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총리 취임… 2차대전 승리 이끈 ‘가장 위대한 영국인’
게재 일자 : 2022년 05월 09일(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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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런던 다우닝가에서 윈스턴 처칠 총리가 트레이드 마크인 승리의 ‘브이(V)’ 자를 그려 보이고 있다. 자료사진
■ 역사 속의 This week
2002년 BBC 방송이 영국민 100만 명을 대상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설문조사를 했다. 셰익스피어, 뉴턴, 엘리자베스 1세 등을 제치고 윈스턴 처칠(1874∼1965)이 1위로 뽑혔다. 10일 취임하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도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처칠은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 5월 10일 66세의 나이로 영국 총리에 올랐다.
취임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군의 공습이 눈앞에 닥친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그는 의회에서 역사에 남을 첫 연설을 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뿐입니다.”
그의 연설은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국민을 하나로 단합시키는 힘이 있었다. 독일군에 의해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 40만 명을 탈출시킨 ‘덩케르크 철수 작전’ 직후에는 “우리는 바다에서 싸울 것이고 육지에서 싸울 것이며 들판에서, 거리에서도 싸울 것이다”라고 말해 끝까지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보여주며 국민을 독려했다. 이 연설은 지난 3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국 하원 화상연설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명연설가였던 그는 어릴 때 말을 더듬어 놀림을 받기도 했다. 학교에선 문제아에 낙제생이었고 삼수 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1899년 종군기자로 참전한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극적으로 탈출해 ‘전쟁 영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26세에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고 통상장관, 해군장관, 재무장관 등을 지내며 출세의 사다리를 탔다. 총리가 되고서는 뛰어난 리더십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195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총리 시절에 연설문을 직접 쓸 정도로 탁월한 문장가였다.
그는 유머를 갖춘 지도자로도 유명하다. 참전을 주저하는 미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처칠은 1941년 백악관을 방문했다. 숙소에서 목욕을 마치고 벌거벗은 상태였는데,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예고 없이 들어왔다가 당황해하며 나가려 하자 “보시다시피 나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소”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이후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1945년 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총선 패배의 쓴맛을 보며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1951년 77세에 다시 한 번 총리직을 맡았고 4년 뒤 은퇴했다. “평생 ‘검은 개’(블랙독·우울증)와 함께 살았다”고 했던 처칠은 1965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일보] 역사 속의 This week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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