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후반 조선 노부부 ‘60년 해로 잔치’… 무병장수·자손번창 상징
기사입력 2022.02.11. 오전 10:41 최종수정 2022.02.11. 오후 2:21
■ 박정혜의 지식카페 - ① ‘회혼례’의 기록
과거급제 60년 ‘회방연’보다 부부가 함께하는 ‘회혼례’가 더 드물어…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부터 기념
80명이 넘는 자손·일가친척 집결해 번성한 집안 자랑… 기념화·평생도를 병풍 등으로 제작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기록’이란 본능적인 행위에 가깝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기에 사소한 일상과 감정을 기록하고, 자신의 지나온 역사를 자서전이라는 형식으로 돌아보며 정리하는 것도 일종의 본능에 가까운 기록 행위가 아닐까. 특히 시각적 기록에 대한 본능적 욕구는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부터 인간에게 내재 돼 있었음을 사실적인 고래잡이 모습이 가득한 반구대 암각화나 따비와 괭이 같은 농기구로 밭을 일구는 인물이 새겨진 청동기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록화의 속성을 말하려고 반구대 암각화까지 소환하고 말았지만, 기록화는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가장 고급의 시각 매체로 사진 역할을 대신한 그림이었다. 그래서 사실적 재현과 기념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빼고는 기록화를 논할 수 없으며, 기념물이라는 특징 때문에 기록화에는 오래 기억되고 전승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기본적으로 담겨 있다. 휴대전화 사진으로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을 실시간으로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특별한 일을 시각적으로 남기기 위해 기록화를 제작하고 대대손손 보존하는 데에 쏟았던 옛사람들의 노력을 짐작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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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회혼례도 병풍, 1857년경, 지본채색, 세로 114.5, 가로403.5㎝, 홍익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에는 국가, 왕실, 관청은 물론 일반 사가에서도 기록화를 제작했다. 그중에서 앞으로 만나볼 그림은 양반사대부들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안의 행사나 자신의 기념할 만한 이력을 담아 간직했던 그림이다. 이런 종류의 그림을 사가기록화(私家記錄畵)라고 부른다. 사가기록화에는 궁중과 관청에서 제작한 기록화와는 달리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이 꿈꾸었던 이상과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은 장수와 관직 획득, 그리고 이를 통한 가문의 번창으로 요약된다.
장수한다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 중의 하나이다. 사가기록화도 장수를 축하하는 그림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장수한 노인은 그 자체만으로 덕을 지닌 인물로서 사회에서 존중받았다. 장수를 축하하는 대표적인 잔치로 회갑연이 있지만 그보다 더 희귀한 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곤 했던 것은 혼인한 지 만 60년이 돌아온 것을 기념한 회혼례와 과거에 급제한 지 만 60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회방연을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회혼을 맞는 남성의 나이는 75세에서 78세 사이가 가장 많았다. 또 소과에 합격하는 평균 나이가 35세 전후였다고 하니 90세 가까이 돼야 회방노인으로서 축하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이로 치면 회방을 맞는 것이 더 어려웠지만 대개 신랑보다 나이가 많았던 신부가 함께 해로해야 가능했던 회혼례를 가장 귀한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회갑을 맞는 자가 열 명 중에 대여섯이라면 회방을 맞는 자는 백 명 중에 서넛이고 회혼을 맞는 자는 천 명 중 한둘에 불과하다”는 말이 생겨났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회혼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 무렵이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친척 이세온(李世溫·1547∼?)의 회혼례에 참석한 뒤 쓴 글에서 “회혼은 중국 문헌에서도 전거를 찾을 수 없고 중국에서 회혼을 기념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다”고 회혼례의 연원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아무튼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회혼례를 한국 고유의 풍습으로 생각했다. 사가에서 회혼례를 기념하는 관행은 18세기가 되면 왕들도 관심을 가져 영조와 정조 대에는 국가의 조신으로서 회혼을 맞는 관료에게 특별한 은전을 내리곤 했다.
회혼례의 주인공은 조선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바람인 장수와 자손번창의 상징으로 인식돼 사대부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했던 인생행로를 시각화한 평생도의 마지막 장면은 으레 회혼례 장면이 차지하곤 했다(그림 1). 평생도에는 혼례복을 입은 노부부가 자손들에게 둘러싸여 초례상을 마주하고 다시 한 번 교배례를 올리는 장면으로 그려졌다.
회혼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한 장의 총천연색 기념사진 같은 병풍 그림이 홍익대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그림 2). 보통 두루마리나 화첩으로 만들어졌던 사가의 기록화와는 달리 병풍 그림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인 데다 7폭을 연결한 대형 화면에 회혼례가 베풀어지고 있는 집 안팎의 정경을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전개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회혼례를 주관한 아들은 마지막 폭에 이 행사의 경위와 자신의 소회를 피력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름 부분이 정확하게 판독되지 않는다. 다만 이 행사는 1857년에 76세 된 아버지와 78세 된 어머니의 회혼례를 기념해 아들이 정성 들여 마련한 자리였으며 주인공은 여흥민씨였다는 기본 정보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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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회혼례도 병풍 부분 확대
안채의 마당에 차일을 치고 덧마루를 깔아서 행사장을 조성했다. 노부부는 대청마루에 산수도 병풍을 배경으로 나란히 자리 잡았다. 양옆을 커다란 화준으로 장식하고 붉은색 원반에는 각종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다(그림 3). 화면에는 머리에 꽃을 꽂은 자손이 부모에게 헌수하는 순서가 묘사돼 있다. 회혼례의 하이라이트는 신랑 신부가 술잔을 나누는 합근례 후에 자손들로부터 장수를 축원하는 술잔을 받는 순서에 있었다. 잘 차려입은 가족과 친지들이 덧마루 위에 가득 열 지어 서 있는 모습에서도 짐작되지만, 한번 회혼례가 열리면 적어도 수십 명, 많게는 80명이 넘는 일가친척이 모였다. 그래서 회혼례 날 종회(宗會)를 겸해서 여는 집도 있었다. 자손들과 일가친척이 집결하는 행사인 회혼례는 자손의 번성함을 자랑할 수 있는 행사이기도 했다.
