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내시경]익선동 골목길-아기자기한 멋과 맛에 외국인도 끌린다
인사동으로, 삼청동으로, 북촌과 서촌으로 몰리던 인파가 소문을 듣고 하나둘씩 익선동으로 몰려들면서 골목길 곳곳에 카페와 빵집과 술집이 들어섰다.
두 사람이 비켜갈 골목길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지하철 5호선 종로3가역 낙원상가로 가는 길과 종로세무서 앞길 사이에 익선동이 있다. 낙원동과 붙어 있고 행정구역상으로는 종로 1·2·3·4가동의 일부이다. 익선동 좁은 골목길이 인파로 붐비는 핫플레이스가 된 것은 4~5년 전부터이다. 한때 이곳은 쇄락한 채 사라질 운명의 장소로 묘사된 바 있었다. 그러던 곳이 재생의 순간을 맞은 셈이다.
익선동에는 100여채의 한옥이 남아있고, 올 초 세 번째 한옥마을로 지정됐다. 북촌과 서촌을 잇는 한옥벨트가 서울 한복판에서 100여년의 세월을 버텨낸 것이다. 100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의식주 모든 것이 바뀌었다.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이 있다는 점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이 쏠린다. 덕분에 서울시에서 공을 들이고 있는 도시재생사업 계획도 익선동을 주목한다.
올 초 세 번째 한옥마을로 지정
오래된 골목마다 유행을 반영한 카페와 식당과 액세서리 가게가 문을 열었고, 수공예품과 옷을 파는 오픈마켓도 장을 펼쳤다. 골목길에서 젊은이들은 소문난 가게들을 찾아 숨바꼭질을 하듯 즐긴다. 무채색의 골목길은 밝아졌고, 색깔을 입었으며, 묘한 분위기가 새로 생겼다. 고요하던 길이 북적이고 그야말로 뜨는 동네가 됐다.
돈이 된다 싶자 집을 뜯고 고치는 일은 익선동의 일상이 됐다. 머지않아 원형을 유지한 집을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 됐다.
익선동이 뜨기 전까지 그곳은 그냥 좁고 으슥한 오래된 골목길이었을 뿐이다. 1930년대 대규모로 지어진 개량한옥은 칸칸이 방을 나눈 쪽방촌으로 변한 지 오래라 골목길은 세상과 다른 느린 시간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여고 교감으로 재직하다 명예퇴직 후 경비원으로 일한다는 김모씨는 2년째 익선동 쪽방에서 살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에서 나와 지내는데, 시내에서 30만원짜리 방을 구할 데가 없다. 책이며 이것저것 짐이 많아 고시원보다는 쪽방이 편하다. 일터가 어디든지 지하철로 쉽게 갈 수 있고 근처에 밥값 싼 식당도 지천이다”라고 했다. 연금 나올 때까지는 몸으로 벌어먹는 일을 해야 하고 그러기엔 익선동이 지낼 만하다고 설명했지만, 낡은 쪽방은 싼 잠자리일 뿐 살 만한 곳은 못된다며 말끝을 흐렸다. 그가 세든 집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여섯 명이나 더 살고 있다며 아마도 최후의 익선동 주민이 될 것이라며 웃었다. 익선동이 개발되면서 그와 같은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곳을 찾아 떠났다. 형편에 따라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동관시장길의 쪽방촌이나 양동으로, 영등포로 흩어져 갔다.
가게를 만들기 위해 한옥을 고치는 모습은 일상이 됐다.
