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씨개명
1936년 여름, 견딜 수 없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1936년 여름, 견딜 수 없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게다가 극심한 가뭄으로 땅은 메말랐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뿌옇게 흙먼지로 덮이곤 했다. 오케 레코드사 이철 사장이 사무실에 들렀다.
“들었어요? 조선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한다고 합니다.”
“이번이 몇 번째 총독인 거요?”
이 사장은 손가락을 꼽았다.
“일곱 번째인가 보네요. 이번 총독은 관동군 사령관과 육군대신을 지낸 사람이라 하더군요.”
조선을 통치하는 사람이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니 이 강산이 어지간히 일본에 오래 시달렸음을 새삼 느꼈다.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총독은 부임하자마자 조선인의 정신을 개조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드는 것이 최우선 목표라고 밝혔다. 이번 여름의 매미소리는 더욱 귀에 거슬렸다.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침략했다. 중일전쟁 이후로 일본은 지원병 제도를 시행하고,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에 나가도록 부추겼다. 조선총독부는 강연회를 주관하여 조선의 지도급 친일인사들이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도록 호소하는 강연을 하게 하였다. 열이 오르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었다.
이철 사장의 사무실로 가는 길에 종로경찰서를 지났다. 경찰서 건물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호가 붙어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
나는 비위가 상해 고개를 재빨리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본과 조선이 하나이니 왜놈이 일으킨 전쟁에 조선 청년들이 나가 싸워 죽으라는 말인가.’
나는 경성 시내에 은밀히 유행하는 노래를 입에 흥얼거렸다. ‘석탄 백탄 탈 때는 연기가 나는 데’로 시작되는 사발가의 노랫말을 고쳐 부르는 것이었다.
“왜놈 지원병으로 죽으면 개죽음이 되고요.
광복군으로 죽으면, 독립의 열사가 되누나.
에헤요 디요, 허송세월을 말아라....."
일본은 조선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에 박차를 가하고 본격적으로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한글의 사용과 교육을 금지하고, 조선 사람들에게 신사 참배를 의무화했다. 조선인의 민족혼을 깡그리 말살하기 위해 성(氏)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새로 만들고 고치는 창씨개명(創氏改名)마저 시행하였다. 미나미 총독이 조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일본식 성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후, 총독부는 6개월 안에 일본식 성(氏)을 정해서 관공서에 제출하라고 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철 사장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급사에게 차를 내오도록 하니, 곧 다기가 들어왔다. 이 사장은 다기에 차를 한 움큼 집어넣으며 말했다.
“지리산 산자락에서 가져온 작설차입니다. 새순을 따서 말린 차이니 향이 좋을 것입니다.”
과연 은은한 향내가 퍼졌다. 이 사장은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향이 입 안에 맴돌 것입니다. 들어보세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자 향긋한 차향이 코끝에 닿았다. 차를 입에 머금으며 맛을 음미하는데 이 사장이 은밀히 말했다.
“얼마 전에 가족과 창경원에 갔었는데, 그곳 화장실에서 특이한 낙서를 보았습니다.”
나는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만담의 소재라도 될 만한 낙서 입니까?”
이 사장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창씨개명을 비난하는 낙서였습니다.”
“어떤 내용이었어요?”
“‘창씨를 하지 말라, 나라를 빼앗겼는데 이름까지 빼앗길 건가. 성을 바꾸는 놈은 짐승이다.’라고 쓴 것과 ‘떨쳐 일어나라 한국 청년아. 저주하자 미나미 지로를, 성씨 바꾸게 한 놈이니, 때려 죽어야 한다.’ 였어요. 총독부는 무슨 은혜라도 내리는 듯 조선 사람도 일본식 이름을 갖도록 허락한다고 했지만, 창씨개명은 저들이 원하는 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에요.”
“왜놈들은 조선 사람들이 어떤 민족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벌리는 짓거리예요.”
조선총독의 야심 찬 정책으로 창씨개명을 하였으나, 기한 내에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신고한 가구의 수(戶數)는 턱없이 저조했다. 창씨개명이 지지부진하자 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조선 총독부는 경찰력과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창씨개명을 하도록 협박하고 강권하였다.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불이익을 주어 직장에서 해고를 하고, 학교에 입학을 허가하지 않고 학생들은 퇴학을 시켰다. 또한 전국의 유지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촉구하며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창씨(創氏)와 나’라는 제목으로 매일신보에 글을 실었다.
‘나는 천황의 신민(臣民)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성과 이름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야마 미쓰로(香山光浪)가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광수 선생이 자신의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라는 말은, 조선은 최소한 다음 세대까지 독립하기는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신문기사를 읽고 혼란스러웠다.
얼마 전에 홍명희 선생과 만해스님 댁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이 만주를 완전히 점령하고 장차 중국 대륙도 집어삼키려 하는 정세(情勢)에 대해서 걱정을 나누었다. 만해스님이 말했다.
“일본이 겉보기에는 천하무적인 강국으로 보이나 이제 곧 망할 일만 남았어요.”
홍명희 선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놈들 말대로 욱일승천의 기세인데 어떻게 일본이 곧 망하겠습니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일본은 분수를 모르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요. 왜놈들의 운명은 이제 기울기 시작할 겁니다. 두고 보세요.”
