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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 #3 <영조-순조>

by 까망잉크 2010. 1. 20.

 

조선왕조 오백년 역사

영조 (1694 - 1776)
  • 세자의 출생 : 숙종의 후궁인 최씨에게서 태어난 영조는 어릴 때 이름이 금이었다. 금의 어머니 무수리였다. 하지만 금을 낳자 숙종은 최씨에게 정2품 소의 벼슬을 내렸다. 금은 병약한 이복형 균과는 달리 튼튼하게 자랐다. 균과 금은 비록 이복형제지만 유난히 다정하게 지냈다.

  • 영조의 즉위 : 경종이 37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자에 오른 금이 제 21대 임금으로 오르니 바로 정치, 문화의 전성기라고 불리우는 바로 영조이다. 영조는 당파싸움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한쪽당이 승리하면 반대 당은 역적으로 몰아 모조리 죽인다는 것도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내가 왕위에 오르면 기필코 당파 싸움을 없게 하리라는 생각을 가졌다. '탕탕평평'이란 말은 어느 한쪽도 치우치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공평하게 정치를 행하겠다고 말이다.

  • 영조의 치적 : 영조는 당파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하여 대신들의 말에 절대로 동요하지 않았다. 탕평정책으로 절제와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세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균역청을 설치하고 균역법을 실시 하였다. 균역법은 양인 1인당 군포 2필씩 내는 것을 1필로 내도록 하여 어려운 농민들의 생활에 보탬을 주었다. 그리고 모자라는 수입은 魚, 鹽, 船稅를 징수하여 보충하였다. 영조는 또한 국방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수어청에 조포를 제작하도록 명하고 군사들에게 조총 훈련을 시켜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또한 민심을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민심이 임금을 떠나 있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펴도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태종때 설치했다가 없어진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는 영조가 신임하는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임명하여 아무도 모르게 민심을 파악하였다. 농업의 발전을 위하여 각 도에 제방을 튼튼히 하여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환곡제도의 폐단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서얼 출신들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여 사회의 불만 요소를 제거하였다. 영조는 성격이 엄격하고 작은 일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 성품을 가졌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나마 당파 싸움을 잠재울 수 있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밀고 나갔다.

  • 사도세자 : 영조는 정비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정빈 이씨가 낳은 효장세자는 일찍 죽고, 영빈 이씨가 낳은 아들이 장헌 세자이다. 영조의 나이가 마흔이 되서야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에 정헌세자는 태어난지 2개월 만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그리고 10세때 혜빈 홍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영조는 성격이 급하고 엄격했다. 그 성격 그대로 장헌세자를 대하니 세자는 영조 앞에만 서면 겁에 질려 아무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영조의 눈길이 미치지 않으면 일시에 풀어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세자의 생활은 이상하였다. 그리하여 그 비행이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영조는 세자를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하였고 뒤주 속에서 장헌세자는 그렇게 죽어갔다. 당파싸움을 없애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한 영조였지만 결국 시파와 벽파의 당쟁에 휘말려 아들까지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 영조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후회하고 아들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혜빈 홍씨는 남편이 죽어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홍씨는 한많은 60평생을 한중록 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많은 이야기를 썼다.

  • 학문의 변천 : 조선의 학자들 중에서 이제껏 발달해온 성리학을 비판의 눈으로 보고 실학을 받아들인 사람을 실학자라고 한다. 실학자들의 학문적 관심은 먼저 농촌 문제에 쏠렸다. 농촌이 잘 살아야 사회가 편안하며 나라도 부강하였다. 그래서 실학자들은 농촌문제에서 토지, 조세, 교육, 군사 등의 문제점을 해결해 가고자 하였다. 실학은 영조와 학문 보호 정책으로 한때 융성하였으나 오랫동안 성리학을 숭상해 온 사회 분위기는 실학자들의 개혁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정조 (1752 - 1800) < 위로 >

