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기행] 6형제 우애경영, 50년 가까이 국내 바둑판 시장 정상 지켜
남양주 육형제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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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개 계란 꾸러미가 밑천의 전부였다. 엄했던 아버지 몰래 고향을 떠난 큰 아들에게 쥐어준 어머니의 마지막 노잣돈이었다. “농사꾼으로 살긴 싫다”며 무작정 서울로 향하면서 시작된 15세 소년의 타향살이는 주어진 운명처럼 보였다. “그 때만해도 다들 쌀밥 먹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워낙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큰 형의 고향 탈출도 이런 생활고에서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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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육형제바둑 본사에서 만난 신추식(57) 본부장은 54년 전, 본가인 전남 곡성에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감행한 큰 형의 가출 배경을 이렇게 복기했다. 신 본부장의 큰 형은 육형제바둑의 창업자인 신완식(68) 전 대표로, 5명의 동생들과 함께 반세기 동안 국내 바둑판 시장을 이끌어왔다. 이 가운데 다섯 째인 신 본부장은 현재 육형제바둑의 안살림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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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형제바둑은 현재 80% 이상의 국내 바둑판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란 타이틀 보단 50년 넘게 이어온 ‘가족경영’으로 더 유명하다. 한우물 경영의 성공 비결에 대해 신 본부장에게 묻자,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다른 분들도 그 질문부터 합니다. 근데, 다른 건 없어요. 단지, 저희 형제들이 좀 끈끈하다고나 할까요. 일을 하면서 의견 차이는 있었지만 아무리 큰일이 닥쳤을 때도 형제들끼리 사이가 벌어진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롱런 중인 육형제바둑의 ‘우애경영’을 이해하기 위해선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한국 바둑계 대부, 고 조남철 선생과의 만남으로 바둑계와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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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형제바둑을 잉태시킨 신완식 전 대표와 바둑판의 인연은 우연에서 비롯됐다. 서울로 상경한 신 전 대표가 목공소를 운영했던 친척집에 머물면서 소개 받은 고 조남철(2006년 작고) 선생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조남철 선생은 1957~65년 국수전 9연패 등의 숱한 기록들을 쏟아냈고 1954년엔 한국기원까지 창설한 한국 바둑계 거목이다. 신 전 대표는 조남철 선생의 소개로 서울 명동의 송원기원에서 잡무를 보게 됐고 바둑판과 가까워졌다. 바둑판을 눈 여겨 본 당시 신 전 대표는 목공소에서 약 1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바둑판 제작을 연구했다. 그 사이, 시골에서 둘째(신명식(66))가 올라왔고 1975년 급기야 ‘중앙바둑’(육형제바둑의 전신)이란 상호 등록과 함께 본격적인 바둑판 제작에 착수했다. 첫째와 둘째가 서울에 자리를 잡자, 남은 동생들도 고구마줄기처럼 잇따라 상경하면서 바둑판 제작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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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과 ‘신용’을 제품에 녹여낸 육형제바둑의 바둑판은 때마침 불었던 바둑 열풍과 함께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그 때는 지금처럼 여가 시간을 즐길만한 마땅한 오락기구도 없다 보니, 바둑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던 것 같았어요 전국 어느 기원에서나 육형제바둑의 바둑판을 사기 위해선 줄을 서야 했습니다. 밤낮으로 물건을 찍어내도 물량이 모자랐어요.” 신 본부장은 흐뭇했던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허공에 눈을 돌리면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불에 타고 물에 잠기고…전재산 날렸어도 외상장부 먼저 챙기며 고객과의 신용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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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위기도 찾아왔다. 수요가 늘어나면서 육형제바둑의 입지가 굳어갔던 1987년, 공장으로 운영됐던 서울 신내동 배 밭의 비닐하우스에 화재가 발생한 것. 바둑판의 생명인 원목을 포함해 전 재산은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허탈했지만 다시 일어서야 했고, 형제들은 그 동안 모았던 통장들을 내놓으면서 재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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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은 계속됐다. 화마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다시 일어선 1998년, 이번엔 수해가 덮쳤다. 현재 본사로 터전을 잡은 남양주시 진천읍 인근의 광릉내 개천 상류의 골프장 둑이 터지면서 공장이 한 순간에 물에 잠겼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저희가 가진 재산이 나무인데 불에 타고 물에 잠기니까,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더라고요.” 신 본부장은 암담했던 21년 전 악몽에 긴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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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형님들은 그 와중에도 바둑판에 쓸만한 나무를 먼저 살펴보는 게 아니라 고객들의 외상 장부 먼저 챙겼습니다. 고객들과의 신용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된다고요.” 신 본부장은 덕분에 육형제바둑이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렸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주변의 도움으로 오늘날 국내 바둑판 시장에서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육형제들은 어려움이 닥칠수록 더 똘똘 뭉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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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 육형제 가운데 3명은 현직에서 은퇴하고 넷째부터 막내가 주로 회사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신 본부장은 희망도 밝다고 했다. “3명의 형님이 물러난 대신, 4명의 조카들이 기특하게도 회사에 자발적으로 들어왔어요. 이제 조카들이 가족경영에 동참하겠다네요. 한시름 덜었어요. 육형제바둑의 기운을 이어갈 수 있게 됐으니까요.” 조카들까지 합류한 육형제바둑의 반상(盤上) 행마는 미래 진행형이다.
글ㆍ사진=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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