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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이야기 공작소-피란수도 부산…1023일간의 이야기 <2> 부산 전차와 남선전기 사옥

by 까망잉크 2022. 4. 30.

이야기 공작소-피란수도 부산…1023일간의 이야기 <2> 부산 전차와 남선전기 사옥피란민 몰려 인구 100만… 전차는 늘 초만원, 소매치기까지 들끓었다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   입력 : 2022-03-29 18:55:59

- 무상원조로 부산서 20량 운행

- 승객 붐벼 늘 불친절하던 승무원
- 무리한 탑승 땐 신발 던져 내쫓아
- 동아대서 지역 마지막 전차 전시

- 상공부, 한국전력을 청사로 사용
- 화장실 찾기 힘든 피란민 몰리며
- 정화조 터져 사무실 악취 소동도

임시수도기념거리는 동아대 부민캠퍼스 입구에서 임시수도기념관까지 도로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임시수도기념거리는 피란 시절 부산 서구의 역사적 의미와 대학 문화를 접목해보자는 뜻에서 조성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생활상을 담은 조각들이 거리를 따라 조성되어 있고, 거리 끝의 계단에는 여러 인물상이 설치되어 있다. 동아대 캠퍼스 후문 안쪽에는 부산 시민의 애환을 담고 달렸던 전차 한 대가 서 있다. 지금은 멈춰있지만 1968년까지 부산을 씽씽 달리던 노면전차다. 전차를 퇴물로 여기던 1969년 동아대는 끈질기게 한국전력공사에 요청하여 전차 1량을 기증받았다. 현재 부산에서 볼 수 있는 전차는 이것이 유일하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부산 전차는 2012년 국가등록문화재 제494호로 지정되었다.

 
동아대 부민캠퍼스에 전시되고 있는 부산 전차(국가등록문화재 제494호). 부산 전차는 1952년 미국의 무상 원조로 도입됐다. 동아대 부민캠퍼스의 전차는 부산에서 운행된 전차 20량 중 1968년 마지막까지 운행된 것이다.


■‘전깃불 먹고 달리는 괴물’

부산에 근대 전차가 달리기 시작한 때는 1915년이었다. 동래 온천장역 앞에서 성대한 개통식이 개최되고, 화려한 이벤트가 펼쳐졌을 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우마차를 가장 빠르고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알았던 부산 사람들에게 혼자 힘으로 달리는 전차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비쳤다. ‘전깃불 잡아먹고 달리는 괴물’로 불렸던 전차는 이따금 사람을 죽이는 참혹한 교통사고를 내는 사고뭉치였다. 그럼에도 전차는 부산 시내를 빠르게 이동하는 최고의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잡았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속도는 상대적이다. 현대인은 시속 40㎞ 정도로 달리는 전차의 속도를 거북이걸음으로 여기겠지만 당시 사람에겐 멀미를 일으키는 빠르기였다.

한국전쟁기 부산 전차는 낡고 병들어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리하여 1952년 미국으로부터 원조 물자로 전차 40량을 지원받아 서울과 부산에 각각 20량씩 배치하여 운행하였다. 동아대의 부산 전차도 그때 받은 것이다. 1952년 7월 남선전기는 먼저 들어온 원조 전차를 시운전할 때 환영식까지 열었다. 환영식에는 정부 및 관계 기관의 직원들로 초만원이었으며, 당시 시운전에서는 남선전기에서 동래 온천장까지 왕복하였다고 한다.

■불친절에 소매치기까지

피란 시절 부산은 너무 많은 차량으로 모든 도로가 숨 막힐 지경이었다. ‘부산은 사람과 차의 홍수다’는 말도 생겨났다. 1952년 4월 매일 부산 시내를 운행하는 민간 자동차는 승합 택시, 버스, 트럭 등 1500여 대였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8000여 대의 자동차 중 3000여 대가 부산에 몰려있으니 부산은 차의 홍수로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피란수도 부산에 버스와 택시가 활보를 했어도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전차였다. 전차는 100만 인구로 급증한 부산 시민의 움직이는 발이었다. 그러나 전차 내부는 언제나 만원으로, 시민의 불편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전차 승무원은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무리하게 전차에 탑승하는 승객이 있으면 그 승객의 고무신 한 짝을 빼앗아 창밖으로 내버리고 출발하는 승무원까지 있었다.

또한, 전차 내에서 은밀히 움직이는 소매치기 때문에 당시 표현대로 하면 ‘교통의 명랑화’는 요원하였다. 1952년 9월에 전차와 버스의 정원 단속과 아울러 소매치기 일제 검거에 나섰다. 하루에 검거된 피의자 수가 무려 70여 명에 달하였다. 경남경찰국에서는 부산 시민의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를 1000명 남짓으로 추산하였다고 한다. 전차 내에서 자리 양보 문제도 불거 졌다. 피란수도 부산에는 손과 발을 잃은 상이용사가 많았는데, 이들이 전차를 탔을 때 본체 만체 하거나 되레 경시의 눈초리로 보는 승객들이 있었다. “씩씩한 체구를 가진 남녀 학생들이여, 상이병에게 좌석을 양보하자”는 여론이 일어난 것도 피란수도 시절 전차 풍경이라 하겠다.

