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동생 궁궐 출입 막다 폭행 당한 병사가 승승장구?]
중앙일보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10)
입력 2019.06.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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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경복궁 경회루에서 '궁중문화축전 화룡지몽' 공연이 펼쳐졌다. 해당 공연은 천한 신분 출신의 박자청이 경회루를 건설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경회루는 설계에서 시공까지 10개월 만에 지었다. 박자청은 공사기간을 줄이는 등 효율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연합뉴스]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한 번쯤 들었음 직한 일화가 있다. 경계 근무를 하던 병사가 암구호를 대답하지 않고 무작정 진입하려는 간부에게 원칙대로 대응해 포상 휴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다(암구호란 맨눈으로 상대방을 구별할 수 없는 야간에 피아식별을 위해 주고받는 문답식 비밀단어다. 암구호를 대답하지 않고 무단으로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경고 후 공포탄 사격, 체포 등 단계별 조처를 한다).
정말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규칙’은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똑같이 지켜져야 한다는 바람이 투영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사례가 실제로 조선 시대에 있었다.
1393년(태조 2년) 임금의 아우 의안대군 이화(李和)가 궁궐에 들어오려 하자 한 병사가 ‘소명(召命, 신하를 호출하는 임금의 명령)’이 없다며 그의 출입을 가로막았다. 화가 난 이화가 병사를 때리고 발길로 차서 얼굴에 큰 상처를 입혔지만, 병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사건이 태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태조는 원칙을 지킨 병사를 칭찬하며 벼슬을 내렸는데, 바로 박자청(朴子靑)이라는 이름의 병사였다.
박자청은 훗날 종1품 판우군도총제부사에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이 밖에도 판한성부사, 참찬의정부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도대체 일개 병사가 어떻게 그리될 수 있었을까? 더욱이 박자청은 황희석이라는 사람의 하인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의 그가 어떻게 재상급 지위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
박자청을 성공으로 이끈 것은 전문분야의 지식과 실력이다. 그는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힌다. 문묘(文廟)와 창덕궁 건립의 총감독을 맡았고 태조와 왕비 신의왕후의 능인 건원릉과 제릉을 조성했다. 경회루, 청계천, 문소전, 한양도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완성됐다. 정도전이 한양의 도시디자인을 그려냈다면, 한양을 직접 건축해 현실화시킨 사람은 박자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박자청은 공기(工期)를 단축하고 새로운 공법을 개발하였으며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등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덕분에 건설 분야에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해당 업무의 최고 책임자인 공조판서로 오랜 기간 재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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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도 박자청의 손을 거쳤다. 박자청은 부족한 인품과 신분에도 불구하고 건축 분야에서 전문성을 잃지 않았기에 능력을 계속 꽃피울 수 있었다. [중앙포토]
이러한 박자청에 대해 현장 인부들을 매섭게 다그쳤고 인품이 각박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라는 비판도 수없이 받았다(낮은 신분의 박자청이 높은 관직에 오른 것에 대한 시기와 경계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설계안을 고집하다가 임금의 명령을 어겨 해임되고 투옥된 적도 있었다.
그의 단점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분야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긍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구상을 최선의 형태로 구현하겠다는 목표에만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천재적이고 뛰어난 능력을 갖췄지만 사회성이 부족해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가져다 대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요즘에도 볼 수 있지 않은가.
요컨대 박자청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최고가 되면서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남들이 대체할 수 없는 압도적인 위상을 확보했기 때문에 미천한 신분과 모난 성품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계속 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이 이것뿐일까? 박자청이 임금의 눈에 든 계기는 우연인 듯 찾아왔다. 하지만 임금의 지속적인 관심과 총애 속에서 능력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오랜 시간 자신을 갈고 닦아왔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하인 시절에도, 이름 없는 병사 시절에도 건축에 관심을 갖고 준비했기 때문에 기회가 오자마자 자기 뜻을 펼쳐갈 수가 있었다.
하인 시절에도 건축가 준비
누구든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속을 걸어가야 할 때가 있다.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체념하며 주저앉거나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내서는 안 된다. 노력하고 준비하고 자신을 성장시켜야 기회가 온 순간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바로 박자청이 보여주듯이.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박자청[ 朴子靑 ]1357년(공민왕 6) ~ 1423년(세종 5)
본관은 영해(寧海). 황희석(黃希碩)의 가인(家人)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내시로 출사해 낭장(郞將)에 오르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입직군사(入直軍士)로 궁문(宮門)을 지킬 때에 왕제(王弟) 의안대군(義安大君)이 들어가려 하자 왕명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의안대군이 발길로 차며 상처를 입혔는데도 끝내 거절하였다. 태조가 이 사실을 알고 은대(銀帶)를 하사해 내상직(內上直)에 임명하고 어전 밖을 지키도록 하였다.
철야로 직무에 충실해 선공감소감(繕工監少監)이 되고, 1396년(태조 5) 호익사대장군(虎翼司大將軍)으로 동북면선위사(東北面宣慰使)가 되어 오랑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를 불러 타일렀다. 1402년(태종 2) 공조·예조전서, 1406년 중군총제 겸 선공감사(中軍摠制兼繕工監事)가 되었는데, 토목공사의 감독 업무를 잘 수행한 공으로 현달한 관직에 발탁될 수 있었다.
문묘(文廟)를 새로 지을 때 역사의 감독을 맡아 주야로 살피고 계획해 4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그러나 모화관(慕華館)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는 작업은 시일만 끌고 완성하지 못해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1408년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공조판서를 역임할 때 제릉(齊陵)과 건원릉(健元陵)의 공사를 감독하였다. 1413년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경성수보도감제조(京城修補都監提調)를 맡아 도성을 수축하였다.
그 뒤 좌우군도총제(左右軍都摠制), 1415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이르렀다. 이 해 인정문(仁政門) 밖의 행랑 축조를 감독했으나 측량 실수로 기울어지자 직무 태만으로 하옥되기도 하였다. 성품이 각박하고 인정이 적다는 평을 받았다. 시호는 익위(翼魏)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자청 [朴子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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