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월요일] 지게를 진 형을 보며
입력2022.08.08. 오전 12:07

-이만하면 됐다
내려가자!
중학교만 마치고 지게를
진 셋째 형이 말했다
청미래 넝쿨 사이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나에게
송진 냄새 벌건 톱을 건네주고,
육철낫은 생솔가지 다발에 꽂았다
다리만 보이는 형의 지게를
따라 내려오는 산길은
뒤도 앞도 산이었다
돌보를 건너야 하는 냇가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오십이 넘도록
그토록 명징한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선종구 作 '명징'
겨울날 시인은 '명징(明澄)'이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한 순간을 만난다. 말 없는 노동이 끝나고 형이 던진 단호한 한마디는 '명징'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전보다도 깊고 정확하다.
때때로 언어의 정답을 삶 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삶은 그 자체로 늘 스승이다.
이 시는 한 장의 수묵화를 보여준다. 그 한 장의 풍경에는 장편소설을 능가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커다란 짐을 진 형을 따라 내려오는 산길을 묘사하는 부분은 정말 압권이다.
참 좋은 시다.
@명징( 明澄 ):깨끗하고 맑다.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praha@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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