소규모 한옥들 리모델링 한창
사람이 살던 자리는 곧 가게로, 손님들로 채워진다. 인사동으로, 삼청동으로, 북촌과 서촌으로 몰리던 인파가 소문을 듣고 하나둘씩 익선동으로 몰려들면서 골목길 곳곳에 카페와 빵집과 술집이 들어섰다. 동네가 활기를 찾은 만큼 땅값은 오르고 가겟세도 어제오늘이 다를 만큼 솟았다. “땅값이 오르면 뭐하나. 살기만 사나워졌다. 대문 밖을 나가면 시장바닥이나 다를 바 없이 됐다. 집 비우고 세를 내주라고 부추기는데 이제 와서 딴 데 가서 살 수도 없다”는 것이 익선동에서 2대를 살았다는 주민의 말이었다. 이제껏 지금처럼 사람들이 북적인 적은 없었다고 덧붙이면서도 주민은 떠나고 행인만 있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익선동 한옥들은 대체로 50~60㎡(15~18평) 정도의 소규모 주택들이다. ㄱ자 ㄷ자 ㅁ자 등 다양한 형태의 아기자기한 한옥들은 지어질 무렵만 해도 일제강점기 때 신개발도시계획의 산물이었다. 작은 크기에도 갖출 것은 다 지녀서 그때에 새롭게 떠오르던 도시 서민들의 보금자리가 됐었다. 지금과 달리 오롯이 국내산 소나무로 지었던 터라 골격은 보기보다 짱짱하다는 평이다. 한창 유행하는 익선동 리모델링은 그 구조와 재목을 최대한 살려서 고친다. 현장에서 한옥 개조작업을 하던 인테리어 업자는 “기와집이라 여름엔 비가 새고 습하다. 나무와 벽도 썩은 집이 더러 있다. 겉보기와 달리 한옥은 개·보수가 쉽지 않다. 나뭇결을 살리기 위해 겉은 다 깎고 새 칠을 해야 한다. 흙도 갈고 골조도 보강해야 해서 손길 갈 곳이 많다. 한옥의 멋을 살리고 구조는 현대식으로 바꾸는 게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든다. 고치는 게 짓는 것보다 돈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 단장한 한옥은 손을 탄 만큼 눈에 띄게 달라 보였다.
열린 대문 사이로 100년 전 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한두 평짜리 쪽방들을 터내서 주방을 내고 홀을 만들거나 마당엔 지붕을 덮고 좌석을 만든 카페들이 젊은 세대의 눈에는 신기한 구경거리다. 타일바닥을 살려 분수대로 꾸민 커피점도 있다. 여자친구와 사진을 찍기 위해 들렀다는 젊은이는 “타임머신을 타고 아버지 시대로 돌아온 것 같다. 좁은 골목 곳곳에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도 신기하고 한옥도 처음 본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달라 색다른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문을 연 가게들도 메뉴는 대부분 젊은 취향을 따랐다. 커피와 차를 파는 카페뿐 아니라 수제맥주에 서양식 과자점, 독특한 메뉴를 앞세운 레스토랑이 눈에 띈다. 향수를 살린 옛날식 오락실도 있고 비디오 영화를 틀어주는 카페도 있다. “젊은 입맛에 맞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골목 카페 사장의 말이다.
외국 관광안내서에도 소개된 덕에 익선동을 꼭 찍어 관광하러 오는 외국인도 볼 수 있다. 북촌이며 서촌을 다 찾아가 봤다는 일본인 관광객은 “이 동네는 한국 살림의 속살을 보는 것 같다. 북촌은 겉으로 잘 정비된 반면 익선동은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다. 나그네가 아니라 그냥 이 마을 사람으로서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며 서울에 오면 일부러 이 골목길을 찾는다고 말했다. 커피집 주인은 “서양 젊은이들도 발길이 잦은 편이고, 동남아쪽 관광객들도 많이 오는 편이다. 가족 단위로 찾는 이들이 많은 것도 이곳의 특징이다”라고 덧붙였다.
익선동 북쪽길은 해방 직후부터 70년대까지 요정정치와 기생관광의 중심지였다. 3대 요정 중 하나라던 오진암을 중심으로 곳곳에 널린 요정 때문에 일대는 흥청망청한 분위기가 걸쭉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은 익선동 골목길 곳곳에 남아있다. 골목을 향해 굳게 닫힌 창문살에 ‘한복맞춤’ 간판들이 아직도 보인다. 요정에서 일하던 이들이 익선동에 방을 얻어 살던 시절이 있었고, 그들에게 옷을 지어주던 삯바느질집은 아직도 남아있다. 인근엔 요정에서 일하기 위해 민요가락을 배우던 교습소가 밤낮으로 장구와 가야금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덕분에 익선동 바깥 돈화문길은 국악거리로 자리 잡았다. 국악기 전문점과 국악 교습소가 돈화문길의 주인이 됐다. 거리의 주인공들은 바뀌었지만 익선동에 묻어 있던 가락소리는 길가로 나왔다. 기생관광이 꼬리를 내리고 유흥의 중심지가 강남으로 간 후에도 오진암은 한동안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철거됐다.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이 묵는 호텔이 들어섰다.
