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1488 - 1544)
- 중종의 즉위 : 진성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연산군의 폭정으로 성희안, 박원종 등의 추대로 임금이 된 중종은 새로운 정치를 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어진 정치를 베풀고 연산군의 폐정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자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여 임금의 자문을 맡도록 하였다. 경연을 부활시켜 정책에 대한 논쟁을 자유롭게 하고 인재를 많이 등용시키기 위하여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실시하였다. 과거제도의 모순을 없애고자 조광조 등의 제청으로 현량과를 설치하고 인재를 뽑아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 개혁정치 :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폈다. 성리학에 의거한 철인군주주의를 펴 나가기 시작하였고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미신 타파에 주력하였다. 백성들의 상부상조 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향약을 실시하여 건전한 정신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의 생각이 급진적이고 이상적이라서 옛날사상에 물들어 있던 훈구세력이 쫓아오지 못하여 이상적인 정치를 펴나가지는 못했다.
- 중종의 가계도 :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와는 자식이 없었으며 공신들의 반대로 폐비되었고 장경왕후 윤씨와 1남1녀를 두었고 문정왕후 윤씨와 1남 4녀를 두었다.
- 삼포왜란 : 좌수사 이우징이 왜인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왜인들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대마도 소오의 힘을 빌러 5천 명의 군사를 일으켜 부산포, 내이포를 함락시켰다. 이 사건이 바로 삼포왜란이다.
인종 (1515 - 1545) < 위로 >
- 효(孝)의 세자 : 1515년 장경왕후 윤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호는 태어난지 일주일도 안되어 어머니인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1520년 호가 6세가 되던해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너그러운 마음씨와 인정이 많아서 사람들로부터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
- 인종의 즉위 : 1544년 세자는 깊은 슬픔에 잠긴채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바로 12대 임금 인종이었다. 인종은 바른정치를 하고자 노력을 하였고 그로인하여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았다. 인종은 숨은 인재를 구하기 위하여 기묘사화로 폐지된 현량과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기묘사화의 일을 신중히 검토하여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은 인종은 느리고 완만한 개혁을 펼쳐 혼란한 정치를 막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퇴계 이황을 천거해 새로운 정치를 희망차게 펼쳐갔다.
- 인종의 요절 : 문정왕후 윤씨는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인종을 어렸을 적부터 죽이려고 하였지만 계획이 성사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탈로나자 죽을 위기에 처해있었지만 효성과 마음이 넉넉한 인종 덕분에 계속 생활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인종이 왕위에 왕위에 오른지 8개월 30세의 젊은 나이에 어진정치를 마음껏 펼치지도 못하고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 후계자 문제 :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후궁이 2명 있었으나 역시 그녀들 사이에서도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인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의 경원대군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명종 (1534 - 1567) < 위로 >
- 명종의 즉위 : 인종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바래왔던 모든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12세에 왕이된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자연히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가 권력을 손에 쥐자 윤원로, 윤원형 형제는 제세상을 만난것처럼 활개를 치고 다녔다.
- 대윤과 소윤 : 중종때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장경왕후 윤씨나 문정왕후 윤씨는 모두 파평윤씨였고 두 윤씨에게는 남동생이 각각 한명씩 있었는데 사람들은 장경왕후의 동생 윤임을 보고 대윤이라고 하였고,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을 보고 소윤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윤임이 득세하여 소윤의 기세를 꺽어 놓았으나 인종이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제는 달라졌다. 윤원형 파인 소윤이 권세를 잡을 차례였다.
- 수렴청정 : 문정왕후 윤씨는 명종의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대윤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동생 윤원형과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대윤은 기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소윤이 안심하기에는 아니라고 판단하여 그들은 다시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켜 소윤은 확실하게 권력을 잡고 조정을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 명종의 정치 : 명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뜻을 거르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그의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명종은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재위기간동안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권력남용과 사회가 어지러우니 지방의 수령들도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빼앗는 등 위기를 초래하였다.
