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
김정수 시인
입력 : 2022.04.18 03:00 수정 : 2022.04.18 03:01
봄비 그치자 아침 이내
포근포근 산자락을 감아돈다.
느른하고 불안하다.
이런 날이면 천산 누옥(漏屋)의 우리 어머니,
육탈의 가벼운 몸 또 근질근질하실 게다.
천명(天命)도 아랑곳없이 떨쳐 일어나
요정처럼 날래게 묵정밭을 일구실 게다.
어허, 저기.
천산에서 뜯어 흩뿌리는 모정(母情)이
무지개 되어 훨훨 땅바닥에 날아내린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너무 환해서 비릿한 눈물 번진다.
정우영(1960~)
봄비가 내려 온갖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곡우(穀雨). 이 무렵 내리는 비는 생명을 움트게 한다. 잠자던 곡물은 깨어나고, 나무는 몸에 물을 가득 채워 싹을 틔운다. 농부는 볍씨를 물에 담그고 못자리를 준비한다. 한 해 농사의 시작이다. 봄비 그친 아침, 앞산에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 감돌자 시인은 느른하면서도 불안해진다. 살아생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은 어머니가 “천산 누옥”에서도 몸이 근질근질해서 천상의 “묵정밭을 일구실” 것 같기 때문이다.
“어허, 저기”, 앞산에 무지개 뜨자 불안은 기쁨으로 바뀐다. “천산에서 뜯어 흩뿌리는 모정”이 무지개라는 상상력은 참으로 놀랍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요히 안에 담고 있던 슬픔이 한결 가벼워진다. 천상의 어머니와 지상의 아들은 나비처럼 “훨훨 땅바닥에 날아내린” 무지개로 연결돼 있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사라진다.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지라 눈물이 번진다. 아직도 보내지 못한 어머니는 시인의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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