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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中 마오쩌둥 만세군 격파한 ‘갑종장교’부대…軍 “영웅 잊지 않겠다”

by 까망잉크 2023. 6. 13.

中 마오쩌둥 만세군 격파한 ‘갑종장교’부대…軍 “영웅 잊지 않겠다”

입력 2023.06.13. 17:18업데이트 2023.06.13. 17:37
 
백마고지 전적비 모습.

1952년 10월 6월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놓고 정전 협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상황. 중공군 제38군이 강원도 철원 395고지 일대를 기습적으로 쳤다. 북한 인민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탱크를 밀고 남침에 나섰듯 중공군은 이날 국군 9사단 전 지역에 사격을 퍼부었다. 이어 봉래호 수문을 폭파했다. 국군 후방을 관통해 흐르는 역곡천을 범람시키려는 의도였다. 국군의 증원과 군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렇게 정전 협상이 진행 중이던 그때 중공군은 집요하게 분계선을 남쪽으로 밀고 내려오려 했다.

중국공산당 주석 마오쩌둥과 부주석 린뱌오가 홍위대를 검열하고 있는 포스터. /조선일보 DB

395고지 지형지물을 꿰뚫고 전략적인 공격을 시도한 이들 중공 38군은 보통 부대가 아니었다. 이 부대는 6·25전쟁에 참전, 국군은 물론 미군 등 연합군을 수없이 격파했다. 얼마나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렸는지 당시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1893~1976) 주석은 이 부대에 ‘만세군(萬歲軍)’이라는 영웅 칭호를 줬다. 전략적 요충지인 395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만세군’ 부대를 투입해 필살의 전투를 개시한 것이다.

국군 9사단은 목숨을 걸었다. 예하 28, 29, 30연대를 교대로 투입하며 ‘만세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거듭했다. 10일간 12차례의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395 고지의 주인이 7차례 바뀌었다고 육군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치열함이 어땠는지 낱낱이 보여주는 숫자다. 포탄 수십만발이 이 고지에 떨어졌다. 풀 한포기 남아있지 않았다. 고지가 하얗게 변한 모습에 ‘마치 백마(白馬)가 누워있는 것 같다’하여 이때부터 이 고지는 ‘백마 고지’라고 불렸다. 국군은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백마 고지 정상에 태극기를 꽂았다. 9사단은 중공군 8234명을 사살하고 57명을 생포했다. 9사단은 3416명의 사상자를 봤다.

/조선일보 그래픽

지금 철원 백마고지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은 9사단의 육탄전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백마고지 전투에서 맹활약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갑종장교(甲種將校·First Grade Officer)’다. 갑종장교는 장교 양성 기관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던 1950년 육군보병학교의 갑종간부후보생과정을 이수하고 임관한 육군 장교를 말한다. 육사 등 장교 양성 기관이 자리 잡힌 1969년 230기를 마지막으로 갑종장교는 사라졌지만, 이들은 그전까지 6·25전쟁을 비롯해 베트남 파병까지 나라를 위해 최전선을 달렸다.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갑종장교 모습. 갑종장교 8기인 김종진 당시 소대장 등이 동료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갑종장교 70년사

육군 전사에 따르면, 당시 9사단 소대장 대다수가 갑종장교였다. 백마고지 전투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갑종장교가 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갑종장교가 ‘육탄 3 용사’로 잘 알려진 강승우 소위다. 강 소위는 갑종장교 제7기로 임관해 9사단 30연대 3소대장에 보직됐다. 그는 백마고지 전투 내내 항상 앞장서서 소대원을 이끌었다. 그는 1951년 10월 12일 오전 소대 선두에서 백마고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때 중공군의 기관총에 소대원들이 푹푹 쓰러져가는 광경을 봤다. 강 소위는 이대로 가면 소대 전멸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오규봉, 인영권 일병과 함께 수류탄을 뽑아들고 육탄 돌격을 감행했다. 성공이었다. 적 기관총 진지를 폭파했다. 그러나 강 소위와 그의 대원들은 전사했다. 1중대는 이들 육탄 3용사 덕에 뚫린 진출로로 밀고 들어가 오후 1시 20분 백마고지 정상을 탈환했다.

 

정부는 전투 후 고 강승우 소위에게 을지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방부는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과 전쟁기념관에 육탄 3용사 동상을 건립했다. 강 소위의 고향인 제주도 탐라 자유회관에 육탄 3 용사 상이 건립됐다.

육군 갑종장교 전우회 회원들이 13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육군

육군은 13일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해 강 소위를 비롯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갑종장교를 기리기 위해 갑종장교전우회 임원단을 충남 계룡대 육군본부로 초청하고 박정환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을 참배했다고 밝혔다.

갑종장교는 1950년 1월에 입교한 1기 후보생부터 1969년 8월 30일 임관한 230기를 마지막으로 4만5424명의 육군 장교를 배출했다.

이장흠(예비역 소장) 갑종장교전우회장 등 임원단 11명은 현충원을 참배하며 전우들의 넋을 위로했다. 육군은 이날 갑종장교의 70여 년 역사와 발자취를 기록한 감사 영상을 선배들에게 헌정했다.

육군은 “갑종장교의 국가와 군을 위한 헌신을 재조명하고 노병들의 명예를 선양하며,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갑종장교는 6·25전쟁 참전 장교의 32%를 차지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는 참전 장교의 66%가 갑종장교였을 정도로 국군 창설 초기 약 20년간 초급장교의 주축을 이뤘다.

그러나 1969년을 끝으로 갑종장교 양성이 중단된 데다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중심으로 육군 장교가 양성되면서 갑종장교는 그 헌신에 비해 조명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

13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육군 갑종장교전우회 초청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육군군악의장대대를 사열하고 있다. 갑종장교는 1950년 1월에 입교한 1기 후보생부터 1969년 8월 30일 임관한 230기를 마지막으로 육군보병학교에서 배출한 4만5424명의 육군 장교를 말한다. /육군

이장흠 갑종장교전우회장은 “노병을 잊지 않고 환대해준 육군에 감사하다”며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준비하고 대비해야 지켜낼 수 있으니 국가와 국민을 위해 밤낮으로 매진해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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