사랑채에는 초대받은 손님들이 미리 자리 잡고 앉아 안채에서 헌수례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헌수하는 순서가 끝나면 노신랑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회혼연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손님들을 몇 명의 기녀가 담배도 권하면서 지루하지 않게 응대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 그려진 반빗간에서는 음식 마련이 한창이다. 시렁에는 원반이 넉넉히 준비돼 있고 술병과 장독이 즐비하며 대형 가마솥이 여러 개 걸려 있는 모습은 손님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종들은 준비된 음식상과 술상을 사랑채로 나르느라 종종걸음이다.
집 주변은 주인공의 사대부적 면모를 넌지시 말해주는 여러 장치로 가득 차 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서책이 가득한 서옥(書屋)이 보이고, 뒷동산의 모정에선 한 선비가 거문고를 뜯고 있다. 대숲을 배경으로 두 마리의 학이 노닐고 있으며 오동나무도 자라고 있다. 마당에는 연꽃이 활짝 핀 네모난 연못이 커다랗게 조성돼 있다. 이 연못의 가장자리는 버드나무와 괴석으로 꾸며졌고 큰 나무가 자라는 가산을 갖추었으며 나룻배도 한 척 떠 있다.
잔칫날인 만큼 음악과 춤, 공연이 빠질 수 없다. 헌수례가 한창인 안채의 덧마루 앞에는 광대가 한 손에 새를 들고 악공이 연주하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무(老萊舞)를 추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효심이 깊었던 노래자(老萊子)는 70세가 된 나이에도 부모 자신이 늙었음을 느끼지 못하게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새 새끼를 가지고 어린애 짓을 하며 부모 앞에서 재롱을 떨었다고 하는데 이 춤을 노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효의 상징인 노래자의 고사는 경수연도나 회혼례도에서 종종 표현되는 소재이다. 사랑채 옆의 마당에는 고수의 장단에 맞추어 오른손에 부채를 들고 노래하는 소리꾼의 판소리 공연이 벌어지고, 삼현육각의 연주에 맞추어 어릿광대와 함께 줄광대의 줄타기 공연도 한창이어서 흥겨운 잔칫날의 떠들썩한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가마를 멘 가마꾼들은 발길을 재촉하고, 멀리 고개 넘어 이제야 마을로 들어오는 지각생 손님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구경 나온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정경은 이 잔치가 집안의 잔치이자 마을잔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행사의 준비부터 손님 접대까지 서옥, 부엌, 마구간, 후원 등 집안 곳곳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이 병풍은 이날의 성대한 경사를 대대손손 보여줄 기념화의 역할에 충실하다.
기록화는 사실적인 재현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에서도 짐작되듯이 사물의 합리적인 비례나 공간의 표현은 이야기 전개를 위해 왜곡되거나 임의적으로 조정되기 일쑤였다. 다만 중요하고 나이 많은 사람은 크게 그리고 중요도가 낮거나 어린 사람은 작게 그리는 인물화의 오래된 묘법이 적용됐다. 그리고 행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임의적인 설정(예컨대 이 그림에서는 학이나 거문고 타는 인물 등)이 곳곳에 등장하곤 한다. 그래서 기록화는 감상하는 그림이 아니라 구석구석 읽어야 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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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회혼례도 부분, 모당홍이상평생도 병풍, 19세기, 견본채색, 세로 122.7, 가로 47.9㎝,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사학자·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정혜 교수는 평생 조선시대 미술을 공부했다. 누구보다 일찍 궁중회화, 기록화, 채색화에 발을 내디뎌 연구 지평을 넓혀온 그는 돌아보는 이 많지 않던 조선 양반들의 사가기록화로 연구 범위를 확장해왔다. 한국 미술사의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을 열기 시작한 그의 연구에 힘입어 조선 양반들의 삶이 그림을 통해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 ‘영조 대의 잔치 그림’ 등을 썼고 후학 양성에도 각별히 힘을 쏟고 있다.
■ ‘옛 그림으로 본 사대부의 꿈’은
조선시대에는 궁중, 관청, 사대부 집안에서 벌어진 특정 행사나 의례를 사실적으로 재현한 기록화가 많이 그려졌다. 이 연재에서는 양반사대부와 관련된 기록화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을 종류별로 하나씩 소개하고자 한다. 그림을 하나씩 살펴보는 과정에서 일반 감상화(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등)와는 다른,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기록화만이 가질 수 있었던 특징과 역할을 알 수 있다. 개인 저택을 배경으로 한 양반사대부 집안의 일상적이고 풍속적인 면모도 들여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이 꿈꾸었던 이상과 염원이 그림 속에 어떻게 구현됐는지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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