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커덕 척척 철커덕 척척척척…”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 치는 소리에 동네 조무래기들이 다 나와 뒤를 따릅니다.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는 더 흥이 나서 가위를 칩니다. 엿이 먹고 싶어서 입에서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고 무얼 가지고 엿을 바꿔먹나 온통 그 생각뿐입니다.
엿장수 아저씨가 엿 장단으로 분위기를 띄운 다음 소리를 지릅니다.
“엿이 왔어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르는 울릉도 호박엿이 왔어요. 헌 고무신이나 빈 병삽니다. 고철도 삽니다.”
엿장수 아저씨가 구수한 목소리로 흥을 돋우는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별의 별 것을 다 갖고 나옵니다. 놋그릇 깨진 것, 요강, 뚫어져서 못 쓰게 된 양은 냄비, 헌 고무신, 막 소주 됫병. 머리카락, 산에서 주운 탄피….
그러면 엿장수 아저씨는 끌날 같이 생긴 도구를 대고 가위로 톡톡 치면서 엿판에서 엿을 끊어냅니다.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더 달라고 하면 ‘에라 인심이다’ 하고 조금 더 떼 줍니다.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 입니다.
수 레
흔들리는 소달구지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소몰이꾼과, 바쁠 것이 없다는 듯 어슬렁거리며 수레를 끌고 가는 황소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요즈음 한 폭의 그림처럼 「느림의 철학」을 일깨워 준다. 한여름 포플러가 늘어선 비포장 시골길을 지나가던 소달구지는 20~30년 전만 해도 가끔씩 마주쳤다.
바퀴도 차체도 모두 나무로 만들어진 수레는 古代부터 인류가 써왔던 생활 도구였다. 수레는 끌어당기는 動力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조금씩 다르다. 소가 끌면 소달구지, 사람이 끌면 손수레, 말이 끌면 마차라 부른다.
나무바퀴 대신 고무바퀴를 단 수레가 등장해 힘 안 들이고도 많은 짐을 실어나를 수 있는 「개량형 수레」가 등장하기도 했으나, 자동차와 트랙터가 보급되면서 그나마도 보기 힘들어졌다. 가끔 북한의 농촌 실정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화면이나 화보를 보면 아직도 소달구지가 오가고 있다.
목도장
圖章(도장) 대신 서명이 보편화하면서 개인, 단체, 관직 등의 이름을 새긴 木圖章이 보기 힘들어졌다. 말이나 글로 하는 약속의 최종 완결편이라고 할까. 계약서 등 각종 서류에 圖章을 찍는 것은 「법이 보장하는 약속」이었다. 아직 印鑑(인감)제도가 있어서 圖章은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서명에 떠밀린 木圖章은 후미진 서랍 속에서 나뒹굴고 있다.
木圖章을 새겨 주던 도장집도 하나 둘씩 문을 닫고 있다. 도장 파는 기술도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사라지고 있다. 컴퓨터에 입력된 글자 모양에 따라 기계가 정교하게 도장을 파주는 기술이 도입된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아직 보급이 안 된 중소도시에나 가야 木圖章 집을 볼 수 있다.
물지게
50代 이상의 나이에 여간한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도시에 살았건 시골에 살았건 물지게를 져 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수돗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변두리 산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公衆(공중) 수도에서 물지게로 물을 져 날랐다. 시골 사람들도 집안에 우물이 없으면 우물물을 물지게로 져다 먹어야 했다.
긴 작대기의 양 끝에 쇠고리를 달고, 나무 등받이에 천이나 짚을 꼬아 멜빵을 만들면 물지게가 된다. 물을 가득 채운 양철통을 양 끝 쇠고리에 걸고 일어나려면 壯丁(장정)이라야 가능한 일이다.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가 어른들이 지는 큰 물지게를 지고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럽다. 누군가 『요즈음 아이들은 물지게를 지지 않아서 키가 장대처럼 크다』고 했다.
참방짜 수저
명절이나 제사를 앞두고 우리 어머니들은 장농이나 찬장에 깊숙이 넣어 두었던 유기(鍮器)를 꺼내 기와 빻은 가루를 짚에 묻혀 힘껏 닦았다. 이렇게 해서 시퍼런 녹도 제거하고 유기 본래의 황금색 광채를 되살려 냈다. 유기 그릇은 銅(동)과 朱錫(주석)을 10대 3 정도의 비율로 섞어 만든 놋쇠가 원료. 놋쇠를 두들기고 늘리고 다듬어서 그릇 형태를 만드는 「방짜 제작법」과 「퉁짜 유기」라고 해서 鑄物(주물)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주물 제작법」이 있다.
良大鍮器(양대유기)라고도 하는 방짜 유기를 북한에서는 「양대」, 남한에서는 「방짜」라 부르고 있다. 유기는 견고할 뿐 아니라 모양이 정교하고 광채가 예뻐 대야, 그릇, 수저 등은 혼수감으로 빠지지 않았다. 일제시대 전쟁물자로 강제 공출되면서 수요가 줄어든 유기는 광복 후 한때 유행하는 듯 했으나 6ㆍ25 전쟁 후 집집마다 연탄을 때고 양은과 스테인레스 그릇이 나오면서 거의 사라졌다
납활자
납으로 구워 낸 네모난 납 活字를 골라 組版(조판)한 후 잉크를 묻혀서 종이에 압력을 가해 찍어 내는 활판인쇄가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금속활자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활판인쇄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해 일부러 명함이나 간단한 서류 양식을 납활자로 인쇄해서 쓰고 있는 이들도 있다.
1884년(고종 21) 3월 廣印社(광인사)라는 민간 출판사가 일본으로부터 활판기와 납활자를 도입하여, 農政撮要(농정촬요)와 忠孝經集註合璧(충효경집주합벽) 등 농업이나 생활에 필요한 책을 발간한 것이 우리나라 활판인쇄의 시작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신문제작에서는 납활자가 필수였다. 1990년 초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라는 전산화된 신문제작 공정이 도입되면서 납활자를 고르고 조판을 하고, 다시 지형을 떠서 鉛版(연판)을 만들어 신문을 찍어 내던 활판인쇄 시대가 마감됐다.
인쇄소 밀집지역인 서울 중구 충무로 뒷골목에 가면 아직까지 문을 닫지 않은 활판인쇄소가 두어군데 남아 있다. 변하는 세월을 거스를 수 없지만, 이런 인쇄소가 하나라도 살아남아 활판인쇄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옮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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