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역사) 이야기

비가 올까봐 잠도 설치는 ‘설레는 날’

by 까망잉크 2010. 6. 19.

 

 

[100년을 엿보다]소풍

 

따뜻한 봄의 기운이 충만해질 무렵이면 소풍의 계절이 돌아왔다. 초등학생들이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이라면 그건 바로 방학식 하는 날과 소풍 가는 날이었다.

 

1987년 4월 서울 월계동 ‘드림랜드’에 소풍 온 초등학생들이 장기자랑을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소풍 날짜가 정해지면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안달복달했다. 평소 못먹던 군것질거리며 김밥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는 소풍을 맞아 새 옷과 신발을 사주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새 옷을 얻어 입은 뒤에 사이다와 과자, 초콜릿 등을 집어대느라 바빴다. 엄마는 시금치와 오이, 당근, 노란 단무지와 길다란 소시지, 달걀을 샀다. 소풍 전날 밤 엄마가 김밥 재료를 밑손질하느라 바쁠 때, 아이들은 소풍가방을 싸느라 바빴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소풍가방을 꺼내서 돗자리와 과자, 초콜릿과 음료수를 차곡차곡 챙겨 넣었다. 그리곤 이부자리에 누워 제발 내일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소풍을 앞둔 어린이들의 심정은 그 순간만큼은 한결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도 날씨였다.

소풍 날 아침 부엌에 가면 김발에 밥을 펴서 갖가지 재료를 돌돌 말고 있는 엄마 옆에 이미 수북하게 김밥이 쌓여 있었다. 엄마가 은박도시락에 가지런하게 김밥을 넣고 있으면 옆에 앉아 꼬투리를 집어 먹었다. 아침밥도 먹는둥 마는둥, 김밥이 담긴 은박도시락을 받아 가방에 넣고 물통 가방까지 메면 소풍준비 완료. 아빠에게 용돈도 받았으니 이날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부모님은 평소엔 꺼내주지도 않던 카메라를 이날만큼은 특별히 만지게 해줬다.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면서 말이다.

소풍을 어디로 가느냐는 상관없었다. 수업을 듣지 않는다는 것, 학교 밖으로 나들이를 간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웠으니까. 그러나 소풍의 목적을 자연감상과 현장학습, 심신단련에 둔 학교에서는 주로 걸어서 4~5㎞ 정도에 있는 명승고적을 목적지로 택했다. 대규모 인원이 교외로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아 1970~80년대 서울의 초·중·고교는 주로 창덕궁, 경복궁, 서오릉, 공릉 등 궁·능과 어린이대공원, 남산 어린이회관 등으로 소풍을 갔다. 지방에서는 인근의 사찰과 해수욕장, 산, 저수지 등이 주요 대상이었다.

아침나절 한참을 걸어 도착하고 나면 점심시간이 시작됐다. 삼삼오오 몰려 앉아 돗자리를 펼쳐놓고 도시락을 꺼냈다. 대부분 김밥을 싸오지만 간혹 유부초밥이나 볶음밥, 맨밥을 싸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김밥을 먹고 간식거리를 먹고 나면 오후에는 오락시간이었다. 초등학생들에게 소풍의 절정은 보물찾기였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는 사이 교사들은 근처에 도장을 찍은 쪽지를 숨겨놓았다.

중·고교 소풍에선 장기자랑이 하이라이트였다. 80년대에는 포터블 카세트를 들고와서는 유행가에 맞춰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숨겨져 있던 ‘가수왕’이 그렇게 탄생했고 각 반을 대표하는 오락반장들의 숨은 개그 본능도 이날 빛을 발하곤 했다. 그러나 가장 인기를 끈 이들은 교사들의 어투와 행동을 흉내내는 친구들이었다.

90년대 들어 소풍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 마이카 시대가 도래해 가족 나들이 기회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소풍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게 됐다. 소풍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도 이론이 제기됐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현장 체험학습’이 소풍을 대신하게 된 까닭이다.

이름이 바뀌면서 풍속도도 변했다. 궁이나 능 대신 놀이공원, 위락시설로 현장 체험학습을 가고 걷기대회나 마라톤을 하기도 한다. 특히 과중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고교생들에게 ‘현장 체험학습’ 가는 날은 수업 없어 좋은 날, 학원 안 가도 되는 날과 동의어가 됐다. 엄마들도 더 이상 번거롭게 김밥을 싸지 않는다. 아이들은 용돈을 들고 가서 현장에서 음식을 사먹는다. 그러나 벚꽃 활짝 핀 이맘 때면 간절히 소풍을 기다리던 그때가 풍요로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윤민용 기자 vista@kyunghyang.com 

 

댓글