- 임꺽정 : 1571년에 쓴 명종실록을 보면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가 쓰여있는데 그 내용은 "임꺽정과 그 무리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잘못이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임꺽정을 의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임꺽정을 다르게 본다. "임꺽정은 단순히 도적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는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다." 아무튼 임꺽정은 5년동안 나라를 휩쓸고 다니며 전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보기 드문 사람이었다.
- 을묘왜변 : 조선의 두통거리 중의 하나는 왜구였다. 조정은 권력다툼으로 혼란하고 지방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느라고 정신이없고 국방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왜구들은 문제를 일으켜 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 손을써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선조 (1552 - 1608) < 위로 >
- 세자된 하성군 :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순화세자가 죽은지 몇 년이 지났지만 후사가 없었다. 나날이 수척해가는 명종을 보며 조정의 대신을 비롯하여 인순왕후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명종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세자책봉을 서둘러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세자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의 인종,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 사이의 명종, 그러면 하성군 (선조)는 누구인가? 중종은 2명의 왕후와 5명의 후궁을 두었다. 5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대윤과 소윤의 다툼에 화를 면하지 못하고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덕흥군만이 화를 면하였다. 덕흥군은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3째아들 하성군은 총명함과 덕을 쌓아서 명종이 그를 총애하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한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하성군은 세자에 오르게된다.
- 선조의 즉위 : 1567년 7월 하성군이 경복궁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니 바로 우리 민족사상 가장 큰 불행을 겪게되는 14대 임금 선조이다. 이때 선조의 나이 16세 였으므로 인종의 비 인성왕후가 대왕대비가 되고 그의 어머니 심씨가 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거행하게 되었다.
- 선조의 업적 : 즉위당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나랏일을 잘 돌보았다. 매일 경연을 열어 정사를 논하였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바른 정치를 베풀려고 노력하였다. 기묘사화때 죽은 조광조의 죄를 풀어주는 등 억울한 사람을 조사하여 원한을 풀어주었다. 또한 현량과를 다시 실시하여 이처럼 선조가 국사를 능숙하게 처리하게 되자 심씨는 1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게 되었다. 나라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조정은 평안하였다. 또한 이황과 이이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두사람에게 어려운 일은 자문을 구하였으며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 당파싸움 : 선조가 즉위하여 나라가 평안을 되찾아갔지만 조정은 다시 당파싸움에 휘말리기 시작하였다. 명종때는 대윤과 소윤이 갈려 싸우던 것이 선조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것이다. 동인 신진세력 이었고 서인들은 나이가 들은 기성세대였다.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조정은 나랏일을 의논하면서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고 있었다. 이에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탕평책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선조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후궁에만 빠져 있었다. 이처럼 정치가 혼란하자 국방력이 흔들리게되어 야인들에게 침략을 받게 되었고 왜인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 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내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하나로 통일하면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힘을 국내에 두기보다는 해외로 나가게 함으로써 일본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륙 침략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1592년 일본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군은 3군으로 나누어 조선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열고 대처하려 하였지만 속수무책 이었다. 한양 함락이 임박하자 조정의 대신들과 함께 평양으로 피난을 가기로 하였다. 일본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하였고 선조는 다시 신의주로 피난을 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적과 싸웠으며 남해안 일대에는 이순신 장군이 승승장구 하였다. 명나라의 원조에 힘입어 평양을 탈환하였으나 다시 일본군은 1597년 정유년에 14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를 정유재란이라 하는데, 결국 명나라와 의병, 수군 등으로 인하여 일본군을 물리치고 조정은 전쟁을 끝내게 된다.
