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가 淸에 항복하자 환관 기강해이… 효종은 월권행위 가차 없이 문책 |
박영규의 지식카페 -⑧ 王들의 환관 관리 Ⅲ
현종 땐 ‘내관 편만 든다’ 불만들 사관 기록에 남아… 영향력 키운 환관들, 숙종 머무는 곳에 기녀 불러 노는 등 오만 극치
정조가 환관과 조정 관리 사적 만남 금지하자 횡포 줄어… 갑오개혁 이후엔 궁녀와 동급으로 전락
◇계속된 전란에 지쳐 자포자기한 인조 = 인조는 이괄의 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여러 차례 도성을 버리고 몸을 피해야만 하는 사태를 당했다. 이런 일련의 난국은 환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처럼 승리한 전쟁에선 환관들에게 왕을 호종한 공을 평가해 공신 책록을 내리기도 했지만, 병자호란은 인조의 치욕적인 항복으로 끝났기에 환관들에게도 고생의 대가가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환관들은 청나라 사신들에게 불려가 곤욕을 치르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여기 같은 환관은 심양에서 장군 임경업과 은밀히 내통해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하려다 발각돼 쫓겨나기도 했고, 백대규 같은 환관은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에 사사로운 상소를 끼워 넣은 죄로 궁궐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또 대전 환관 서후행은 승지와 술을 먹고 궁궐 안에서 비틀거리고 다니기도 했으며, 인조의 후궁 조씨와 환관이 짜고 소현세자와 세자빈을 모함하는 일도 벌어졌다. 인조가 청에 항복한 뒤로 환관들의 기강도 크게 해이해졌고, 궁궐도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제어하고 다잡아야 할 인조는 방관으로 일관했다. 그는 이미 여러 번의 전란과 삼전도의 치욕에 대한 후유증으로 자포자기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환관의 기강을 다잡은 효종과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현종 = 효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해이해진 환관의 기강을 다잡기 시작했다. 효종 즉위기에 환관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나업은 인평대군이 연경으로 떠나던 날 버젓이 가교를 타고 나와 환송했다. 효종은 이 소식을 듣고 환관들의 거만한 태도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며 나업을 잡아다 죄를 물을 것을 명령했다. 환관 중에는 부마나 왕자들의 집에서 일하는 차지내관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그들 왕실 혈족들의 연줄을 이용해 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거나 월권을 하는 일이 잦았다. 효종은 이런 일에 대해서도 일절 용납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환관의 월권행위나 불법행위에 대한 보고가 올라오면 가차 없이 치죄해 형벌로 다스리도록 했다. 내관들은 상의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압박해 사사로이 일을 시키고 이익을 챙기는 일이 잦았는데, 이런 일도 색출해 벌을 주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효종의 강력한 대처에도 불구하고 환관들의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효종이 죽고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환관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불법을 저지르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현종은 환관들에게 매우 너그러운 편이었다. 관원 중에는 내관과 언쟁을 하다가 궁중으로 끌려 들어가 곤장을 맞는 사태가 일어나도 눈감아 줄 정도였다. 현종의 이런 처사를 두고 사관들은 현종이 노골적으로 내관 편만 든다고 비판하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왕의 비호로 내관들의 오만함이 극에 달하자, 재상들이 나서서 내관들을 제어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특히 방자하고 건방진 환관으로 찍힌 인물이 윤완이었다. 그는 현종 초기부터 신하들로부터 끊임없이 탄핵을 받았다. 그는 공조 참판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공조의 관리를 붙잡아와 매를 치기도 했는데, 이 일로 하옥됐다. 그러나 현종은 이내 그를 풀어줬다. 이후 윤완은 한층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고, 그런 그의 행동은 현종 말기까지 지속됐다. 이 때문에 문신들과 윤완이 누차에 걸쳐 계속 충돌했다.
◇환국정치로 환관의 힘을 키워준 숙종 = 환관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했던 현종의 영향으로 숙종 즉위 초의 환관들은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더구나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에 환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당시 주요 환관으로는 조희맹과 이순수, 육후립, 김현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무리를 이뤄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들은 숙종이 머무는 양지당에 기녀들을 끌어들여 거문고를 뜯고 노래를 부르게 하기도 했다.
