼의 여행기에 열광하였던 것일까. 당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의 여행기에서 무엇을 얻고자 그토록 빠져들었던 것일까.
김찬삼 여행기는 ‘세계로 향한 창’
196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아픈 상처 역시 아물지 않아서, 사회적으로 피폐화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몹시 궁핍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고작 200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254달러가 되었으며, 1,000달러를 넘어선 것은 1977년의 일이었다.
이처럼 모든 게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라, 당시 사람들에게 해외여행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국내여행 역시 쉽지 않아서 은행원이나 교사, 군인 등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만이 온양 온천이나 설악산 설악동 등지로 신혼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남산 팔각정에 오르는 것으로 신혼여행을 대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김찬삼이 혼자의 몸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궁핍하던 1960~1970년대, 김찬삼의 세계 일주여행은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 그리고 용기를 가져다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끝없는 여로> 등 김찬삼의 여행기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 풍습 등을 알게 되었으며,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을 키워나갔다. 다시 말하면 김찬삼의 여행기는 당시 한국인들에게 ‘세계로 향해 열린 창’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청소년들은 그의 여행기를 통해 ‘나도 세계 곳곳을 마음껏 누비고 싶다’는 강렬한 꿈과 열망에 젖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찬삼은 당시의 젊은이들의 살아 있는 우상이었으며 정신적인 스승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김찬삼의 세계 일주여행은, 새롭게 도약하려는 당시 대한민국의 사회 분위기에 맞아 떨어져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다시 말하면 피식민지 지배와 6·25 전쟁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1960~1970년대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혼자의 몸으로 외로움을 무릅쓰고 각종 질병과 풍토병을 이겨가며 여행하는 김찬삼의 모습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 불굴의 의지 등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 김찬삼의 세계 일주여행은, 오늘날과 같은 이른바 자기완성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다. 김찬삼의 여행은, 그 시작은 자기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처럼 온 국민의 열망을 등에 진 국가적인 행위로까지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은상과 <한국의 여행> 감수해
김찬삼은 신문과 방송 그리고 각종 강연을 통해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당시 그는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 1903~1977), 한글학자 한갑수(韓甲洙, 1913~2004) 등과 함께 텔레비전과 라디오 교양 프로그램에서 인기가 높았던 단골 출연자였다.
특히 김찬삼의 강연은 유명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슬라이드 사진을 직접 보여주면서 열띤 목소리로 강연하곤 해서, 강연장 안은 감탄사를 쏟아내는 젊은이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그 강연장의 뜨거운 열기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편 김찬삼은 우리 국토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1973년 삼중당에서 8권짜리 <한국의 여행>을 발간할 때에 당시 산악계의 원로였던 이은상과 감수(監修)를 맡기도 하였다. 이처럼 ‘해외여행의 선구자’ 김찬삼은, 당시 어느 전문가 못지않게 우리나라 산과 강에 대해 깊은 애정과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는 신이 준 최상의 의사소통 방법”
<세계의 나그네> 등의 여행기를 읽노라면, 김찬삼은 인간과 사물에 대해 깊은 애정과 신뢰를 갖고 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매사에 긍정적이면서 적극적인 사고를 갖고 있어, 처음 만난 사람과도 허물없이 지내곤 하였다.
김찬삼은 천성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 때문에 그의 여행기에는 현지인의 집에서 며칠씩 머물거나 여행길에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한동안 같이 여행을 하는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같은 ‘인간적인 친화력’이야말로 김찬삼 기행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김찬삼은 세계 일주여행을 떠날 때마다 한동안 ‘미소 짓기 훈련’을 했다고 한다. 여행 중에 언어와 문화 등의 차이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곤란한 문제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로 외국 사람들을 대하는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여행의 만병통치는 웃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김찬삼의 미소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는 가식(假飾)이나 일시적인 방편(方便)이 결코 아니었다. 김찬삼은 자신이 소중하게 아끼던 오토바이와 자동차에 각각 ‘우정 1호’, ‘우정 2호’라 이름을 붙였듯이,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신뢰를 무척 중시했던 것이다. 그는 가족 등 주위 사람들에게 “미소는 신이 준 최상의 의사소통 방법”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세상과 인간을 향해 열린 마음’.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해외여행의 개척자 김찬삼이, 평생 동안 지구 32바퀴나 되는 먼 여행길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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