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다 (12)
학사루 현판 사건은 유자광의 가슴 깊은 곳에 오랫동안 남았다
12장
유자광은 어려운 일을 겪은 뒤라, 기분도 전환할 겸 아내 박씨와 함께 함양 처갓집으로 길을 떠났다.
김종직은 장인인 박치인을 통해 유자광이 함양에 들린다는 기별을 미리 받았다. 지방의 수령은 조정에서 대신급 관리가 관할 고을에 들리면, 깍듯이 모시고 부모 친지들을 불러 잔치를 베푸는 것이 대개 행하는 일이었다.
김종직은 벼슬이 1품이며 공신인 무령군 유자광이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불편하였다.
‘사사로운 행차이면 아무도 모르게 다녀가면 될 터인데, 미리 관청에 기별까지 하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김종직은 유자광과 그의 처가 식구를 위한 융숭한 대접을 할 마음이 없었다.
‘그가 재상이고 공신으로 조정에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지방수령인 내가 아부하는 것은 시류에 영합하는 일이다. 어찌 의심받을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김종직은 호장과 이방을 불렀다.
"무령군이 이곳에 와서 나를 찾으면, 나는 함양읍에서 멀리 떨어진 부락을 둘러보고 있다고 전하시오.”
함양의 아전들은 걱정이 되어 김종직에게 말했다.
"무령군께서 오신다고 미리 기별을 한 것은 처가 식구들 앞에서 대접을 융숭히 받겠다는 뜻인데, 사또께서 관아를 비우고 출타를 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크게 상하실 것입니다.”
사또는 사도(使道)에서 나온 말로, ‘왕의 명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를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김종직도 온다는 기별을 받고도 자리를 비우니 부담스러웠지만 만나서 굽실거리며 예를 갖추는 것은 더욱 싫었다.
"무령군이 공적인 일로 오는 것은 아니지 않소. 사사로이 처갓집을 들리는 것이니, 그를 만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소.”
관아에서 김종직의 잔심부름을 하는 통인(通引)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무령군이 함양 관내에 도착했습니다!”
김종직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함양 관아가 내려다보이는 숲이 우거진 언덕으로 올라갔다.
훗날 이 언덕을 관리가 숨은 곳이라는 뜻으로 사람들은 이은대(吏隱臺)라고 불렀다.
김종직은 언덕에 편한 자리를 찾아 앉아서 도연명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었다.
“내가 인생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은 늦지 않았다.
이제는 깨달았으니, 지난날의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었음을 알았다.”
도연명은 중국 동진 후기에서 남조 송대 초기까지 살았던 전원시인(田園詩人)이었다. 그는 고을 수령이 되었다가 평소 경멸하던 상관이 고을을 감찰하러 온다고 하니 허리를 굽혀 소인에게 예를 올리는 일을 할 수 없다 하며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는 낙향하였다.
김종직은 도연명의 글을 읊다가 멈추고, 관아를 내려다보니 유자광이 도착했는지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보였다.
유자광이 함양 관아에 도착하니 달려 나와 맞아주어야 할 고을 수령은 보이지 않고 아전들만 머리를 조아렸다.
"군수는 어디에 있느냐?”
아전 중의 우두머리인 호장이 황급히 대답했다.
"군수께서는 부득이하게 예정된 일로 멀리 출타를 가셨습니다.”
유자광은 속으로 괘씸했다.
‘내가 온다고 미리 기별을 주었건만, 잘 차린 잔칫상은 보이지 않고, 출타를 간다? 내가 천한 출신이니 고개를 조아리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유자광은 태연한 척했다.
"고을원이 관내 구석구석 민정을 살피느라고 열심히구나.”
유자광은 김종직이 쓴 예종대왕 시책문을 읽고 그 문장이 훌륭하여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침 함양군수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기를 기대하였다. 막상 함양에 도착하니 김종직이 자신을 피해 나타나지 않으니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아전들이나 함양의 촌로들에게 김종직에 대해 물으니 인심을 잃지 않은 듯했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라 칭찬이 자자했다. 일도 잘하고 평도 좋은데 자신을 피하는 것을 가지고 문제 삼기가 마땅치 않아 묻어두기로 했다.
유자광은 관아 옆에 있는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다.
학사루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랐다고 하여 학사루라 불리었다.