- 이순신 (1545-1598) : 서울에서 태어나 어렸을적 부터 용맹하였고 결국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그후 권지훈련원 봉사, 발포만호, 녹도 둔전사의를 거쳐 전롸좌수사에 임명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그의 능력은 후세에까지 남게 되었고, 부모님을 생각한는 효성또한 지극하였다. 임진왜란때 옥포에서 첫승을 거둔후 싸움을 할때마다 승리하였고 한산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굵직굵직한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도 하였지만, 대신들의 모략으로 인하여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고 이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로 유명하기도 하다.
- 이 황 (1501-1570) : 경북 예안에서 출생하였으며 태어난지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진사에 합격하여 승진을 거듭한 끝에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은퇴하여 고향에 돌아가 제자를 양성하였다. '주자전서'라는 책을 읽고 난 후 성리학에 깊이 빠졌다. 이황은 주자의 주장에 따라 우주를 이(理), 기(氣) 이렇게 이원으로써 설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와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이는 기를 움직이는 기본 법칙을 의미하며, 기는 형태를 갖춘 존재로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학문이 대성하자 '동방의 주자'라고 칭하였다. 인품과 학식이 뛰어나 조정에서 자주 불렀으나 벼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학설은 일본에 소개되어 일본 학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이 이 (1536-1584) :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렸을적부터 영리한 그는 13세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6세때 어머니를 여의자 세상의 허무함을 느껴 한때 불교를 연구하였으나 다시 성리학에 발을 들여놓는다. 명성이 자자한 이황을 직접 찾아가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이는 이황의 학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 (理)와기 (氣)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또 먼저와 나중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세상이 생기면서부터 동시에 존재하여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주기론을 주장하여 아는 것보다 실천을 더 중요시 하였다. 당파싸움이 심해지자 성격이 활달하고 호탕한 그는 동인과 서인의 충돌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예지력도 갖고 있었으나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그의 주장은 백지가 되었고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 (1575 - 1641) < 위로 >
- 세자책봉 문제 :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몸이 약하여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궁들은 아들을 많이 낳아 14명이나 되었다. 선조는 후궁에게서 난 아들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지 않아 의인왕후가 아들을 낳기를 기다렸으나 선조의 나이 40이 넘어서도록 태기가 없었다. 이처럼 세자 문제가 붉어지자 대신들은 세자책봉 문제를 서둘렀다. 이때 동인과 서인의 의견대립으로 선조가 사랑하던 신성군은 희생되고 광해군이 세자에 오르게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였지만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 김씨가 선조의 아들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 하려고 하였으나 선조가 병석에 눕자 어린 영창대군 보다는 광해군을 왕위에 오르라는 교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 광해군의 즉위 :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이다. 힘겹게 왕위에 오른 그는 나라를 잘 다스려야 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그 역시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휘말리고 말았다. 광해군은 임금이 되었지만 여전히 명나라의 고명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광해군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 명나라를 섬기고 싶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소북파를 싫어했다. 이로인하여 광해군은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는 반대세력을 몰아내야 했다.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소북파를 제거하였다. 이렇게 당파싸움에 휘말려 있는 동안 나라의 부정부패는 심해졌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을 다시 짓고자 영건도감을 설치하여 토목사업을 맡아보도록 하였다. 이처럼 건축사업이 활발하자 부족한 재정을 메워 나가기 위해서는 돈을 받고 벼슬을 파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사회는 병이 들었다.
- 중국대륙의 판도 : 1618년 만주 대륙에서 일어난 누르하치가 나라를 세우고 후금이라 칭하였다. 후금은 세력을 크게 넓히려고 침략을 일삼았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전쟁의 잔인함과 피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창 일어나는 누르하치와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신축성 있는 외교정책을 펴 나갔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후금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지만 외교정책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
- 사회의 변화 : 당파싸움이 쉬지 않고 일어나니 백성들은 살고 죽는일에 대해 허무함을 느꼈다. 그래서 유행한 것이 풍수지리설이었다. 사람들은 부지런히 공부하여 출세하는 것보다, 명당 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고 좋은 터에 집을 지음으로써 가만히 있어도 복이 굴러 들어온다는 망상을 하게 되었다.