  • 고독한 세자 :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의 둘째 아들 왕세손은 어렷을 적부터 책을 좋아하였다. 할아버지 때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당파싸움에 의하여 희생될까봐 영조의 눈치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 정조의 즉위 : 1776년 왕세손이 경희궁에서 즉위식을 갖고 임금에 오르니 22대 임금 정조이다. 왕세손의 시절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였으나 즉위하면서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하는 임금이어서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를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준 홍국영을 승지로 명하고 임금의 좌우에서 명을 받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권을 위태롭게 하는 친척이나 대신들의 횡포와 음모를 미리 방지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은 학식이 높은 신하들이 모여 경서와 사기를 논하며 정치가 잘 되었나 못되었나, 백성들의 고통은 무엇인가 등을 살피는 한편 학문의 진흥과 타락된 풍습을 본래의 순수함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규장각은 임금 직속의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하는 외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 당시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학자들이 벽파나 시파 등 어느 당에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규장각에 모으려는 정치적 속셈이었다. 이리하여 박제가, 유득공,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당파 싸움에 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 규장각 : 정조는 왕세손으로 있을때부터 전 임금들이 지은 책이나 글씨, 그림 등을 한 곳에 모아 보관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생각을 해 왔다. 정조가 임금에 오르자 그는 규장각에 어제나 어서를 보관함은 물론 이름난 학자들을 모여들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을 모두 서얼 출신들로 뽑았다. 이덕무, 유제공, 박제가, 서이수 등을 등용하여 규장각 일을 모두 맡겼다. 검서관들이 규장각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글씨 쓰는 소리만 들릴 정도였다. 나중에 규장각 검서관 4명은 실학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조선 후기 학문이나 예술을 크게 불러일으킨 중심 기관으로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 정조의 가계 :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의빈성씨와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수빈 박씨와의 사이에 1남 1녀가 있었다. 정조는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아버지 사도세자가 그리웠다. 정조 13년 사도 세자의 묘에 가본 정조는 아버지의 초라한 묘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자기도 죽거든 아버지 묘의 가까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도 화성에 묻혀 있으며 묘의 이름은 건릉이다.

  • 순조 (1790 - 1834) 어지러운 세상 : 정조가 수빈 박씨와의 사이으 공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정조가 11세가 된 세자를 두고 세상을 떠나게 되자 세자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때는 청나라에서 들어온 천주교 신자가 늘어만 갔고 사람들은 '사람은 평등하다', '양반이고 상놈이고 할것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식 이다'라는 말에 감동하여 많은 사람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정조는 자신이 죽은 뒤 당파싸움 이 일어나면 어린 세자가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걱정이 태산같았다.

  • 순조의 즉위 : 11세로 세자 공이 왕위에 오르니 23대 임금 순조이다. 11세의 어린 나이 때문에 증조모 되는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당파싸움은 끊이질 않았다. 벽파가 먼저 득세하여 시파를 몰아내기 위하여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수렴청정 중인 정순왕후는 오가작통법을 써서 천주교인을 모조리 잡아들라고 지시하였고 그 효과는 매우컸다. 정순왕후는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을 조정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1802년 정순왕후는 정조의 승하로 미루어온 순조의 혼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김조순은 시파이면서도 벽파들 틈바구니 속에서 벼슬을 하고있는 안동김씨였다. 그는 사람됨이 뛰어나 그동안 벽파들을 미움을 받지 않고 지내왔다. 정순왕후는 김조순의 딸과 혼인하여 순원왕후로 책봉되었다. 이로써 안동김씨의 세도가 시작되었다. 순조의 나이 15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 때부터 안동김씨들이 서서히 정권을 잡아가기 시작 하였다.

  • 세도정치 : 김조순은 우선 반남 박씨이며 임금의 외사촌인 박종경을 선혜청 당상관으로 임명하여 실권을 쥐게하고 그 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를 박탈했다. 이제 조선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이들은 돈을 받고 벼슬을 팔고 샀으며 재물을 모으기 위해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한나라의 정치가 안동김씨 일가의 부귀영화에 이용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주교 박해는 계속되어 나라가 더욱 어지러웠다. 순조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풍양 조씨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였으나 이들또한 자신의 가문만 잘되기 위해 권력을 움켜 잡을뿐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은 별로 있질 않았다.

  • 홍경래의 난 :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자 백성들은 내일이 없는 어두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천주교 탄압으로 사회는 극도로 불안하고, 가까운 바다에 출몰하는 이양선이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이에 홍경래는 불만을 품고 1811년 서북인들을 차별대우 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켰지만 결국 5개월만에 패배하였다.

  • 세도정치의 희생 : 순조는 34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자랑할만한 치적이 별로 없다. 순조는 오랫동안 홍수와 가뭄, 당파싸움 세도정치의 횡포 등 많은 일을 겪고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 (1827 - 1849) < 위로 >

  • 헌종의 즉위 : 순조가 4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어린 왕세자를 임금으로 내세워야 했다. 이때 왕세자의 나이 8세. 올바른 세자 수업도 받지 못하고 국사를 돌보아야 했다. 왕세자가 경희궁에서 즉위하니 24대 임금 헌종이다. 헌종이 등극하였을 때 신정왕후는 28세였고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46세였다. 안동김씨인 순원왕후는 그 동안 며느리 풍양조씨의 일가에게 빼앗겼던 정권을 다시 되찾기 시작 하였다. 순원왕후는 홍경래의 난을 거울삼아 서북인들도 관리로 등용시킨다는 교지를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하였다. 헌종의 나이 11세가 되자 순원왕후는 왕비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였다. 그래서 안동김씨 김조근의 10세된 딸을 효원왕후로 책봉하고 그녀의 아버지를 영흥 부원군으로 봉하였다. 김조근 순원왕후의 8촌된 가까운 친척이었다. 1840년 헌종의 나이가 15세가 되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임금의 외척되는 풍양조씨가 다시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1846년 임금의 외할아버지 조만영이 죽고 그의 아들도 죽고 사람이 남지 않게 되자 다시 안동김씨들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풍양조씨와 안동김씨가 서로 어렇게 정권을 잡으려고 싸움을 일으키고,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후와 후궁들은 후사가 없어 고민속에 나날들을 보냈으며 헌종또한 세도정치의 희생이 되었다가 1849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이양선 출현 : 외국의 배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양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조선인은 그들을 배척하였고 통상도 거절하였다.

