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는 중년 남자] 에어컨 함부로 켤 수 있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는 평생의 절반 이상을 에어컨 없이 사셨고 에어컨을 산 뒤로는 플러그를 뽑아두고 계셨다. 아버지 더워요 에어컨 좀 켜요, 하면 늘 말씀하셨다. 가만히 있어라,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 어머니는 부엌일로 바빴고 자식들은 하는 일 없이 가만있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는 에어컨 바람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 음식점에 모시고 가면 에어컨 바람이 잘 닿는 자리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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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보일러를 아주 약하게 트셨다. TV 드라마 속 사람들은 한겨울에도 집 안에서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버지 추워요 보일러 좀 올려요, 하면 말씀하셨다. 뭘 좀 입어라, 왜 벌거벗고 춥다고 하니. 그래도 겨울은 날 만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껴입으면 되니까. 그러나 여름엔 더 이상 벗을 게 없을 만큼 벗어도 더웠다. 내 기억 속 열대야 땐 열어둔 창문 밖 풀벌레 소리와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가 들린다. 결혼해서 독립하면 에어컨과 보일러를 펑펑 틀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결혼해서 아버지가 되니 아버지처럼 됐다. 이맘때 관리비 고지서가 나오면 전기료부터 들여다본다. 에어컨 안 틀던 때보다 얼마나 늘었는지, 작년 같은 달과는 어떤지 확인한다. 마치 집안의 흥망성쇠가 전기료에 달려있기라도 한 것처럼 살핀다. 그러고 나서 아파트 공동 전기료는 얼마인지 본다. 어쩐지 관리 사무소는 북극처럼 춥더군, 하고 투덜거린다.
사실 전기료가 많이 나와봐야 다른 지출에 비하면 큰돈이라고 할 수 없다. 친구와 둘이 삼겹살에 소주 한 병씩 나눠 마시면 한 달 전기료가 나온다. 그러나 소주는 참을 수 없고 무더위는 참을 수 있다. 아버지 말씀을 뒤늦게 실천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선풍기 바람을 쐬면 별로 덥지 않다. 이건 돈 문제가 아니야, 가풍(家風)을 지키는 거야 하며 땀을 닦아낸다.
요즘 같은 때는 에어컨을 틀 수밖에 없다. 강풍을 틀어 빠르게 실내 온도를 내린 뒤 약풍으로 바꾸고 서서히 희망 온도를 높여간다. 에어컨 앞에 선풍기를 두고 찬 바람을 천장 쪽으로 보낸다. 리모컨에 달린 인공지능 버튼 같은 건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전기료를 절약하면서 냉방 효과를 최대로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친구 여럿과 만나 먹고 마셨다. 돈 잘 버는 녀석이 계산서를 집어 드는 걸 보고 빼앗았다. 돈 많다고 유세 떠냐, 나도 한번 내보자 하며 호기를 부렸다. 석 달 치 전기료가 나왔다. 집에 와서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를 틀었다. 지독하게 더웠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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