스님의 예언은 다소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시중에 떠도는 일본이 조선을 최소한 200년은 지배할 것이라는 주장에 기가 질렸던 터였다.
이광수 선생의 글로 인해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절망하기도 하고 분개하기도 했다. 신문의 글을 보고 흥분한 젊은이들이 이광수 선생의 집 앞에 오물을 쏟아부어 온 동네가 냄새로 진동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수린이 나의 사무실에 들러 윤치호 선생님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금 선생님 집 앞에 학생과 청년들이 몰려가 연좌농성을 벌이고 야단 났대!”
“선생님도 결국......”
“총독부의 압력을 어떻게 견디시겠나? 해평 윤씨 문중이 결정을 하니, 어쩔 수없이 따랐다는 것이야. 윤씨를 일본 성 이토(伊東)로 바꾸어, 이토 지코(伊東致昊)라 지었대. 혹시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성인가?”
존경해온 교장선생님도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하니 절망감이 밀려왔다.
극장에서 공연 준비에 여념이 없는 데 귀에 익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신불출!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잘 알고 있겠지?”
고개를 들어 보니 예상대로 미와 경부였다. 미와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는 미와가 왜 왔는지 실마리라도 찾으려고 미와의 얼굴을 살폈다.
“자네는 창씨개명을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짐작이 갔다.
“그야, 내선일체를 촉진할 수 있는 조치……”
미와는 나의 말을 자르며 따졌다.
“솔선수범하여 창씨개명을 해야 할 위인이 아직 미적거리는 이유는 뭐야?”
나는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자손 대대로 전해 줄 건데, 함부로 지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서둘러야 할 것이야! 나와 경시청이 신불출 자네가 충성된 황국신민인지 지켜보고 있음을 명심하게.”
미와는 협박성 채근을 하고 극장을 나갔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독립협회를 이끈 윤치호 선생님, 2.8 독립선언서와 3.1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 선생과 최남선 선생도 엄혹한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였다. 그런데도 나는 버터야 할까? 아니, 버틸 수 있을까?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만해스님이 나에게 법구경(法句經) 구절을 써주던 생각이 났다.
만해스님 댁을 방문하였을 때 만주사변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나는 친일 변절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만해스님은 식민지 백성으로 친일 (親日)하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살기 위해 친일을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쌍수(雙手)를 들고 앞장서서 친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경찰서에 거의 반이나 차지하는 조선인 일본 경찰이나 일본 관리가 된 사람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했다. 만해스님은 식민지 백성으로 반일(反日) 하는 데도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죽을 각오로 대놓고 반일을 하는 것인데, 이건 나라밖에서 독립군이 되거나 나라 안에서는 감옥에 오래 들어앉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째 경우는 가능한 한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반일을 하는 것인데, 죽을 각오로 반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도 효과적일 수 있다고 했다. 스님이 나를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신불출군은 두 번째 경우야. 사람들은 자네 이름이 왜 불출(不出)인지 알아. 총독부가 조선 사람을 억압하고 있다는 상징이야. 저항의 상징이고.”
스님은 내가 유명해질수록 ‘불출’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탄압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 댁을 떠나기 전에 스님은 나에게 법구경 (法句經)의 구절을 써주며 어려울 때가 오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항상 새벽처럼 깨어있어라.
자기의 마음을 지켜라.
깨어 있음은 죽지 않는 길이다.‘
며칠 뒤 미와가 다시 찾아왔다. 미와는 나에게 봉해져 있는 봉투를 건넸다. 봉투를 열어보니 뜻밖에도 총독부에서 내린 문서였다.
‘하나, 빠른 시일 내에 창씨개명을 할 것. 둘, 공연을 통해 이 사실을 전 조선인에게 알릴 것. 셋, 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사서 만담가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만담전문학교를 세워 운영을 신불출에게 맡기겠음.’
총독부는 명령과 함께 특혜를 주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미와가 말했다.
“황국(皇國)의 충실한 신민에게 내리는 천황폐하의 은사(恩賜)이시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일본 경찰은 만담가를 양성하는 학교 건립이 나의 꿈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는가.‘
종로경찰서가 얼마나 철저하게 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지에 대해 새삼 놀랐다. 미와는 일주일 이내에 일본식 성명(姓名)을 지어서 경성부청에 신고하고, 곧 있을 총독부가 주관하는 창씨개명 계몽 공연회에 나와서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했다.
조선 문예회(朝鮮文藝會)에서 연락이 왔다. 1940년 6월 10일, 제일극장에서 창씨개명 계몽 공연을 개최하는데, 출연해야 한다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 문예회에 강요한 것이었다. 하필이면 6월 10일인가? 그날은 순종 임금 장례식 때 일제에 맞서 만세저항을 일으킨 날이 아닌가. 그날 종로 시위 현장에 있었던 내가 관객 앞에서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다니.
전수린도 결국 창씨개명을 하였다고 했다. 전수린은 만주와 일본, 사할린의 탄광지대에 가서 고생하는 조선인 노무자들을 위로하려 위문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는 순조롭게 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일본식 성을 다마가와(玉川)로 정했다고 했다. 전수린은 분을 삭이며 말했다.
“무대를 포기하는 것은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네.”
총독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by유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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