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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영하의 추위에도 뛴다… 소맥보다 달콤하다는 ‘퇴근런’을 아십니까

by 까망잉크 2022. 12. 10.

[아무튼, 주말] 영하의 추위에도 뛴다… 소맥보다 달콤하다는 ‘퇴근런’을 아십니까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러닝크루’와 달려보니

 
입력 2022.12.10 03

월요일 저녁이 되면 변리사 김호준(35)씨는 ‘수퍼맨’이 된다. 순식간에 양복에서 쫄쫄이 슈트로 갈아입는 수퍼맨 클라크 켄트처럼, 퇴근과 동시에 회사 화장실로 달려가 정장을 벗어 던지고 그 아래 입고 있던 레깅스 차림으로 변신한다. 그가 하루 종일 슈트 안에 레깅스를 입고 있는 불편을 감수하는 건 오로지 직장인 저녁 달리기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바로 주말보다 더 기다려지는 퇴근런(run)! 광화문광장에서 다른 러너들과 만나 경복궁 돌담길, 삼청동 맛집 거리, 종로 빌딩 숲을 무아지경으로 달리다 보면 어느새 1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김씨는 “올 초부터 매주 야간 러닝을 시작했는데 크로스핏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해도 꿈쩍 않던 체지방이 쭉쭉 빠졌다”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우(戰友)처럼 함께 달린 러닝 동료를 만나 운동하는 맛에 좋아하던 클럽도, 저녁 술자리도 끊었다”고 말했다.

요즘 해가 진 한강 공원이나 서울 주요 번화가는 퇴근런을 즐기는 달리기 동호회 일명 ‘러닝 크루’들이 지배한다. 러닝 크루는 온라인에서 대학생·직장인이 중심이 돼 결성하는 모임. 모임 리더가 소셜미디어(SNS)에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면 서울 곳곳에서 러너들이 집결해 레이스를 펼친다. 경광봉을 든 페이서(pacer·속도 조절자)의 구령에 맞춰 10~20명의 젊은 러너들이 대열을 이뤄 뛰는 모습은 도심의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무튼, 주말>이 이들과 서울의 밤을 달려봤다.

초등학교 교사이자 러닝 인플루언서로 활동중인 최주진(32)씨. 달리기를 비롯 여러 스포츠 종목의 사진,영상이 인기를 얻으며 4만명이 넘는 인스타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사진작가 릭스

◇숨 헉헉대다가 카메라 앞에선 ‘활짝’

지난 2일 밤 8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앞 광장에 러닝 크루 ‘아그레(Agre)’ 회원 30여 명이 모였다. 흥인지문 앞에서 시작해 청계천을 지나 종로 광교 사거리를 찍고 돌아오는 약 6km 코스를 함께 뛰었다. 러너들의 실력이 다르기 때문에 1km를 주파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530(5분30초)팀과 700(7분)팀으로 조를 나눴다. 주저 없이 700팀을 택했다. 20대 같은 싱싱한 무릎도 아니고, 5분 이상 달려본 게 15년 전 군 제대 후 처음이라 ‘중도 낙오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부터 들었기 때문. 그런데 막상 달리기 시작하자 기우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보다 평이한 코스였던 점도 있지만, 달리는 내내 ‘함성 발사’ ‘사진 촬영’ ‘주변에 손 흔들기’ 등 클럽 축제 같은 이벤트가 정신없이 펼쳐져 힘든 걸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앞서 가던 페이서들이 손을 흔들며 “보행자 조심!” “바닥 조심!”을 외치면 뒤따르는 러너들도 복창했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캐럴 음악을 틀자 일제히 박수를 치고, “파이팅!”을 외쳤다. 길가에 카페가 보일 때마다 러너 무리 속 누군가 “모두 손 흔듭시다!”라고 했다. 뛰고 박수 치고 소리 꽥꽥 지르다 보니 영하 2도의 추위도 날아갔다.

아그레 같은 러닝 크루는 현재 서울에만 100여 개가 번성하고 있다. 원래는 고독하게 혼자 뛰는 ‘혼뛰족’이 대부분이었는데 떼로 몰려다니며 달리기를 즐기는 모임이 급증하면서 러너들의 생태계가 바뀐 것. 최근 4~5년 사이 자신이 달리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SNS에 올리는 이른바 ‘런스타그램’(달리기를 뜻하는 ‘런’과 인스타그램의 합성어)이 크게 유행하면서부터 생긴 변화다. 멋진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그룹을 인솔하는 ‘크루장’, 전문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포토그래퍼’ 등 전문 인력을 갖추면서 조직이 커진 것.

역시나 이날 아그레 러너들이 가장 많이 반복한 것도 사진을 찍는 일이었다. 삼보일배하듯 일정 구간마다 찍터벌(사진사를 뜻하는 ‘찍사’와 인터벌을 합친 말)이라 불리는 촬영 담당 러너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여기 봐요’ 하면 고개를 들고 힘들지 않은 척 웃는 일이 반복됐다. 풀메이크업을 한 여성 러너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리면서도 스마트폰을 들고 셀카를 찍었다. 중간 분기점에서 가진 휴식 시간에도 삼삼오오 모여 손 하트, 볼 하트를 번갈아 하며 런스타 촬영은 계속됐다.

야간 러닝 후 높이 점프하고 있는 이강선씨. 앱으로 달린 거리와 시간, 속도를 표시했다. /사진작가 릭스

◇먹스타 밀어낸 런스타

7일 현재 인스타그램에서 ‘#런스타그램’을 검색하면 관련 게시물만 92만건이 넘는다. 한때 SNS를 도배했던 ‘먹스타그램’(맛집 인증샷·약 31만건)보다 많은 수치다. 뛰기 전 준비운동 하는 모습, 달리며 환호하는 모습, 골인 후 공중 부양 하듯 높이 뛰어오른 모습 등 사진 종류도 다양하다. 러너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는 걸까.