- 광해군의 폐위 :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서인들은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끝까지 제거되지 않은 김자점과 이귀 등이 1623년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대북파는 몰락하였다.
- 홍길동전 : 지은이가 허균인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로서 그 문학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홍길동전은 조선 시대의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는 사회 풍자 소설이기도 하다. 이는 지은이 허균의 삶과 주인공 홍길동의 모습이 비슷하다. 중국의 유명한 소설인 '수호전', '서유기', '삼국지연의'등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 동의보감 : 1546년 김포의 무인집안에서 태어난 허준은 29세에 의과에 급제하여 내의원 의관으로 출발하였다. 의학에 밝은 그는 왕자의 병을 낫게 하는 등 의술이 좋아 칭송이 자자하였다. 허준은 내의원에 있으면서 의학 연구를 하였다. 선조의 어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찬국을 두고 여러 의관들과 함께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나라 시대에 이미 체계화되어 있느 한의학을 중심으로 동방 의학을 모두 모으고 그와 함께 우리 민족 의학을 바로 세우자는 뜻을 가지고 편집에 임하였다. 광해군 3년 1611년 완성되었다. 한국 의학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귀중한 책이다.
인조 (1595 - 1649) < 위로 >
- 인조반정 :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이 죽고 인목대비가 궁에 갇혔다. 이로 인하여 서인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때 서인인 이귀, 김자점, 이괄 등은 광해군을 몰아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점점 늘어났고 힘은 커지게 되었다. 어려운 고비끝에 반정은 성공에 이르고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능양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 인조의 즉위 : 1623년 경운궁에서 능양군이 즉위하니 16대 임금 인조이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자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에게 상을 내리고 인목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 여주에 귀양을 간 이원익을 불러 영의정 자리에 앉히고, 공신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인조는 왕위에 올라 할 일이 많았다. 먼저 파탄지경에 이른 경제를 살리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해야 했다. 그러러면 검소와 절약을 생활화해야 했다. 성품이 겸손하고 문장에도 뛰어나며 글씨도 잘 쓰는 인조는 사치와 오락을 멀리하였다.
- 인조의 업적 : 1623년 경기도에만 실시해 오던 대동법을 강원도까지 확대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도 쉽게 하였다. 1626년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그 부근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진을 지키기 위한 수어청을 설치하였다. 또한 북방과 해안 지방의 경비도 강화하였으며 군역을 세금으로 대신하는 제도도 마련하였다. 두번의 호란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여러일을 하였다. 화폐의 필요성을 느껴 상평통보라는 화폐를 만들었으며, 청나라 사람들과의 민간 무역을 장려하기 위하여 북관의 회령 및 경원, 압록강변의 중강에 시장을 열어 주었다. 1634년에는 충청도, 전라도 등 삼남에 양전을 실시하여 농사를 지을수 있는 땅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세금 수입을 늘리는 한편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전세법을 폐지하였다.
- 정묘호란 : 임진왜란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 싸움으로 날가는 줄도 몰랐고 국방 정책도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았다. 후금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이로인하여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고 우리에게 불리한 세가지 요구사항을 허락하고 결국 후금과 형제의 나라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 병자호란 : 1636년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에서 군신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해왔다. 조선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청은 군대를 이끌고 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를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이로써 청과 조선은 군신의 관계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갔다.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는 청나라를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 인조의 가족들 :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4남을 두었다. 그중 소현세자는 일찍 세자로 책봉되어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동생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갔다.
