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잎과 찹쌀과 찬바람으로 빚은 가을 술, 알싸하군
[아무튼, 주말 - 한은형의밤은 부드러워, 마셔] 연엽주
연엽주를 마시고 있다. 연의 잎으로 만든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마실 수 있는 게 아닌 귀한 이 술을.
먼저 향기에 대해 말해야겠지. 술잔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면 달콤하고 콤콤한 냄새가 코 끝에 묻는다. 아주 달지 않아 농밀하다기보다는 깨끗한데, 치즈 냄새처럼 사람을 훅 끌어당긴다. 두려울 정도로 확. 그리고 알싸해. 톡 쏠 정도는 아니고 단맛의 끝을 타고 스윽 올라오는 기분 좋은 탄력이랄까. 블루 치즈보다는 그뤼에르 치즈 정도의 느낌. 우아함을 해치지 않을 선에서, 딱 안전한 정도의 일탈. 이런 게 격조가 아니라면 뭐가 격조일까 싶다.
내가 이렇게 한껏 술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것은 언제 또 이 술을 먹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렇다. 내게는 두 병이 있었는데, 한 병은 이미 비었고 한 병을 또 딴 참이다. 연엽주는 곧 사라질 것이지만, 이렇게 글로 남겨놓으면 연엽주를 재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비어지고 있는 술병을 보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중에는 팔지 않고, 누군가 빚어야 한다. 그게 나는 아니고, 또 아무나 빚을 수도 없다. 누구나 빚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이 술을 먹다가 생각했던 것이다. 연엽주는 아무나 빚을 수는 없겠다고. 술과 음식의 맛 모두에 정통한,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 경지를 아는 사람이 빚어야 한다고.
아주 절묘한 맛이라 그렇다. 극치라기보다는 중용에 가까운 맛이다. 연엽주를 처음 마셔봄에도 알겠다. 이 술은 넘치는 술이 아니라고. 넘침을 경계해야 하는 술이라고. 계영배 같은, 술이 어느 정도 차면 술잔 옆의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그런 잔에 어울리는 술이다. 연엽주를 마시고 있는 덕에 고대 유물 전시실에서나 본 계영배를 이렇게 처음 글로 써본다.
추석 연휴에 만난 분께 연꽃으로 만드는 술에 대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연의 줄기를 통과시켜 먹는 하심주와 연의 잎으로 담는다는 연엽주에 대하여. 서늘한 바람이 나면 서쪽의 연못에 모여 연꽃을 보았다는 옛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이다. 연꽃의 부산물로 만드는 술은 대체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고 나는 말했다. 물론 술을 마시며.
한 달 후, 그분께서 술을 담가 보내주셨다. 그러니까 연엽주를. 내가 연엽주 이야기를 해서 간만에 이 술을 빚으셨다며. 찹쌀로 빚어 새콤달콤할 거라고 했다. 술을 먹기나 했지 담가본 적도 없고, 술이 익어가는 과정에 어떤 지식도 없는 나는 찹쌀로 빚으면 새콤달콤해진다는 걸 이렇게 알게 되었다. 함께 먹으라며 한가득 넣어주신 참송이 버섯을 쪽쪽 찢어 석쇠에 구워 연엽주와 함께 마셨다.
나는 이 술이 전설이나 이야기 속의 술인 줄만 알았는데… 세상 어디엔가는 고수가 있고, 그 은둔 고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이렇게 나 같은 사람이 덕을 보고 있다. 이런 게 향원익청(香遠益淸)인가 싶다. 향기는 멀리 갈수록 맑음을 더한다는 이 뜻은 연꽃으로부터 나왔다. 도연명은 오직 국화를, 당나라 이래로 사람들은 모란만을 사랑하는데 북송의 철학자 주돈이는 연꽃을 사랑한다며 이렇게 썼다. “나는 홀로 연을 사랑하리라. 연은 진흙에서 났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깨끗이 씻기어도 요염하지 않다. (…) 그 향기는 멀리서 맡을수록 더욱 맑으며 정정하고…” 이 글의 제목은 ‘애련설(愛蓮說)’. 그러니까 ‘연꽃을 사랑하는 이야기’다.
연엽주가 전설이나 이야기 속의 술이라고 한 것은, 처음으로 이 술의 존재를 안 게 이야기로부터였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한 대목이었다. ‘춘향전’에서 연엽주를 처음으로 들었다. “술상을 차릴 적에 술안주 등을 볼 것 같으면 생김새도 정결하다. 큰 그릇 소갈비찜, 작은 그릇 제육찜, 푸드덕 나는 메추리탕에”라고 안주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껏 가슴에 불을 당기다가 이윽고 술에 대해 나온다. “술 이름을 이를진대, 이태백 포도주와 천년을 살았다는 안기생의 자하주와 산림처사의 송엽주와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 팔팔 뛰는 소주, 약주”까지 읊다가 바로 다음, 이 대목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 골라내어 주전자에 가득 부어 청동 화로 백탄 불에 냉수 끓는 냄비 가운데 놓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데워 낸다.”
이러니 그럴 수밖에. 이태백의 포도주니 과하주니 금로주니 하는 듣기만 해도 진귀해 보이는 술들을 물리치고 선택된 게 연엽주였다. 연엽주는 그런 술인 것이다. 꽤나 여기저기에 술을 마시러 다니는데 이 술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래서 이 술은 이야기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눈앞의 연엽주를 보니 마치 전설의 현현 같았고, 현실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또 아니면 메타버스? 이러면서 잠시 아득해졌다.
연엽주는 과연 고귀한 만큼 까다로운 술이었다. 찾아보니 가장 먼저 나오는 문장이 이것이다. “연엽주는 매우 까다로운 술이다.” 연잎의 수분이 가장 많을 때인 한여름은 피하고, 서리가 내리기 직전인 늦여름이나 입추 무렵에 채취한 연잎을 써야 술이 시어질 염려가 없다는 사실을 유념하라고 한다. 또 한여름의 열기가 가라앉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가 술빚기에 가장 좋다고. 연잎의 수분이 줄어들면서 향이 좋아지는 때라서, 이때의 연잎으로 술을 빚게 되면 향이 오묘해진다고.
이 이야기까지 듣고 보니 연엽주의 재료는 찹쌀과 연잎만이 아닌 듯하다. 찬바람과 가을 공기도 재료 같고, 그것들이 이 술에 다량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술 냄새가 더 진하게 끼친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바람을 느끼며, 또 계절의 술을 마시는 것. 이런 걸 할 수 있어서 좋다. 글을 알아서, 술을 알아서 참 좋다. 그렇게 이 계절을 온전히 누릴 수 있어서. 이 계절의 술 연엽주와 함께할 수 있어서.
아, 연엽주와 함께 보내주신 엽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가을밤은 부드러워, 마셔’입니다. 이 칼럼의 제목인 ‘밤은 부드러워, 마셔’에 가을을 붙여주시니 그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밤 송이가 쩌억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가을밤이다.
가을밤은 부드러워, 마셔입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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