유자광이 누각에 올라 탁 트인 함양의 경치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장가 왔을 때 처음 보았던 지리산 고을인 함양의 산수였다. 그동안 나라에 공을 세워, 1품 재상이 되었고 장인과 처가 식구들의 향역을 면제시켜 자손들의 앞길도 열어주었다. 다시 함양에 오니 지리산과 어우러진 산과 물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유자광은 다시 한번 김종직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잔칫상을 차려놓고 기다려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
장인과 처가 식구들도 불러 보란 듯이 과시하고 싶었는데 새삼스럽게 아쉬웠다.
유자광은 학사루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경치로 서운한 마음을 달래었다. 유자광은 붓을 들어 시를 짓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아전들이 유자광의 시를 칭송하였다. 유자광도 즉석에서 지은 시가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유자광은 옆에 서있는 아전에게 시를 건네주며 현판으로 만들어 최치원 선생의 시 옆에 걸어놓게 명하였다.
유자광이 함양을 떠나고 김종직도 관아로 복귀하여 며칠이 지났다. 김종직은 아전에게서 유자광의 시를 학사루에 현판으로 걸은 것을 보고 받았다.
“무령군께서 학사루에 올라 지은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놓게 하셨습니다.”
김종직은 한가한 시간에 오랜만에 학사루에 올라보니 자신이 존경하는 최치원 선생의 글 옆에 새로운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김종직이 짐작을 하고, 수행한 아전에게 물었다.
"저기 고운(孤雲) 선생의 현판 옆에 새로 걸려 있는 것이 무령군의 글인가?”
김종직은 유자광의 시를 읽어보니 특별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그런 글이었다.
"이 평범한 글이 감히 최치원 선생의 글과 나란히 걸릴 자격이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떼어내도록 하라!”
아전은 손을 비비며 안절부절못했다.
"이 현판은 일등 공신이며 재상인 무령군께서 직접 명하여 걸은 현판이옵니다. 이걸 떼어내면......”
김종직은 아전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공신이고 재상이라고 하여도 후세에 남겨 전할 만한 글이 아니면 어찌 현판으로 남기겠는가? 장차 백 년 뒤에 학사루에 오른 사람이 저 글을 보면 반드시 당시 고을 수령이 정승에게 아부하기 위해 현판으로 남겼다고 하지 않겠는가.”
김종직의 단호한 지시에 아전들은 엉거주춤 현판을 내리며 물었다.
"떼어낸 현판은 어디에 두면 좋겠습니까?”
김종직은 학사루를 내려가면서 답했다.
"버려둘 곳이 마땅하지 않으면 태워버려라!”
유자광의 장인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양에서 아전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이었던 관계로 이 사실은 빠르게 유자광의 귀에 들어갔다.
"대감께서 손수 지은 시가 함양의 학사루에 걸릴 자격이 없다 하여 군수가 현판을 철거했다 하옵니다.”
"이놈을 당장......”
유자광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이마에 푸른 핏줄이 돋았다. 분을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방안을 서성였다. 어떻게 김종직을 혼을 내주어야 분이 풀릴까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거친 숨소리가 온 방을 가득 메웠다.
유자광은 문득 아버지의 당부가 생각났다.
‘감정을 다스려 성내기를 더디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 참을 인(忍)이다. 이 번 일은 가슴에 묻고 가자.’
유자광은 참기로 마음을 먹고도, 얼굴을 벌겋게 달군 노기를 가라앉히는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학사루 현판 사건은 유자광의 가슴 깊은 곳에 오랫동안 남았다. 훗날 유자광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주도하면서, 김종직에게 반역의 죄를 물어, 김종직의 글이 담긴 현판을 모두 떼어내어 버리게 하였다. 성종이 김종직의 글을 좋아하여 궁궐의 전각에 걸어둔 현판과 전국 여러 곳의 건물에 걸려있던 김종직의 글이 담긴 현판은 유자광의 지시로 모두 철거되어 태워져 버렸다.
다음 권에 계속......
'옛(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5>정암진 대승 의병장 곽재우 (0) | 2022.08.29 |
---|---|
이기환의 Hi-story“이순신은요, 원균은요”… (0) | 2022.08.28 |
[이기환의 Hi-story](15)조선이 조용한 은자의 나라라고? (0) | 2022.08.26 |
신의 정원 조선 왕릉36 (0) | 2022.08.26 |
[이기환의 Hi-story](14)조선호랑이는 왜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0) | 2022.08.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