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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오라이!” 외치며 배치기로 승객들 욱여넣던 또순이 차장에게 감사를!

by 까망잉크 2022. 2. 5.

“오라이!” 외치며 배치기로 승객들 욱여넣던 또순이 차장에게 감사를!

[아무튼, 주말]
[김동규의 나는 꼰대로소이다]
지옥철·푸시맨보다 치열했던 1970년대 시내버스 통학기

 

서울대 신경외과학 명예교수·'마음 놓고 뀌는 방귀' 저자
입력 2021.08.21 03:00
 
 
코흘리개 꼬마가 골목에서 놀다가 무슨 일이 있어 신작로에 나가면 시내버스가 시원스럽게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고 느릿해서 맥이 빠져 보이는 전차로 부모님과 나들이 갔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고등학교 때도 걸어서 통학했는데 대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버스를 이용했다. 사정도 모르고 버스로 등교하는 친구를 은근히 부러워했는데 막상 차를 타고 다니자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대학 입학 후 이사한 집이 서울 서대문구의 끝자락 역촌동(지금은 은평구에 속해 있음)이고, 학교는 시내 창경궁 근처에 있어 오랜 시간 버스에 시달려야 할 뿐만 아니라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일러스트=안병현

오전 9시 수업 시간에 맞추려면 늦어도 7시 30분 전에 버스를 타야 하는데, 한창 사람들이 몰리는 러시아워(rush hour)이기 때문에 버스에 오르는 과정부터가 전쟁이었다. 멀리서 비포장도로에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오는 버스가 시야에 들어오면 정거장에서 목을 길게 빼고 버스 오기를 기다리던 남녀노소가 먼저 타려고 서로 뒤엉켜 버스 문으로 돌진했다.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만원이지만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간신히 버스 문턱에 발은 걸쳤는데 버스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탕탕!’ 소리와 함께 차장이 힘껏 ‘오라이!’를 외쳤다. 여차장은 두 팔을 벌려 문의 양쪽에 달린 손잡이를 움켜쥔 채 문에 매달려 있는 승객을 가슴으로 안고 연신 안으로 들어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함소리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누가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안 들어가나” 하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서서히 버스가 움직이고 다급해진 여차장은 배치기로 승객을 안으로 욱여넣었다. 곡예하듯 매달려 가던 차장은 용케도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걸어 잠갔다. 지금은 절대 금기인 개문 발차가 당시에는 일상이었다. 정신이 사나운 중에도 빠짐없이 요금을 받아내는 여차장의 용의주도함 역시 대단했다.

어쨌든 탔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 찰나 운전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안쪽 깊숙이 들어가기보다 내릴 때를 대비해서 문 가까운 곳에 있으려는 사람들이 급정거에 한꺼번에 몸이 버스 뒤쪽으로 쏠렸다. 사람을 짐짝 다루듯 버스 뒤부터 차곡차곡 쌓는 과정이었다.

간신히 몸을 실었는데 손에 들린 가방이 사람 틈에 끼여 움직이지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건 차치하고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는데 여름에는 더운 건 말할 것도 없고 땀 냄새, 화장품 냄새, 찌든 담배 냄새 등에 40~50분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고물 버스가 찐빵처럼 부풀어 ‘뻥!’ 하고 터지지 않는 게 참 다행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

녹번동, 홍은동을 지나 가파른 무악재를 힘겹게 넘어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 로터리로 접어들어서 광화문 네거리에 가까워지면 내릴 걱정에 다시 한번 심호흡과 함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연거푸 “내려요, 내려요”를 큰소리로 외치며 예의고 체면이고 없이 가방을 부둥켜안고 주위 사람들을 거치게 밀면서 천신만고 끝에 버스에서 내리면 몸은 이미 만신창이다. 발을 밟고 밟히는 건 다반사고, 운이 없는 날은 윗옷 단추가 튕겨 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내렸다는 생각에 안심하는 건 잠시, 학교에 가려면 중앙청(지금은 헐리고 없음) 옆 동십자각 근처까지 급히 걸어가 다시 한번 버스 기사와 차장에게 지친 몸을 맡겨야 했다.

지금도 ‘지옥철’이니 ‘푸시맨’이니 하는 용어가 있지만 공부하는 노력보다 버스 타는 데 더 많은 기운을 쏟아부었던 1970년대 초반 통학의 험한 모습은 상상을 초월했다.

요즈음 길을 걷거나 차를 운전하면서 옆으로 지나가는 시내버스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외장이 깔끔한 시내버스에 승객도 많지 않아 한눈에도 퍽 안락하게 보인다. 가끔 늦은 시간에 손님 하나 없이 기사가 홀로 운전해 가는 모습을 보며 학생 때 콩나물시루 버스가 아련히 떠오른다. 자정이 임박한 시간에 종점이 가까워져 손님이 뜸할 때 선 채로 문에 기대어 끄덕끄덕 고개를 떨구며 졸던 또순이 여차장의 모습도 마치 어제 일 같다. 십 대의 나어린 여자 몸으로 달리는 버스에 매달려 인생의 무게를 양 팔뚝으로 버티며 배치기로 사람을 안으로 밀어 넣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새삼 불가사의하다. 힘겨운 살림의 고향 부모님 봉양하고, 줄줄이 딸린 동생들 건사하고, 공부 잘해서 서울로 유학 온 가족의 기대주 오빠 대학 등록금 보태느라 고생인 줄도 모르고 뛰었겠지.

공연히 급브레이크를 수시로 밟은 무정했던 운전기사와 인정사정없이 승객들에게 배치기를 하던 억척같은 여차장이 있었기에 어려운 여건에도 학교 다닐 수 있었던 학생이 어디 한둘인가. 이용했던 사람조차 격세지감에 이토록 감회가 새로운데 이제 모두 꼬부랑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직접 운전하고 다니던 분들이 몰라보게 달라진 시내버스를 보면서 어떤 감정일까. 온 나라가 가난에 찌들었을 때 나라를 일으키고자 향학열에 불타는 인재들을 실어 날라서 배움을 가능하게 했던 고마운 분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수고 많으셨다는 뒤늦은 인사를 드린다. 꾸벅.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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