철종 (1831 - 1863) < 위로 >

  • 강화도령 원범 : 헌종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안동김씨인 순원왕후는 풍양조씨인 조 대비 일파가 자기보다 왕위를 더 빨리 세울 것에 대비해 재빨리 왕위를 이을 왕족을 찾았다. 그러나 왕족을 찾기가 어려웠다. 임금이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동생이나 조카뻘 되는 사람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헌종보다 항렬이 높은 사람이 임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철종이 누구냐하면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왕이 되었다.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세력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웠고 정조대신 다른 사람으로 왕을 추대하려고 한 사건으로 은언군과 은신군 은 귀양을 떠나게 되었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옮겨졌다. 은언군에게는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전계군만 살아남고 모두 양자로 가거나 죽었다. 전계군에게는 다시 아들이 세명 있었는데 원범은 둘째부인 염씨에게서 태어나 원경, 경응의 이복동생이 된다. 이원덕은 다시 반란에 관계되어 원범또한 역적으로 몰려 강화도로 쫓겨났다. 이를 보면 임금의 자리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왕족을 죽였으며 정권을 잡은 대신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가만히 있는 왕족에게 역적의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경우가 많았다. 원범의 형인 원경이 역적으로 몰리자 원범은 의지할 곳이 없었다. 아무튼 원범은 강화도에서 죄인의 취급을 받으면서 못나게 자랐지만 왕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다.

  • 철종의 즉위 : 대왕대비는 강화도에 원범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대왕대비는 하교를 내려 원범을 새 임금으로 모시도록 하였고 아무것도 모르는 원범은 궁궐에 들어와 여기저기 절을하고 난후 큰 관을 머리에 썼다. 대왕대비는 원범을 덕완군에 봉하고 1850년 덕완군이 인정전에서 즉위하니 25대 임금 철종이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만 짓고 왕위에 오른지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원왕후는 그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왕비가 철인왕후 김씨이다. 다시 안동김씨가 세도를 잡았고 철종은 형식상의 임금이었고 국사는 김문근의 마음대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니 벼슬을 사려는 사람들은 안동김씨의 집에 돈을 싸들고 밀려들었고 삼정이 문란하였다. 철종은 그저 술이나 먹고 궁녀들과 노는일에 열중하였다. 강화도에 있을 때는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았건만 했던 그의 몸은 휘청거리기 시작하였다. 결국 왕위에 오른지 14년만에 병이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삼정의 문란 :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자 나라의 법이 필요없어졌다. 환곡이란 봄에 농민들의 곡식이 다 떨어졌을 경우에 나라에서 빌려주었다가 가을 추수 후에 받아들이는 제도이다. 갚을때는 1할의 이자만 내면 되었으나 환곡에서 제일 많은 부정이 이루어졌다.

  • 민란 :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대한 반발은 진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주도에서 함경도 함흥, 경기도 광주, 경상도 창원, 전라도 남해, 황해도 해주에서 민란은 온 벌집을 쑤신듯 일어났다. 후에 철종이 죽고 안동김씨의 세력이 몰락하자 민란은 가라앉았다.

  • 동학 : 이처럼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러가지 문제가 일어나 나라가 혼란하자 사람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지고 이것이 바로 종교이다. 당시에는 뚜렷한 종교가 없었다. 이때 최제우라는 사람이 백성을 구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일어섰다. 그는 수도를 하며 조선왕조의 기운이 다하여 나라가 말세이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 세상에 나와 동학을 일으켰다. 최제우는 우리나라의 풍수사상과, 유, 불, 선 3교의 교리를 토대로 동학을 창시 하였다. '인내천', '천심즉인'의 사상을 기본으로 세도정치의 포악한 정치에 시달리고 있는 농민 대중에게 쉽게 다가섰다.

