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22) 생과부가 과부가 되더니
입력2022.10.07. 오전 5:00
우대감 사십구재 치른 청송댁
전답 팔고 홀연히 사라지는데
![](https://blog.kakaocdn.net/dn/bOajKB/btrN9lhaCV1/jHjaSqvFeQaDpoFRzURee0/img.jpg)
사인교 가마가 우 대감댁 마당에 도착했다. 덜컥 가마를 내려놓고 가마꾼 네 사람은 축 늘어졌다. 가마문이 열렸지만 우 대감은 혼자 힘으로 나올 수 없었다. 가마꾼들이 가마 속에 누워 있는 우 대감의 사지를 들어 가마문 밖에 깔아놓은 요 위에 눕히고 요 네 귀퉁이를 들고 사랑방으로 옮겨 눕혔다.
안방마님 청송댁이 사랑방으로 들어와 중풍으로 쓰러져 사인교에 실려온 남편 우 대감의 몰골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회한과 증오와 실망의 눈물이지 연민의 눈물은 아니다.
열일곱에 가문 좋은 우씨 집안의 급제한 새신랑에게 시집왔을 땐 모두가 부러워했지만 신행길 내내 까마귀가 ‘깍 깍’ 거리며 가마를 따라오더니 신방을 차린 초당 앞 살구나무에 앉아 계속 울어댔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가을바람이 불어 우수수 살구잎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그믐달이 걸려 있을 때도 까마귀는 살구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변소에 가려고 방문을 열던 신부는 소스라쳐 놀랐다. ‘깍’ 그놈은 밤에도 외마디로 울었다.
시아버지가 궁수를 불렀다. 저녁나절 궁수의 시위 한번에 까마귀는 살구나무에서 떨어져 신부 청송댁의 치마폭에 처박혔다. 비단치마는 까마귀 피로 얼룩지고 놀라 자빠진 신부는 하혈하며 정신을 잃었다. 배 속에 겨우 자리 잡았던 태아가 유산됐다.
정확히 그날 이후 신랑은 신부 곁에 오지 않았고 달포쯤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 승지로 부임했다. 이제나저제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만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기별은 없었다. 살구나무꽃이 화사하게 벌어져 벌과 나비가 쌍쌍이 날아와 춘정을 나누는 봄이 왔건만 한양 간 신랑은 소식조차 없었다. 몇년이 흘러 시아버지 장례식에 내려와 상주 노릇만 하고 부랴부랴 올라간 신랑. 몇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다. 그 후에는 첩을 얻어 아들딸을 낳았다는 소문만 흘러내려왔다.
덩그런 기와집 시댁을 홀로 지키며 청춘을 날려보낸 청송댁이 지난 세월도 억울한데 다 죽어가는 남편 병수발까지 떠맡게 되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우 대감댁 안방마님 청송댁이 의원을 모셔왔지만 진맥을 마친 의원은 말 한마디 없이 고개만 흔들고는 돌아가 버렸다. 한달을 못 버티고 우 대감은 마흔한해 살아온 이승을 하직했다.
서른여섯 생과부는 진짜 과부가 됐다. 소문으로만 듣던 첩의 아들이 굴건제복하고 내려왔다. 열다섯살 첩 아들은 빈소에 들렀다가 청송댁에게 “어머님, 인사 올리겠습니다”라며 큰절을 했다.
이놈이 자기가 내려와 살 집이라는 듯 상복을 입은 채 집 구석구석을 살폈다. 문상객도 가뭄에 콩 나듯 띄엄띄엄 오자 구일장을 오일장으로 바꿔 선산에 관을 묻어버렸다. 첩 아들이 삼년상을 하겠다는 걸 사십구재를 지내고 탈상했다.
그 녀석이 한양으로 올라간 후 과부 청송댁은 집과 전답을 팔아버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녀가 삼십여리 떨어진 산자락 초가집에 들어가자 “엄마” 외치며 품에 안기는 아들과 초로의 이모가 반겼다. 칠년 동안 아들을 키워준 이모에게 무쭐한 전대를 안겼다.
이튿날 짐꾼의 등에 고리짝 두개를 지우고 이모·아들과 함께 청송댁은 곱게 차려입은 채 단풍이 붉게 물든 산속으로 들어갔다. 십여리나 올라갔나. 아담한 너와집 마당에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 하고 달려가서 안기는 아들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고리짝을 풀어 떡과 육포와 술을 따라 올리고 청송댁과 나무꾼 털보가 마주 보고 절을 해 늦게나마 조촐하게 혼례식을 치렀다.
칠년 전, 털보나무꾼이 통나무 열두지게를 청송댁 뒤꼍에 부려놓고 별당에서 자며 이틀 동안 장작을 패서 처마 밑에 차곡차곡 쌓을 때였다. 부엌에서 목간을 하는 청송댁을 훔쳐 보고 나무꾼 총각이 늦은 밤 안방에 쳐들어가 청송댁을 겁탈했다.
스물아홉살 생과부는 자신의 육신이 아직 쇠락하지 않고 살아서 뜨겁게 꿈틀거리는 데 놀랐다. 뜻밖에 겁탈을 당하고 청송댁은 새로 태어났다. 이제 연하의 나무꾼 마누라가 돼 보글보글 된장을 끓여놓고 나무 팔러 장에 간 남편을 아들과 함께 기다리며 청송댁은 행복의 눈물을 한방울 떨어뜨렸다.
농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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