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술 읽는 삼국지](2) 폭정에 성난 민심, 세 영웅이 만나 뜻을 모으다
입력 2023.01.18 06:00
삼국연의의 첫 회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도원결의(桃園結義)’ 장면이 나옵니다. 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관우, 장비가 서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생판 처음 보는 이들을 일심동체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황건적(黃巾賊)’이었습니다. 황건적의 주체는 힘없는 백성입니다. 착하고 온순한 백성이 도적이 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황건적의 수장, 장각 [출처=예슝(葉雄) 화백]
후한 말기는 외척과 환관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농사는 매년 반복되는 자연재해로 먹고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관리들의 폭정은 날마다 백성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세상이 이렇다보니 별 해괴망측한 일들도 벌어졌습니다. 옥좌에 푸른 뱀이 나타나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했습니다. 역사서인 『후한서』에 기록된 내용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낙양성의 상서문(上西門) 바깥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 가슴은 하나고 머리와 어깨는 둘이었다. 해괴한 일로 여겨서 아이를 버렸다. 이후로 사람들은 나라의 정치가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나자, “위아래 구별이 없는 머리가 둘 달린 그 꼴”이라고 하였다.
해괴한 일이 이와 같았기에 소설에서도 괴이한 일들을 맘껏 표현한 것입니다.
황건적을 이끈 지도자는 장각과 그 형제들입니다. 장각은 과거급제는 못했지만 상당한 수재였습니다. 그가 어느 날,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는 도인을 만나 『태평요술(太平要術)』이라는 천서(天書) 세 권을 얻어 밤낮으로 독파하고 그 뜻을 터득합니다. 그리고는 피폐한 백성들을 모아 치유해주었습니다. 이 같은 장각의 선행은 바람보다 빠르게 번져나가 그를 스승으로 따르는 무리가 넘쳐났습니다. 이에 장각은 ‘태평도(太平道)’를 만들고 스스로를 태평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극히 얻기 어려운 것이 민심인데 지금 그 민심이 나를 따르고 있다. 이런 기세를 타고 천하를 얻지 못한다면 진정 애석한 일이 아니겠느냐?”
장각은 신도수가 늘어나자 야심이 생겼습니다. 남화노선이 천서를 주면서 ‘다른 마음이 싹트면 반드시 앙갚음을 당한다.’고 한 경고의 말도 잊었습니다. 급기야 장각은 동생들과 함께 왕조의 타도를 외치며 신도들에게 총진군을 명령합니다. 이에 전국의 신도들이 분연히 일어섭니다. 이들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습니다. 가뭄과 홍수에 이은 전염병의 창궐, 각종 조세와 부역에 따른 참상은 이미 죽음이라는 극한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이들 역시 죽을 때 죽더라도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황건적이 기세를 몰아치며 유비와 장비의 고향인 탁군(涿郡)까지 다가오자, 유주태수가 황건적을 소탕하는 의병을 모집하는 방을 붙입니다. 이 방을 본 두 사람은 토호(土豪)를 죽이고 강호를 떠돌던 관우를 만나 술상을 마주합니다. 이들은 곧바로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고 장차 큰일을 도모하기로 합니다.
복숭아꽃이 활짝 핀 봄날, 세 의형제는 3백 명의 장정들과 함께 검은 소와 흰 말을 잡아 재물을 바치고 천지의 신들께 절하고 맹세합니다.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 [출처=예슝(葉雄) 화백]
“유비, 관우, 장비는 비록 성은 다르지만 이미 형제가 되기로 맹세하였사오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어려운 자를 구하고 위급한 이를 도우며, 위로는 국가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편안히 하겠나이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한 날 한 시에 죽기를 원하오니 하늘과 땅의 신께서는 진실로 굽어 살피시어 의리를 배반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여주소서!”
만고에 회자되는 ‘도원결의’ 장면입니다. 삽화를 곁들여 보시면 명장면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첫 회에 삼형제의 도원결의를 배치한 것은 형제와 군신관계로 엮인 세 영웅의 탄생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들 세 영웅의 생사를 초월한 충의와 우애가 소설 전체를 이끌어나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연의를 읽기 시작하면 그 재미에 빠져 밤잠을 설칩니다. 매번 흥미진진함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인데 처음의 도원결의 장면이야말로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주인공 삼형제는 거상(巨商)인 소쌍과 장세평에게 도움을 받아 전투준비를 완료합니다. 그리고는 정원지가 이끄는 황건적을 무찌르는 등 황건적 토벌에 여러 번 공을 세웁니다. 기도위(騎都尉)인 조조도 황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웁니다. 유비는 스승인 노식이 무고하게 잡혀가자 황건적 소탕을 미루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 와중에 노식을 대신한 동탁이 황건적에게 참패하여 달아나는 것을 구해줍니다. 그런데 동탁은 유비가 평민임을 알고는 깔보기만 했습니다. 이에 불같은 성격의 장비가 칼을 뽑아들고 외칩니다.
황건적을 무찌르는 조조 [출처=예슝(葉雄) 화백]
“우리가 몸소 혈전장에 뛰어들어 구해주었건만 도리어 이 놈이 무례하게 군단 말이오? 내 이 놈을 쳐 죽이지 않고는 울화통이 터져 죽을 거요.”
모종강도 장비의 마음을 응원하는 시 한 편을 실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돈이 대접받는 세상 人情勢利古猶今
그 누가 평민이 영웅인 것을 알겠는가 誰識白身是英雄
어떻게 장비 같은 시원시원한 사람 만나 安得快人如翼德
세상에 양심 없는 놈들 모두 없애버릴까 盡誅世上負心人
연의 첫 회의 첫 문장은 ‘천하의 대세는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반드시 나누어진다.(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입니다. 합치고 나눠지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위의 시가 그 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세의 원천은 백성입니다. 그래서 백성이 곧 하늘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인 백성의 힘을 누가 이용하나요. 권력을 ‘휘두르려는’ 야심만 넘치는 자들입니다. 결국, 착한 백성은 그들의 교활한 정치적 수순에 휘둘리고 굴복당합니다. 무엇이 변했을까요. 권좌의 주인만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유지에 거슬리면 또다시 역도(逆徒)가 되고, 권력유지에 필요하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만백성이 됩니다. 모든 것은 그들이 만들어내고 그들이 결정합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만들고 결정할까요. ‘하늘같은’ 백성, ‘백성을 위한’ 정치는 서책(書冊)에만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잠시 꺼내어 써먹는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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