고종 (1852 - 1919) < 위로 >

  • 임금위의 임금 : 안동김씨의 눈을 피하여 흥선군 이하응이라는 인물은 궁궐에 남몰래 드나들며 대왕대비를 만났다. 만약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면 자신이 임금과 제일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있었다. 순원왕후도 죽고 여전히 안동김씨의 세도는 계속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흥선군의 아들 명복이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 고종의 즉위 : 1863년 신정왕후는 임금이 없으니 제일 가까운 친척 중에서 후사를 결정한다는 말을 하고 곧바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에게 대통을 잇게 한다는 하교를 내렸다. 명복이 왕위에 오르니 26대 임금 고종이다. 이때 고종의 나이 12세 였으므로 흥선군이 대신 정치를 하였다. 대원군은 이제껏 세도를 누려왔던 안동김씨 세력을 사정해 가기 시작하였다.

  • 대원군의 정치 :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를 제거하기 위하여 고루 인재를 등용하여 중요한 자리에 앉혔다. 탐관오리를 없애며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폐지하는 등 중앙집권적 정치 기강을 세웠다. 이런 대원군의 정책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주었으며 서민의 부담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고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재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수많은 천주교 신자를 죽여 대외적인 이미지를 좋지 않도록 만들었으며 쇄주정책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게 하였다. 이렇듯 대원군의 정책이 자꾸 실패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여러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는 대원군의 등장을 막기 위하여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고 정권은 다시 고종과 명성왕후에게 돌아갔다.

  • 갑신정변 : 고종과 청나라는 친했다. 여기에 두려움을 느낀 개화파들이 수구당 우두머리들을 죽이고 개화당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청나라의 힘으로 정변은 3일만에 끝났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땅은 일본과 청나라가 서로 세력을 잡으려는 싸움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 동학혁명 : 갑신정변으로 청과 일본의 세력이 침투하자 반대하는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로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 이었다. 동학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명성왕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 들였다. 조선을 넘보던 청나라가 급히 군대를 이끌고 조서으로 들어오자, 일본은 조선에 어려움이 처했을 때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동학군과 조선 정부는 화의를 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서로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자는 청나라의 의견을 무시하고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정치를 공동으로 간섭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의견에 청나라가 찬성하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조선의 정치를 갑섭하여 개혁을 이루겠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본의 승리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를 간섭하기 시작 하였다. 일본은 대원군에게 정치를 대신하게 한 다음 고종과 민씨일파를 몰아냈다. 그리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내각을 출범시켰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본격화되자 다시 동학군이 다른 나라 세력을 몰아내자는 표어를 내걸고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은 일본의 총부리 앞에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은 대원군이 동학당을 선동하고 청나라 세력을 끌여들였다는 이유로 그를 몰아냈다. 박영효 등의 친일파들을 등용하고 고종으로 하여금 종묘에 나아가 홍범 14조에 서약하도록 하였다. 홍범 14조는 청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대원군과 민비의 정치간섭을 없애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갑오개혁이다.

  • 을미사변 :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점더 심해지자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러 일본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것을 안 일본은 명성왕후를 궁궐에 침입하여 죽여버리고 만다.

  • 아관파천 : 일본은 음력을 사용하던 백성들에게 양력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동시에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단발령은 백성 사이에 커다란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내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전국의 백성은 각지에서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이유로 민란을 일으켰다. 을미사변 이후 위험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세력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겼다. 이를 아관파천 이라고 한다.

  • 대한제국 : 갑신정변때 미국으로 갔던 서재필이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부르짖으며 민중의 힘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자고 부르짖었다. 그는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이에 고종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라고 고친다음 왕을 황제라고 칭하니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나라의 안과 밖에 선포하였다.

  • 을사보호조약 : 한마디로 말하면 일본과 조선이 하나로 합쳐짐을 약속한 조약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승리와 함께 미국에 '가쓰라테프트조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다는 협약을 맺어놓은 상태였고 포츠머스 회담으로 한국에 있어서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였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 고종의 퇴위 : 고종은 이토록 두차례의 외국과의 격돌(병인양요, 신미양요)에서 부터 조선이 일본의 지배에 들어가기 전까지 43만에 강제로 임금의 자리를 내놓아야만 했다.

순종 (1874 - 1926) < 위로 >

  • 순종의 즉위 : 고종이 강제로 물러난 다음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27대 임금 순종이자 대한 제국의 제 2대 황제이다. 순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왕위에 올랐고,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겨 우리 나라가 독립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순종이 즉위한 7월 일본은 '한일신협약'을 체결 통감부를 두어 우리나라 정치 감독권을 가졌으며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차관정치를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 조선왕조의 종말 :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이 친일파 세력으로 구성된 일진회의 이름으로 조선 사람들은 일본과 합병하기를 원한다며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망하고 말았다. 전문 8개조로 된 이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은 완전히, 동시에 영원히 일본에게 넘긴다. 한국의 황제 및 황족과 정부 요인들에게는 일본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며 봉급을 지급한다." 이로써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지 27대 임금 519년 만에 종말을 맞았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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