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자가 된 효자, 음년이 된 열녀
첫 마음
청나라 위상(魏祥 (1620-1677)이 쓴 『우서(偶書)』에 이런 대목이 있다.
“통증을 참기는 쉬워도 가려움증을 참기란 어렵다. 울음을 참기는 쉽지만 웃음을 막기란 어렵다. 근심과 괴로움을 참기는 쉬워도 기쁨과 즐거움을 참기는 어렵다. 빈천을 참기는 쉽지만 부귀를 참기는 어렵다. 위엄과 무력 앞에 인내하기는 쉬워도 부드럽게 회유하는 데 인내하기란 쉽지 않다. 성내 욕하는 것을 참기는 쉬워도 웃고 다정한 것을 참기란 어렵다. 오직 참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바로 참 야야 만 할 것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다.”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은 힘들고 어려운 데 있지 않고, 편안하고 쉬워 보이는 곳에 있다. 권세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분노가 내게 힘을 주기 때문이다. 두고 보자는 오기가 있는 한 모욕은 견딜 만하다. 하지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가장한 회유를 버티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다. 여기에 한번 넘어가기만 하면, 그간에 쌓아온 보람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드높던 의기는 진창에 처박히고, 남들의 기림은 단번에 손가락질로 바뀐다.
처음 먹은 마음을 지켜가기가 참 어렵다. 젊은 날 어렵게 쌓아올린 명성을 제 손으로 허물고 마는 이를 많이 본다. 높은 자리에 오르더니 사람 싹 변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슬픈 일이다.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청성잡기(靑城雜記)』를 읽는데 음녀(淫女)가 된 열녀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불효자가 된 효자, 음년이 된 열녀
전라도 영광 땅에 살던 강(姜)씨가 같은 고을의 이씨를 후처로 맞았는데, 이씨 역시 양반 가문이었다. 강씨는 제 세도를 믿고 이웃 백성을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이웃 백성이 관에 그의 비리를 밀고했다. 강씨는 제 세력을 믿고 함부로 굴다가 곤장을 되게 맞고 돌아와 갑작스레 죽었다. 후처 이씨는 전처 소생의 아들에게 매일 밤 울며 말했다. “이 원수를 못 갚으면 너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두 사람은 한 여름에 문을 열고 자던 이웃 백성을 찾아가 칼로 찔러 죽이고 관에 자수했다. 새로 온 사또는 그 의리를 사모해 옥에 가둔 뒤에도 음식을 제공하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며 격려했다.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효자와 열녀의 얼굴을 보겠다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사건은 조정에까지 보고되었다. 영조는 좋은 곳에 유배 보내 모자가 서로 의지하며 지내게 하고, 마을에는 효자문과 열녀문을 동시에 세우게 했다. 유배지는 하동이었다. 이들의 의리를 사모하여 사람들이 노자로 준 돈만 수백 금에 달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예를 표했다.
모자는 유배된 고을 포교의 집에 묵게 되었다. 포교 박부장은 이씨의 어여쁜 자태를 보고 흑심을 품었다. 아들은 고향집의 일을 살피기 위해 자주 휴가를 떠나 집을 비웠다. 방이 하나 뿐인 박부장의 집에서 이씨는 주인 내외와 윗목 아랫목을 나눠 거처했다. 박부장은 이씨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제 처와 음란한 짓을 하여 이씨의 음심을 도발했다. 마침내 둘은 사통하여 이씨가 임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추잡한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돌아온 아들은 불러진 어미의 배를 보고 연유를 물었다. 아들은 통곡하며 관가로 가 어미를 고발했다. 추문은 조정에 즉각 보고되었다. 이씨는 종이 되어 흑산도로 다시 유배갔다. 가는 길에서도 이씨는 창기보다 추잡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었다. 아들도 어미를 고발한 불효로 멀리 강계 땅에 유배 갔다. 세웠던 효자문과 열녀문은 헐렸다.
처음 지아비의 원수를 갚을 때는 매일 이를 갈며 맹세하고, 의리로 마음을 다잡았다. 귀양 가는 길에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갔다.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었으되,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의당 할 일을 마친 사람의 홀가분함만 있었다. 그러다 본능의 유혹에 이끌려 제 손으로 자신의 명예를 짓밟았다. 한번 의기가 꺾이자 음탕하고 더러운 욕망만 남았다. 자랑의 표징이었던 효자문과 열녀문은 고을의 수치가 되어 기둥이 뽑히고 비석이 동강 났다.
열녀 한 사람이 음욕을 못 이겨 탕녀가 된 것이야 열녀문 하나 헐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이것이 나라 일이면 문제가 단순치 않다.
광해군 때 윤인은 아내가 제 머리를 깎아 손님 접대하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뜻을 꺾었다. 이후 간신 이이첨의 심복으로 들어가 못하는 짓이 없었다. 식솔들은 높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다. 하지만 뒤에 인조반정으로 끌려와 참형을 당했다. 죽기 전 그가 남긴 말이 이렇다. “배 고프고 추운 것을 10년만 참았더라면 어찌 오늘 같은 일이 있었으랴.” 후회는 늘 한발 늦게 오는 법이다.
사람은 첫 마음을 잘 간직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않는 의기, 공명정대한 자세,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 우리가 지켜야 할 첫 마음이다.
출처: http://jungmin.hanyang.ac.kr/
[출처] 불효자가 된 효자, 음년이 된 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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