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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

연자방아

by 까망잉크 2009. 6. 5.

 

 

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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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자매 /연자매, 중요민속자료 제32호)
축력농기구의 하나.

알곡 및 가루를 내는 도구로 연자방아 라고도 부른다.

방아는 디딜방아·연자방아·물레방아의 순서로 발달해왔다. 간단한 곡식은 맷돌이나 절구, 매통을 이용하지만 대규모로 찧는 데는 방아가

필요하다. 디딜방아 소출이 작지만 소나 물이 없어도 쉽게 설치할 수가 있어서 가장 많이 보급되었다.

반면 물레방아는 효율성은 뛰어나지만 물이 귀한 농촌에서는 설치가 어려웠다. 연자매도 윗돌과 밑돌에 쓰이는 커다란 돌을 구해야 하고

축력에 의존하는 부담이 있어 소가 귀한 농촌에서는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개인이나 마을공동

소유로 이용했다. 그 원리는 윗돌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나무막대를 가로질러서 소의 멍에에 고정시키면 소가 돌면서 돌을 돌리게 된다. 돌은 요철(凹凸)로 만들어져서 집어넣은 곡식이 돌아가는 돌의 압력에 눌려 으깨지면서 껍질이 벗겨지거나 가루가 나게끔 되어 있다.

보통 소를 모는 사람과 곡식을 넣는 사람 2명 정도가 있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오래 사용 하면 돌의 요철이 마모되어 작업능률이 떨어지므로 주기적으로 대장장이를 불러다가 정으로 돌을 쪼아서 요철을 보강해주어야 한다.

정미소가 발전하고 전기에 의한 정미법이 보급되면서 차츰 사라져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다.

 

      

 

   

<<파주시 파평면 양미골 연자방아에 얽힌 전설>>

 

파평면 덕천리 양미골 뒷산 비탈진 후미진 도랑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고려말 유관(柳寬)전승을 지낸 사람은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급제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면서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를 도와 개국 원종 공신이 된 후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140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 관사를 겸직하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좌빈객을 역임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高麗史)를 수고하는 등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대학자였다.

선생은 고향인 파평면 양미골에 본가를 두고 서울 동대문밖에 초가삼간을 짓고 살면서 집옆에 연자방아를 만들어 동리 사람들이 방아를 찧어가고 내는 방아세로 연명을 하였으며 울타리도 없으며 여름철에 비가 오면 지붕이 세는 초라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청백리에 녹선된 강직한 선비이다. 그 당시 좌우승지로 이조 참의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있는 이희가 문안차 유관선생을 방문했다가 너무나 초라한 광경을 보고 사재로 울타리와 집과 방앗간 지붕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대노(大怒)하면서 어찌하여 경상감사가 재산이 많아 남의 집까지 돕고자 하느냐며 호통을 치니 이희는 이 보수비용은 조상님의 유산이 좀 있어 마련한 것이니 조금도 국록을 축낸 것이 아님을 아뢰오니 선생은 즉시 이희 재산을 조사토록 한 바 사실과 틀림이 없었다 한다. 어느 날 유관 선생은 이희에게 말하길 내가 먼저 세상을 뜨거든 이 연자방아를 고향으로 옮겨 내 마누라(老妻)가 여생을 살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한 후 돌아가시니 이희는 그 유언에 따라 연자방아를 현 파평면 덕천리 양미골로 옮기어 같이 살게 되었다 하며 사모님이 별세하여 후손이 없는 처지인지라 연자방아는 자연적으로 경주이씨 이희가 관리하면서부터 수백년이 흘러 오늘까지 내려오다가 일제를 거쳐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고 자취만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출처:다음,브리태니커,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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