 

3년 차 러너인 회사원 김순경(34)씨는 “처음 5km를 완주하고 찍은 사진을 보면 마치 택배 아저씨를 마중 나갈 때처럼 들떠 있는 표정이어서 한참 웃었던 적이 있다”며 “고통 이후 행복감을 느끼는 러너스 하이 때문에 나온 표정인데, 그 이후부터 달리기를 하며 사진 찍는 게 최애 취미가 됐다”고 했다. 김서연(32)씨는 “한때 보디 프로필 촬영이 유행한 것처럼 내 리즈 시절(전성기) 모습을 남기고 싶어 귀찮아도 부지런히 달리는 모습을 찍는다”며 “SNS에 자신의 명품 백을 자랑하거나 맛집에 왔다는 걸 보여주는 것보다 달리기로 건강한 매력을 뽐내는 게 훨씬 멋진 것 같다”고 했다. 연정미(29)씨는 “예전엔 스포츠 브라톱(가슴 부위만 가리는 짧은 윗옷)을 입고 한강을 달리는 여성 러너들을 향해 ‘보기 흉하다’ ‘관종 같다’고 하던 어른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당당해 보여 멋지다’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했다.

잘 달리는 것만큼 잘 찍히는 게 중요한 MZ세대. 이들은 사진 찍는 노하우도 활발히 공유한다. 턱을 당기고, 팔 동작을 크게 하는 건 기본. 안 쓰던 안면 근육을 총동원해 세상 가장 행복한 듯한 표정을 짓는 건 필수다. 최고 난이도 기술은 캥거루가 뛰는 것처럼 뒷꿈치를 높이 들고 발등을 앞으로 내밀며 겅중겅중 달리는 자세다. 이렇게 하면 사진에서 다리가 길어 보인다. 과거 한강 주변을 달리던 러너들은 멋진 야경 사진을 찍기 위해 최근엔 롯데월드타워 같은 고층 빌딩이나 고궁이 자리한 도심으로 주행 반경을 넓히고 있다. 2년 차 러너인 회사원 윤진석(39)씨는 “멋진 달리기 자세를 만들기 위해 러닝 모임에서 전문 코치를 초빙하고, 러닝 크루 내에 소모임을 만들어 웨이트, 등산, 요가 같은 보충 훈련도 한다”고 했다.

러닝 동호회 '아그레' 회원들이 지난달 서울 광화문 앞을 달리고 있다. 이들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겨울에도 매주 2~3회 야간 달리기를 한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러닝 동호회 '아그레' 회원들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너고 있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달리기로 인생 바꾼 ‘덕업일치’

런스타그램 유행은 수많은 ‘러닝 인플루언서’들을 낳았다. ‘런소영’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임소영(30)씨는 ‘한복 러너’로 유명하다. 수영 강사 출신인 임씨는 10년 전 한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의 전통을 알리기 위해 치마를 짧게 줄인 한복을 입고 풀코스를 완주한 사진으로 화제를 모았다. 현재 인스타그램 팔로어만 11만명이 넘는다. 최근엔 플로깅(조깅하며 쓰레기를 줍는 활동), 기부런(마라톤하며 기부함) 등 사회 공헌 활동도 하고 있다. 임씨는 “아직 일부에선 ‘러닝 많이 하면 빨리 늙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달리기를 하면서 건강도 좋아지고 의미 있는 일도 할 수 있다는 건강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앞장 서고 싶다”며 “내년엔 남성 러너들도 한복을 입고 해외 마라톤 대회에서 함께 달릴 계획”이라고 했다.

'러닝 인플루언서'인 임소영씨가 한복 차림으로 참가한 한 벨기에 마라톤 대회에서 완주 후 받은 메달을 들고 있는 모습. 임씨는 러닝 사진, 영상으로 인스타그램에서만 11만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임소영 제공

초등학교 교사인 최주진(32)씨는 달리기를 비롯해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사진·영상으로 SNS에서 주목받은 만능 체육인. 올해로 달리기 경력 9년 차인 최씨는 마라톤 대회 단거리 종목에 참가하는 초보자들을 지도하는 ‘러닝 어드바이저’로 활동하고 있다. 인스타 팔로어는 4만명. 최씨는 “초보 러너들이 달리기 그 자체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스마트 워치 없이 달리기’ ‘비슷한 실력의 크루들과 함께 달리기’를 권하고 있다”며 “달리기를 무작정 빨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즐길 수 있게 돕고 싶다”고 했다.

마라톤 행사 기획 업체 런더풀의 창업자인 안정은(30)씨는 달리기를 아예 직업으로 삼아 ‘덕업일치’를 이룬 사례다. 이공계 출신인 안씨는 IT 기업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퇴사했다. 이후 중국 항공사에 승무원으로 합격했지만 사드 사태로 취업 비자 발급이 안 되면서 좌절됐다. 안씨는 절망감이 들 때마다 동네 앞 공원을 무작정 달렸는데 이를 계기로 달리기에 빠져 평생 업으로 삼게 된 것. 마라톤 풀코스를 12차례 완주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책과 강연으로 알리는 ‘러닝 전도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안씨는 “모든 걸 세상 탓으로 돌린 시절도 있었지만 달리기를 통해 내 자신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며 “달리기를 하면 건강해지고 다이어트가 되는 건 별책 부록 같은 것이고 진정한 달리기의 매력은 진실된 나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러닝 전도사'로 유명한 안정은(가운데) 런더풀 대표가 자신이 운영하는 러닝 동호회 '탑걸즈' 회원들과 달리기를 하고 있다. /안정은 제공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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