한국전력의 전신인 남선전기 사옥(국가등록문화재 제329호). 부산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사용한 역사성이 있다. 현재 한국전력 중부산지점 사옥으로 계속 쓰이고 있다.


■피란수도 땐 상공부 청사

동아대가 기증받은 부산 전차는 원래 한국전력의 소유였다. 피란 시절에는 한국전력을 ‘남선전기’로 불렀다. 부산 서구에는 옛 남선전기 사옥이 지금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토성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5분만 걸어가면 갈색 타일이 붙은 사각형의 건물과 만날 수 있다. 매우 깔끔한 현대식이므로 문화재 안내판을 설치하지 않았다면 국가등록문화재(제329호)로 생각하기 어렵다. 이 청사는 1936년 남선전기 사옥으로 건립되었으며, 현재는 한국전력 중부산지점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피란수도 시절에는 상공부 청사로 사용되었으므로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이다. 국회의사당(무덕전)과 대법원(부산지방법원)이 철거된 반면 ‘구 남선전기 사옥’과 ‘임시정부청사’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건축유산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朝鮮瓦斯電機株式會社)’는 부산의 가스와 전력 사업을 수행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는 철도와 전차, 석탄 등 부산의 기반 시설을 관리하게 되었으며, 타 도시까지 사업을 확장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다른 전기 회사와 통합하여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南鮮合同電氣株式會社)’로 변모하였다. 현재의 한국전력 중부산지점 사옥은 그때 남선전기의 부산지점 사옥으로 준공된 것이다. 목조 사옥이 20년이 지나 노후화하자 1년여 공사 끝에 1936년 10월 새 청사가 완공되었다. 지상 4층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당시 최신식의 건물이었다. 남선전기 부산지점 사옥은 정방형의 반듯한 건물로 1층은 화강석, 2층 이상은 타일을 붙여 마감한 탓에 더욱 깔끔하게 보였다. 더욱이 부산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건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경험은 특별했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자동화된 설비를 통해 오르락내리락 하던 경험은 자랑할 만한 이야기였다. 이 유명한 승강기는 2000년대까지 사용하다가 얼마 전 보수를 마치고 새로 단장하였다.

■남선전기 청사의 ‘똥 사건’

피란정부 시절 경남도청 건물은 비좁았다. 그리하여 재무부, 농림부, 상공부 등은 업무가 유사한 산하기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상공부의 사무 범위는 상당히 광범위하였다. 상공부 장관은 상업·수산·공업·전기·도량형·특허·무역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다. 이 많은 사무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것은 ‘전력 사업’이었다. 부산에는 정부기관이 입주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산업체가 자리 잡았다. 전력 지원이 없으면 모두 멈춰야 했다. 상공부가 남선전기 사옥을 임시청사로 사용한 데는 업무의 연관성과 더불어 전력 사업의 중요성이 작용했을 게다.

해방 후 남한의 전력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기시설 대부분이 북한에 있었는데, 1948년 5월 북한은 일방적으로 남한으로의 송전을 끊어버렸다. 한국전쟁 이전 부산에서는 남선전기 사옥 인근에 위치한 화력발전소와 미국에서 도입한 발전함 자코나 (Jacona)호에서 2만5000㎾의 전력을 생산하였다. 이 쥐꼬리만 한 발전용량으로 엄청난 전력 수요를 감당하다 보니 툭하면 송전이 중단되곤 하였다. 그러니 상공부 직원은 군수공장을 비롯하여 권력층의 항의를 받기 일쑤였다. 피란수도 시절 상공부 직원과 남선전기 사원들만큼 밤잠을 설치면서 기름투성이로 일한 사람들도 없었을 것이다.

피란 시절 남선전기 사옥에서 ‘똥 사건’이 터졌다. 1952년 8월 3일 자 조선일보에는 ‘상공부가 셋방살이하는 남전 청사에서 똥 구린내로 일대 소동’이라는 기사가 났다. 상공부 변소에서 똥오줌이 넘쳐나 사무실 입구와 복도까지도 밀려왔다고 한다. 이 기사는 소방용 호스까지 동원하여 청소를 해도 냄새가 종일 남아 더럽기 짝이 없었다고 전한다. 조선일보는 “아무리 피란 통이라 하지만 정부와 장관의 체면이 어찌 되나”고 꼬집었다. 그러나 똥 사건의 책임이 정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혹시 피란민이 대거 남선전기 청사의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분뇨가 정화조 용량을 초과했기 때문은 아닐까. 피란 시절 물 구하기만큼 어려운 일이 ‘화장실 이용하기’였다. 그 와중에 남선전기 청사의 깔끔한 화장실은 피란민에게 제격이었을 터이다. 아무튼 남선전기 청사의 똥 사건은 언론의 입방아에 오르는 화젯거리였지만 피란민의 애처로웠던 생활상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정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공동기획 : 부산광역시 서구·국제신문·(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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