오랫동안 자리 지키고 있는 맛집들
한옥골목을 에워싸듯 숙박업소들이 많은 것도 색다른 편이다. 골목 안에는 한옥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도 두 곳이나 생겼다. 한옥 숙소를 주로 찾는 이들은 외국의 배낭여행자들. 그들 사이에 익선동과 북촌의 한옥 게스트하우스는 독특한 체험장소로 소문났다고 한다. 불편함이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일일 수도 있다.
세월이 오래된 동네인 만큼 익선동에는 수십 년을 꿋꿋이 버티고 있는 맛집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텔레비전 미식(美食) 프로그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해물 칼국숫집과 미식가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할머니 칼국숫집. 국물보다 건더기가 더 많다는 순대국밥집과 저녁이면 앉을 자리가 없는 연탄구이 고깃집들은 익선동뿐 아니라 입맛 까다로운 식객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익선동 골목 안 신세대 레스토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투박하고 낡았으며 무뚝뚝한 식당들이지만 맛은 기본이고 가격도 싸다. 그러니 사람이 몰리지 않을 턱이 없으며 인근 노인들은 맛집에서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에 소주며 막걸리까지 반주를 해도 가벼운 주머니가 부담되지 않는 편이다. 익선동 맛집들이야말로 옛동네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최신 유행을 따른 장식과 소품들은 젊은이의 발길을 끌어들인다.
돈 많이 벌었겠다고 말을 건네자 2대째 사장 아주머니는 “돈보다 그냥 하던 일이라 한다. 어머니는 먹고살려고 시작했고, 나는 배우고 하던 일이라서 계속한다. 돈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인다”고 했다. 오랜 장삿집엔 세월이 지나야 남는 흔적들이 있고 찌그러진 양은그릇에도 나이테가 남아있다. 손님을 돈으로 보기보다 사람으로 대한다는 말은 쉽게 지어내기 힘든 이야기다. 그것이 새로 문을 연 곳과 다른 오래된 가게만이 갖는 차별점이다.
요새 뜨는 동네처럼 익선동에도 한동안 소란이 지나쳐갔다. 임대료 상승과 젠트리피케이션, 개발과 보존을 사이에 둔 갈등이 깊었지만 그것도 변화의 한 과정일 뿐 익선동은 아직도 변화하고 있다. 빈 가게 앞을 지나던 마을주민은 “이 집은 가게로 고친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문을 못열고 있다. 땅값이 올랐어도 집 팔아 강남 아파트 전세도 못얻는다. 동네가 활기차서 좋지만 시끄럽고 복잡해져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익선동 곳곳에는 공사 중인 집들이 몇 년째 계속 보이고 있다. ‘한옥 매매·임대’ 플래카드가 골목길 초입에 눈에 띄게 걸려 있다. 그 사이로 젊은 연인들의 소란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골목의 변화 속에 누군가는 밀려나고, 누군가는 돈을 벌고, 누군가는 구경꾼으로 스쳐지나가고 있다. 옛날사람들이 한 골목에서 태어나 생로병사를 겪었듯이 골목 자체도 생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셈이다.
골목은 모든 길의 끝에 있다. 바쁜 세상을 살다가 골목길에 접어들면서 귀가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하룻밤을 쉬고 다시 골목길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던 것이 오래된 삶의 방식이었다. 이제는 골목이 사라지고 생존의 방식이 변하고 있다. 익선동 골목길의 오늘 모습에서 세대와 문화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골목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과 길의 의미는 너무나 변해버렸다. 그래도 익선동 골목길은 생긴 지 100년 만에 새로운 역할과 활기를 다시 얻었다.
2018.12.10ㅣ주간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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