- 소현세자 : 인조의 첫째 아들로서 이미 왕위를 계승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병자호란이 끝나자 동생 봉림대군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동생 봉림대군은 청나라는 우리에게 치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몹시 미워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봉림대군의 사상과는 전혀 반대였다. 청나라에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도 발달된 청나라의 문물에 귀를 기울였으며 여러 새로운 학문을 배웠다. 청나라와 명나라의 전쟁시 소현세자를 전쟁에 이끌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봉림대군이 대신 출전해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몇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효종 (1619 - 1659) < 위로 >
- 반청사상을 가진 세자 : 소현세자와는 반대로 봉림대군은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달랐다. 봉림대군의 머리속에는 오로지 반청사상만이 가득차 있었다.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봉림대군을 다시 왕세자로 맞이했다. 전쟁에 봉림대군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어떻게 망하게 만드는지 청나라의 잔인함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인조는 자신과 같은 사상을 가진 봉림대군을 반갑게 세자로 맞아들였다.
- 효종의 즉위 :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뜨자 봉림대군이 즉위하였으니 조선 17대 임금 효종이다. 효종은 즉위식을 치르는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청나라 심양에 있을때 받은 수모를 잊지 말자"는 것이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자 즉시 인사를 단행하였다. 우선 파당을 지어 싸우는 두사람, 영의정 김자점과 호조판서 원두표를 파직시켜 귀양을 보내고, 유학의 거목이요 대학자인 송시열을 등용시키는 등 절개가 굳고 새로운 인물을 천거하였다. 효종은 반청사상이 강했으므로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를 빌미로 청나라가 군사를 일으켰으나 외교로 무마하였다. 이로인하여 효종은 북벌을 결심하였다.
- 효종의 업적 : 효종은 역법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의 역법이 서양에 비해 뒤떨어지는 점을 알고 태음력을 구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각을 계산하여 제작을 하였다. 또 백성들의 부담을 들어주기 위하여 호서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 북벌론 : 1652년 효종은 북벌을 실시하기 위하여 이완을 어영청 대장으로 임명하고 군영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임금의 호위를 맡을 군사를 모두 기병으로 바꾸었다. 또 서울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성곽을 손질하고, 잘 훈련된 병사를 지방으로 분산시켰다. 북벌 계획은 10년 이었다. 세월이 흐르자 지방의 군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각 도의 절도사는 이 병사들을 두 달씩 한양으로 보내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1653년 제주도에 하멜이 표류하자 그를 훈련도감에 감금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발하도록 하였다. 온 나라와 국민들이 화합하여 청나라를 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벌론에 차질이 생겼다. 이는 백성들의 살림이 워낙 가난하데다 흉년까지 곁들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웠고 조정의 대신들은 당파싸움까지 드세어졌기 때문이다.
- 효종의 가족들 : 효종의 부인은 2명 이었는데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1659년 전국에 가뭄이 휩쓸고 있을무렵 원대한 북벌론의 계획을 남겨둔채 효종은 세상을 떠난다.
현종 (1641 - 1674) < 위로 >
- 현종의 즉위 : 현종은 세자로 있을 때 효종의 북벌계획을 누구보다도 잘알았다. 그래서 청나라를 싫어하고 명나라를 숭상하였다. 어린시절에 어린시절에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란 세자는 조정을 향한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1659년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조선 18대 임금 현종이다. 즉위식이 끝나자 현종은 바로 국사를 처리하였다.
- 당파싸움 : 상복을 몇년 입어야 옮은지 그른지로 대신들은 그들의 의견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이런 예론의 문제를 가지고 대신들은 파를 갈라서 그들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현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외침이 없어서 비교적 나라가 안정되었다. 그래서 현종은 효종때부터 비밀리에 해 오던 북벌계획을 중단하였다. 그대신 훈련별대를 창설하여 군사력을 키워나갔다.
- 천재지변 : 현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계속하여 천재지변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로 부터 칭송을 받는 임금이 되지는 못하였다. 날씨가 가물어 소나무까지 말라죽는 형편이었고, 종로통에는 거지가 줄을 잇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백성들은 세금을 내야만 하였다. 현종도 백성들의 힘든 형편을 돕고자 호남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 세자책봉 : 현종은 10세된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과 혼인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순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순은 주위의 사물을 예사로 보지 않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때 까지 질문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순은 7세때 왕세자로 봉해져서 세자의 수업을 착실히 받으며 자라났다.
