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02)
꼬리가 길었다
입력 : 2022-04-22 00:00
간통 목격해 돈맛 본 천석이
늦은밤 양반 뒤를 밟는데…
열두살 천석이는 저잣거리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소매치기다. 몸은 삐쩍 말랐으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고 행동거지가 재빨랐다. 또래 거지 아이들과 싸움박질을 해서 지는 법이 없었다. 덩치 큰 녀석과 싸움이 붙어도 사타구니를 발로 차는 선공으로 거꾸러뜨리거나 조끼 주머니에 숨겨둔 소매치기 칼로 얼굴을 그어버린다.
천석이는 외톨이다. 저잣거리를 주름잡는 왈패들이 천석이를 키워 써먹으려 해도 천석이는 홀로 쏘다니지 패거리에 껴들지 않았다. 장날이면 소매치기, 어느 날 밤엔 좀도둑질로 살아가다가 우연찮게 큰돈을 얻게 됐다. 칠흑 같은 한밤에 민 대감 댁에 몰래 들어가 뒤꼍 쪽마루 밑에 숨었는데 재수 없게 삽살개가 달려들어 후다닥 튀어나오다가 뒤뜰에서 다른 도둑과 마주쳤다. 이럴 수가! 그는 점잖은 주단포목집 주인 오 생원이 아닌가. 오 생원은 깜짝 놀라 뒷담 쪽문을 열고 줄행랑쳤다.
대장간 굴뚝 옆에 거적때기를 덮고 천석이는 잠을 청했다. 새벽닭이 울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고을 최고 부자 오 생원이 도둑질하러 왔을 턱은 없고….
장날 아침이 밝았다. 대장간 풀무질을 몇번 해주고 작은 칼을 숫돌에 갈아 골무에 끼워 슬금슬금 장터로 들어갔다.
어느 노인의 주머니를 예리한 칼로 그어 돈을 막 꺼내려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팔목을 잡았다. 천석이는 손목을 탁 치고 튀려 했지만 그 악력이 얼마나 세던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국밥집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한번만 눈감아달라고 꿇어앉아 싹싹 빌며 그를 쳐다본 천석이는 깜짝 놀랐다. 바로 주단포목집 주인 오 생원이다.
몇번 옥살이를 해본 천석이는 관아로 끌려갈까 봐 바들바들 떨었다. 오 생원은 주머니 하나를 천석이 사타구니에 찔러주며 “우리 둘 다 서로 입을 닫기다. 알겠지?” 했다.
친절한 오 생원은 국밥값에 너비아니값까지 내고는 싱긋 웃고 그냥 나가버렸다. 천석이는 주머니를 열어보고 기절할 뻔했다. 돈주머니였다. 천석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수수께끼를 풀 수가 없어 길가에 쭈그려 앉아 점을 보는 봉사 영감에게 물어봤다. 명쾌한 답을 들었다. 대장간 굴뚝 옆으로 돌아온 천석이는 무릎을 쳤다.
“일이 그렇게 됐구나.”
민 대감 아들은 무관으로 삼년째 함경도 변방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 부인 그러니까 민 대감 며느리는 과부와 진배없이 독수공방하고 있다가 샛서방과 간통을 하게 됐고, 그 바람둥이가 바로 주단포목 오 생원이다.
요즘 민 대감이 병석에 누워 있어 민 대감 며느리는 대담하게도 샛서방을 안방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오 생원이 공포감을 떨칠 수 없는 건 당연지사. 소문이 나서 민 대감 아들, 변방의 무관이 돌아오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천석이는 또 무릎을 쳤다.
‘소문이 나면 망할 사람이 오 생원 혼자뿐일까?’
요 발랑 까진 놈이 생긋이 웃더니 이튿날 민 대감 댁으로 찾아가 뒤뜰에서 시아버지 약을 달이는 며느리 곁에 앉았다.
“너는 누구냐?”
마님이 놀라자 “마님, 저는 입이 무겁습니다마는 오 생원 나리로부터는 입막음 사례를 받았습니다” 했다. 바들바들 떨던 며느리로부터 금비녀를 챙겼다.
이제 소매치기와 좀도둑 같은 조무래기 일은 천석이가 할 일이 아니다. 그는 저잣거리 골목 깊숙한 곳에 방을 하나 얻어 대장간 굴뚝 옆 거적때기 생활을 접고 깨끗한 옷도 새로 사 입었다. 툭하면 호기롭게 너비아니도 국밥에 곁들이게 됐다.
밤낮이 바뀌었다. 낮엔 잠자고 늦은 밤이 되면 오입쟁이를 찾으러 골목을 쏘다니는 게 천석이의 주업이 돼버렸다.
허탕 치는 날도 있고 어떤 때는 협박하다가 흠씬 두드려 맞기도 했지만 제대로 걸리면 수입이 짭짤했다. 어떤 때는 헛다리를 짚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중이 과붓집으로 잠입하는 걸 한건 했다고 덮쳤다. 중이 과부와 붙었다는 것이 소문 나면 신도들이 발길을 끊어 절이 문 닫을 것이요, 과부는 동네 우물에 물 길으러 가지도 못할 것이다. 밤이슬을 맞으며 과붓집 담에서 꼬박 뜬눈으로 밤새우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야 집을 나서는 중을 따라가 협박을 했다. 이런 낭패가! 알고보니 중은 여승으로 과부의 친동생이었다.
봄날이 갈 때는 과부가 바람날 때다. 깊은 밤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골목을 도포 자락 휘날리며 갓을 깊숙이 눌러쓴 양반을 따라 담벼락에 몸을 숨기며 천석이가 부지런히 뒤따라갔다. 꼭두새벽에 그 집에서 나오는 양반 앞을 가로막고 협박조로 말을 걸었다.
“나리 소인은 입이 무겁습니다마는.”
“그래서?”
철썩.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귀싸대기를 맞고 천석이는 볼을 감싼 채 도랑에 처박혔다. 그 양반은 사또요, 그 집은 수청 기생집이었다. 곤장 열두대에 초주검이 돼 옥에 갇힌 열두살 천석이가 중얼거렸다.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어! 꼬리가 길면 밟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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