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독단에 물들어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파멸한다
[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獨 철학자 니체의 ‘아침놀’과
정치인이 가장 졸렬해 보일 때
인간은 언제 가장 졸렬해 보이는가? 무능한데 욕심은 많을 때 인간은 졸렬해 보인다. 이를테면 자기 음식도 다 먹지 못하면서 남의 음식을 탐할 때 인간은 졸렬해 보인다. 부당한 강자를 만나 비굴한 태도를 보일 때도 인간은 졸렬해 보인다. 이를테면 깡패를 만났다고 데이트 상대를 버리고 혼자 도망칠 때 인간은 졸렬해 보인다. 약자를 골라 화풀이를 할 때도 인간은 졸렬해 보인다. 이를테면 직장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해소할 때 인간은 졸렬해 보인다. 이에 못지않게 인간이 졸렬해 보일 때는, 너무도 분명한 자신의 오류를 기어이 인정하지 않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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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언제 가장 졸렬해 보이는가? 작은 일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할 깜냥을 가지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때 그 정치인은 졸렬해 보인다. 사나운 경쟁자를 만났다고 무턱대고 후보직을 내던지고 퇴각해도 그 정치인은 졸렬해 보인다. 사회적 약자에게 화풀이성 정책을 일삼아도 그 정치인은 졸렬해 보인다. 그에 못지않게 대통령 후보가 졸렬해 보일 때는, 토론이나 유세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때다.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을 보라. 대개 상대에게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허물을 집어내어 망신을 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상대를 거대한 바보로 만들 것인가. 선거에 뛰어든 이상, 상대를 비판하고 자신의 탁월함을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시비를 거는 것과 토론을 청하는 것은 다르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좀 더 나은 논의로 나아가는 것이 토론의 목적이다. 완벽한 나머지 의견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 이가 좋은 토론자가 아니라, 자신의 오류를 수정할 줄 아는 이가 좋은 토론자다.
그러나 자신의 결점을 지적받았을 때, 흔쾌히 인정하고 견해를 바꾸는 장면은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다. 아마도 토론이 밀실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자가 눈과 귀를 열고 후보들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이러한 ‘극장’에서 자신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무대 위에서 상대 후보에게 반박당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단전에서 분노가 끓어오를 것이다. 고라니처럼 꽥 소리 지르고 싶을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지적한 경쟁자에게 달려들어 니킥(knee kick)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오류가 드러났다고 해서 상대에게 무작정 보복하려 드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견해가 완벽한 것처럼 구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면, 국민들이 그 오류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그럴 리가. 시청자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그의 문제를 이미 보고 있다. 국민이 자신의 오류를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일이다. 정치인이 국민을 무시하면, 국민도 그 정치인을 무시하기 시작한다. 마키아벨리가 그러지 않았던가. 국민들에게 사랑받지 못할지언정 두려움의 대상이라도 되어야 한다고. 무시당하면, 그 정치인은 끝이라고.
그래도 끝내 정치인이 자신의 명백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버티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 오류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 오류는 인정할 때만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둘째, 졸렬해 보인다. 근거 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만큼 졸렬해 보이는 경우도 드물다. 셋째, 태만해 보인다. 니체는 정신이 태만할 때 독단이 생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단에 물든 정신은 “더 이상 정신이 아니다” “허물 벗지 못하는 뱀은 파멸한다”고.
의견을 바꿀 줄 안다는 것은 정신이 태만하지 않다는 것, 지성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는 다들 자신이야말로 변화무쌍한 미래를 맞이할 적임자라고 이야기해오지 않았나. 의견을 바꾸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널리 알릴 기회다. 무턱대고 견해를 바꾸라는 말이 아니다. 합리적인 근거나 정보가 제공되었을 때 견해를 바꾸라는 말이다. 그러려면 참모가 준비한 정책과 비전을 그저 외워서는 안 된다.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도 후보들은 깔끔하게 오류를 인정하지 않기 쉽다. 시청자는 저렇게 정신이 태만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합리적인 비판을 수용하지 못할 거라는 혐의를 품게 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정신의 태만으로 인해 의견이 신념으로 굳어진다. 자유롭고 쉴 새 없이 살아 약동하는 정신을 스스로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의견이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급변하는 미래가 다가올 때, 국민들은 태만한 정신보다는 약동하는 정신을 가진 대통령을 원할 것이다.
토론을 많이 해보면, 실로 완벽한 의견이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론에 임하는 이에게 세상 사람들은 둘로 나누어진다.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 의견을 바꿀 줄 아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 그러니, 자기에게 제기되는 반론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자신이 합리적 의견을 경청할 수 있는 열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기회다. 자신이 약동하는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만방에 보여줄 기회다.
인간은 언제 가장 경탄스러운가? 엄청나게 유능할 때? 부당한 강자에게 굴하지 않을 때? 기꺼이 약자를 도울 때? 그에 못지않게 인간이 경탄스러울 때는,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할 때이다. 아무도 반박 못 할 주장을 제시하는 것도 대단하지만, 자기 견해를 수정하여 더 나은 견해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대단하다. 자신이 이미 주장했다는 이유 하나로 계속 그 주장에 집착하는 사람들 천지인 세상에서, 누군가 침착하게 설득당하고 의연하게 의견을 바꾸어 보는 거다. 온통 귀를 막고 자기 소리만 고라니처럼 질러대는 세상에서, 결연히 설득당하는 이의 영광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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