환관들이 사적인 청탁을 받아 조정에 벼슬자리를 부탁하는 일들도 잦았다. 그런 일들이 보고될 때마다 숙종은 해당 환관을 법에 따라 처벌했지만 환관들의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환관들이 조정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당시 조정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이른바 ‘환국정치’를 통해 자주 당의 세력을 바꿨고, 이 때문에 남인과 노론, 소론이 치열한 정쟁을 벌였다. 정쟁에서 당인들이 대거 유배됐고, 새로운 당이 조정을 장악하는 사태가 반복됐다. 이런 현상은 임금의 측근들인 환관들의 힘을 크게 강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당시 정치인들은 임금의 내심을 파악하기 위해 환관들에게 줄을 대야 했고, 환관은 그런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형성했다. 이런 탓에 숙종 말기까지 환관의 횡포는 여전히 계속됐다.
◇환관에게 유독 엄했던 영조 = 권력을 향한 환관의 횡보는 경종 대에 이르러 한층 거세진다. 병약한 경종이 들어서자 조정은 왕위 다툼에 시달렸고, 그것은 급기야 박상검 사건을 일으켰다. 경종의 대전 환관이었던 박상검은 경종의 묵시 아래 세제 금(영조)을 죽이려 했고, 영조는 그 점을 역이용해 반격을 가했다. 영조는 박상검, 문유도 등의 대전 환관들이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과 결탁해 자신을 죽이려 했다며 그들을 벌줄 것을 요청했다. 경종은 처음엔 영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노론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결국 자신의 측근인 박상검과 문유도 등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 이후 경종의 측근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고, 독살설이 유포된 가운데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즉위 기간 내내 박상검 사건을 거론하며 환관이 조정 일에 간여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일깨웠고, 그것은 환관들을 크게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조는 환관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가차 없이 벌을 내렸다. 영조의 이런 강력한 의지는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 덕분에 영조시대는 환관이 그야말로 소임에만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
◇환관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애쓴 정조 = 영조 말기에 이르러 환관들이 당쟁에 가담하는 일들이 나타났다. 당시 영조는 노환으로 누워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했고, 정사는 화완옹주와 노론 세력이 좌우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관 이흥록, 김수현 등이 노론과 짜고 당시 세손이던 정조를 협박하고 죽이려 했다. 결국, 그들 환관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모두 참살됐고, 그것은 환관들의 영향력을 한층 약화시켰다.
그런데 정조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홍국영에게 힘을 실어주는 과정에서 환관 이지사가 권세를 부렸다. 그는 대전 환관으로서 홍국영과 정조를 오가며 서로의 뜻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지사의 힘을 키워줬다. 그러나 이지사는 홍국영의 몰락과 함께 힘을 잃었다. 정조는 환관이 월권해 권력을 부리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환관과 조정의 관리가 함부로 만날 수 없게 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또 임금의 말을 전할 때도 공식적인 장소에서만 하도록 하고, 임금의 명령이 담긴 글을 전할 때도 일정한 장소에 서찰함 같은 것을 마련해 간접적으로 전하도록 했다. 이 결과 환관들의 횡포는 크게 줄어들었다.
◇순조에서 순종까지 = 순조 대부터 외척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환관에 대해 더욱 엄해졌다. 외척의 힘이 강해지면서 왕이 환관을 감싸고 돌 수 없는 처지가 됐고, 외척은 환관의 작은 잘못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환관이 조정의 관료와 친분만 생겨도 가차 없이 궁궐에서 내쳤다. 외척의 힘이 더욱 강해진 헌종, 철종 대엔 환관에 대한 기록이 미미할 정도로 환관의 입지는 좁아졌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환관을 더욱 몰아세웠다. 그러다 1894년 갑오개혁 때엔 내시부를 내시사로 개편하면서 아예 환관 제도 자체를 없애버렸다. 이후로도 환관이 궁중에 있긴 했으나 그들은 궁녀와 같은 대접을 받아야 했고, 새로운 환관도 채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고종과 순종을 마지막까지 보필하며 환시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작가
■ 용어설명
환국 정치
흔히 숙종 시대를 ‘환국 정치기’라고 표현한다. 숙종이 왕이 될 무렵 남인과 서인 가운데 주도권을 쥔 쪽은 남인이었다. 이에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환국 정치를 통해 서인이 남인을 몰아내도록 했다. 권력을 잡은 서인이 힘을 키우자 반대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정치 파트너로 삼았다. 환국이 일어날 때마다 왕비 역시 달라졌다. 서인 집권기엔 인현왕후, 남인 집권기엔 장희빈이 왕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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