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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10

by 까망잉크 2022. 11. 4.

# Trace 14.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10

흥청망청 정기누설한 폭군, 연산군(제 10대왕 1494~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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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조선 최고의 폭군으로이었지만 선대왕들에 견주어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지는 않았고, 어머니를 잃게되면서 성격상의 문제가 형성되었다고 이해됩니다.

사실, 어머니 윤씨는 교만하고 악독한 성정(性情)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후궁들을 시기질투하여 저주하고 굿하는 비방까지 발각되어 성종은 빈으로까지 강등하였지만, 패악을 멈추지 않고 왕의 독살음모까지 보여 결국 폐서인되어 사사(賜死 독약을 내려 죽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은 왕좌에 오른 후에야 어머니 폐비 윤씨의 파란만장하고 억울한 삶에 충격을 받고 타락하고 실정(失政 정치를 잘 못함)에 폭정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또한, 안질(眼疾)로 인해 많이 위축되어 있어, 책만 봐도 눈에 티끌이 덮는 거 같다거나 안개가 앞을 가리고 있는 듯하다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글을 읽고 쓸수가 없어 신하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봐 경연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결국에는 원성과 빈축을 사게되었습니다. 시각장애까지 진행되니 열등감이 깊어져 국정을 보살필 수 없는 지경인데도 말입니다.

연산군은 두 번의 피비린내나는 사화(士禍)로 산하들에게 절대왕권을 경고합니다. 하지만, 강력해진 왕권으로 국가는 돌보지않고, 사냥과 사치, 유희, 향략 등 일차적인 욕정만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잔치에 동원되는 흥청들의 꾸밈 비용과 진귀한 음식들을 마련하느라 내수사의 재정이 비어가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의 치세는 50년 동안이나 사화(士禍)라는 피의 정쟁을 벌이다가, 선조대왕이후부터는 붕당(朋黨)으로 정치세력이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산군 4년(1498) 조의제문사건으로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자의 관을 쪼개어 목을 벰)까지 하는 조선 최초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연산군 10년(1504년)에는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까지 벌이는 조선판 네로황제였습니다

세자시절부터 창진(瘡疹 천연두) 피부병으로 고생했고, 왕에 오르면서는 얼굴에 나는 부스럼인 면창(面瘡)을 앓으며 얼굴이 붉어지고 고름이 나며 소변이 잦았습니다. 양기(陽氣)부족와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었을텐데, 명나라에서 <웅왕해독산>, <선응고>라는 귀한치료제를 구해왔다고도 합니다.

<승정원일기> 연산군 1년 1월8일에는 연산군이 잦은 소변으로 치료약을 처방받았고, 아랫배에 뜸을 떠서 따뜻하게 뎁혀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소변이 잦으시므로 축천원을 드리라 하시는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오래 여차에 계시고 조석으로 곡위에 나가시므로 추위에 상하여 그렇게 된 것이오니, 만약 하상 사폭과 버선에다 모피를 붙여서 하부를 따뜻하게 하면 이 증세가 없어질 것입니다고 하니, 전교하기를, 의원의 말이 ‘쑥으로 뜨라’하므로 내가 방금 시험하는 중이며, 잠방이 속에 산양피를 붙이려 하였더니, 소변 자주 나오는 증세가 전일보다 조금 덜하다.”하였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방탕한 생활로 비뇨생식 계통의 양기(陽氣)를 많이 소모되었음을 유추하겠습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생활 중 아들의 죽음까지 듣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결국, 폐위 두 달만에 화병(火病)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종기와 중종 1년 강화도에 돌았던 전염병 역질(疫疾), 혹은 말라리아 학질(瘧疾)로 31세에 승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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