숙종 (1661 - 1720) < 위로 >
- 숙종의 즉위 : 세자 순이 창덕궁에서 즉위하니 조선 19대 임금 숙종이다. 13세가 되던해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조정은 복상문제로 시끄러웠다. 이렇듯 아버지 현종과 비슷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바로 당파싸움에 빠져들게 된 셈이었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복상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운 초창기를 보냈다. 숙종은 선조 초부터 시작한 당파싸움의 피해를 알고 있는 터라 당파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 하였다.
- 숙종의 업적 : 1675년 숙종은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개성 북쪽의 대흥산성과 황룡산성을 다시 쌓았다. 그리고 외침이 있을 때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북한산성을 다시 고쳐 쌓았다. 이리하여 남쪽에는 남한산성, 북쪽에는 북한산성이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또 금오위라는 군영을 하나 더 설치하여 5영을 만들었다. 또한 군제개편을 하며 양인들이 군역을 담당하는데 많은 폐단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양인 1인당 포를 2필씩 내도록 하여 부담을 덜어 주었다. 또한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신식화폐가 주조 될 때까지 오래도록 통용하게 하였다. 또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우리나라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으며 울릉도에 침범한 왜구를 무찌르고 왜구로 하여금 울릉도에 출입을 금지시켰다.
- 왕비 문제 : 당파싸움 등 큰 사건을 몇몇 치른 조정은 안정을 되찾아갔다. 하지만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가 20세의 나이로 죽고 인현왕후 민씨가 계비로 들어왔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그때 숙종은 소의 장옥정을 총애하고 있었다. 장옥정은 절세미인이었지만 성격이 포악하고 시기와 질투가 심한 여인이었다. 1688년 장옥정이 아들 균을 낳았다. 숙종은 너무 기뻐서 균을 세자로 봉하려고 하였다. 송시열을 비롯하여 반대가 심하자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옥정을 희빈으로 올리고 균을 세자로 봉하였다. 2년후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자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시켰으나 다시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켜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그뒤 희빈 장씨는 민씨를 몰아내고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 위하여 별별짓을 다하였다. 그 뒤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몰아내기 위하여 온갖 주술적인 행동을 했던것이 탈로났으며 숙종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 대동법의 시행 : 숙종은 이러한 치열한 당파싸움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평안도와 함경도 등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 대동법을 실시 하였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 추진해 온 토지 사업을 완료하였다.
- 사회안정 : 숙종의 재위기간은 45년 10개월로 무척 길다. 이 기간에는 국내적으로는 당파싸움이 치열하여 정치적으로 혼란하기도 하였지만 외침이 없어서 사회는 안정되었다. 숙종은 수많은 당파싸움을 겪으면서 1720년 60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의 능은 서오능이라고 불리우며 경기도 고양군에 위치해있다.
경종 (1688 - 1724) < 위로 >
- 불쌍한 세자 : 희빈 장씨의 몸에서 태어난 균은 태어난 지 두달만에 당파 싸움의 주인공이 되었다. 균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에게 인현 왕후가 아들을 낳을지 모르니 좀더 기다리라는 서인들의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균은 세살때에 세자로 책봉되고 그의 어머니 장씨도 소의에서 희빈으로 벼슬이 올랐다. 2년 후 장씨는 중전이 되었다가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다. 이렇듯 어머니 장씨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 경종의 즉위 : 1720년 세자 균이 왕위에 오르니 제 20대 임금 경종이다. 경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과인은 당파 싸움을 근절시키며 백성들을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겠음을 온 천하에 선포하노라" 이렇듯 경종은 포부는 컸지만 몸이 너무도 약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혼란한 정치 : 경종은 짧은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사화만 4번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귀양보내거나 죽이고 자랑할 만한 치적은 하나도 남기지 못한채 임기를 마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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